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3회 장자와 불교의 융회 1 – 5
포정이 소를 잡는데 어떻게 해부를 하느냐?
닭고기 드셔보시면 살하고 뼈가 저절로 나눠지는 부위가 있잖아요.
뼈 위에 살이 안 붙어 있고 얹혀 있는 것 아닙니까?
살과 뼈 사이에 빈 공간이 있잖아요.
포정은 그 공간 사이로 칼이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허하게 비어있는 가운데 자리를 任督脈(임독맥)찾아 다니
듯이 칼이 완벽하게 해부를 하고 다닌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은 칼이 뼈에 부딪히지도 않고, 칼날이 상하지
않게 자유자재로 다닌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도인인 겁니다.
養生(양생)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養生이라고 하는 것이 채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허하게 비어있는 자
리를, 우리가 그 자리를 어떻게 쓸 것이냐?
그것이 바로 건강과 양생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養生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氣가 다니고 있는 비어있는 자리들을 정확하게 알아서 그 자리를
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인데요.
中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뭡니까?
마음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마음이 비어져 있을 때, 비어있는 자리가 보이고, 그랬을 때 포정이
소를 해부하듯이 바깥에 있는데도 안에 있는 비어있는 자리가 보여서
칼이 자유자재로 다닌다.’ 이 말입니다. 탄허스님이 이렇게 해석을 하신
겁니다.
緣督(연독)이라고 하는 緣자는,
인연 緣자라고 하는 것은 따를 順(순)자라고 그랬으니까,
그 中 자리, 비어있는 中 자리를 따라서 잘 다니는 것이니까 緣督은 결
국은 “중도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많은 주석들 중에 이 주석을 썼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養生主의 핵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포정해우거든요.
齊物論(제물론)이 胡蝶夢(호접몽)이듯이요.
교재 p 283~284
여기는 뭐라고 그랬느냐? 보시지요.
[칼날은 뭐냐?] 칼이 중간에 다니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칼날은 뭐냐? 우리의 정신입니다.] 칼이 우리의 정신이래요.
[소는 뭐냐? 소는 우주 만유의 객관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우도” 할 때, 소를 찾아서 나가는 그림 열 개를 보면 소가
뭡니까? 道요, 진리잖아요? 찾아야 될 진리라고 하는 비유를 들듯이
여기도 “소는 우주 만물의 객관경계다.”
우주 만물의 객관경계가 있는데, “칼”이라고 하는 내 정신이 빈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어디에다 마음을 두고 있어야 내 마음이 상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養生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도교에서 나오는 모든 과학적인 원
리들이 다 나오게 됩니다. 양생술이 다 나오게 되지요.
어떻게 건강하게 할 것이냐? 어떻게 단전이라든지, 주변에 한의학에 나
오는 혈 자리라든지, 奇經八脈(기경팔맥)이라고 했던 그런 것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의 연구가 養生主의 바탕에서 다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中자리”
[中 자리에 합해야만 한다.
中자리는 지극히 허한 자리요ㆍ진공자리요ㆍ
생사가 끊어진 자리를 中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양생주의 골자입니다.
포정해우는 19년 동안 칼을 갈아쓰지 않았다.] 라고 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탄허스님이 아주 멋진 주석을 남겼습니다.
[고금 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주석을 잘 못 냈는데,
역학의 원리로 말할 것 같으면 10이라고 하는 숫자는
음수의 극수이고, 9라는 숫자는 양수의 극수니,
음과 양의 극수를 합하여 무한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표현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19년 동안 내가 칼을 안 갈아 썼다.” 그랬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고금 학자들이 주석을 안 달아놓은 겁니다.
탄허스님이 “10이라는 숫자는 음의 극수고, 9라는 숫자는 양의 극수니까,
10과 9는 음양의 극수니까 무한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20년 되면 이 포정이 칼을 갈아서 쓰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음양의 극수니까
“무한대로 갈아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주석은 제가 다른 데서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주 탄허스님이 역학을 가져와서,
“장자 포정해우 19년. 칼 갈아쓰지 않은 19년.”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
니다.
영원히 이 사람은 뭡니까? 칼을 갈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비어있는 그 자리를 = 中 자리를 = 연독의 자리를 정확하게 다 보고 다니
니까요. 탄허스님의 이 멋진 주석이 포정해우에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養生의 핵심은 몸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비어있는 마음자리에 양생의 핵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재 p 284
[몸뚱이에 구애받지 않아야 진정한 양생이다.
몸뚱이가 있는지 없는지 잊어버려야 양생이다.
잘 먹고 사는 것이 양생이 아니라 마음이 자유로워야 양생이며,
의식주에 구애받지 않고 생사에 구애받지 않아야 진정한 양생
이다.]
첫댓글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대한민국 고난의 도가니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오길 기원드립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 불 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
장자의 종지는 하나야. 道 밖의 것은 없다는 것...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학의 기원도 여기에 있네요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우리 정신이 어디에 놀아야 상하지 않겠느냐'?
"中 자리"에 합해야만 한다.
"이" 자리는 지극히 허한 자리요, 진공 자리요,
생사가 끊어진 자리다. (養生主의 골자)
고맙습니다 _()()()_
任督脈. 살과 뼈 사이의 빈 공간. 포정의 칼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 中.
포정해우 19년. 양과 음의 극수. 무한대.
養生은 비어있는 자리에 그 핵심이 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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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3-1-5. 莊子와 佛敎의 融會.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