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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산 3 - 우이산 남문으로 입장해 천유봉 정류소에 내려서 다리를 건너다!
어제 2025년 3월 4일 13시 35분 상해 푸동공항 내려 지하철로 상하이 홍차오 훠처짠 (上海 虹桥
火車站) 에 도착해서는..... 16시 59분 고속철(高速动车) 기차를 타고 21시 18분에
우이산베이짠 ( 武夷山北站 무이산북역 ) 에 내려 택시로 우이산 만웨 컬렉션 호텔에 1박 합니다.
3월 5일 리셉션에 택시를 불러 달라니 직원이 택시가 아니라도 됩니까? 라고 해서 승용차를 타고 20위안을
주고 내려 전화번호를 받은후 우이산난먼(武夷山 景区 南门)으로 들어가니 경구 입장권 티켓은 140원
이고 전동차 운임은 1일은 70元 인데, 65세 이상은 입장료가 무료이고 전동차도 절반 값인 40元만 받습니다.
40元에 뗏목 배인 주파이( 竹筏, 죽벌) 130원 합쳐 1인당 170원을 내는데 배 탈 시간을 묻기에 표를 보고는
7개 중에서 마지막에서 2번째인 2시 10분을 선택하고는 전기차인 전동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복건성은 대만(台灣) 과 마주하고 절강성(浙江省) 과 강서성(江西省) 및 광동성(廣東省) 과 인접해
있으며 인구 3,471만으로 한족, 사족, 회족, 만족, 묘족, 장족 고산족이
있는데 아열대라 온난하고 습윤하며 복주 이남은 겨울철이 없으니 연 평균 기온은 17~22℃ 입니다.
3개 경구를 보려고 하니... 1. 운와(云窩), 천유(天游), 도원동 경구(桃源洞景區) : 천유봉(天游峰), 다동(茶洞),
도원동(桃源洞) 에 2. 무이궁 경구(武夷宮景區) : 무이궁(武夷宮), 대왕봉(大王峰) 3. 수렴동-대홍포 경구
(水簾洞-大紅袍景區) : 수렴동(水簾洞), 류향간(流香澗), 대홍포다수(大紅袍茶樹), 영락선사(永樂禪寺) 입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니 전기차인 전동차가 서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타는지라 떠날 것 같아
미처 확인도 하지 않고 타지만 믿는게 있으니..... 여기서는 대개 1. 운와(云窩), 천유(天游),
도원동 경구(桃源洞景區) 로 천유봉(天游峰) 과 다동(茶洞)에 도원동(桃源洞)을 보는 것입니다.
전동차는 안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쪽에 무이구곡 이라고 불리는 강이 흐르고 대나무 숲
에, 차 밭도 가끔씩 나타나는데 10분 남짓 달려서 천유 (天游) 정류소에서 내립니다.
만약에 시간이 충분해 이틀 이상을 본다면 4. 일선천- 호소암경구(一綫天-虎嘯岩景區) : 일선천(一綫天),
삼계봉(三髻峰), 창기령(倉基嶺), 누각암(樓閣岩), 능소봉(凌霄峰), 석문암(石門岩), 호소암(虎嘯岩) 等
5. 연화봉, 우림정요지경구(蓮花峰, 遇林亭窯址景區) : 연화봉(蓮花峰), 구빙고불(扣冰古佛), 묘연사(妙蓮寺),
우림정요지(遇林亭窯址), 요지전관(窯址展館), 용요(龍窯), 도파(陶吧), 연화폭포(蓮花瀑布) 等
6. 무이산 민월왕성 경구 (武夷山閩越王城景區 ) : 무이산 민월왕성은 "古漢城", "閩王城"
으로도 부르며 무이궁 남쪽 24km 지점에 있다. 성지(城址) 면적은
48만 평방미터이며 성내에는 왕과 귀족 주거지, 대규모 관청, 주택, 공방등을 볼수 있습니다.
전동차에서 내려서 안으로 들어가 7~8분을 걸으니 강을 건너는 멋진 다리가 나타나니 이른바
五谷 大橋 (구곡계 주취시 5곡) 대교로 주파이 竹筏 (죽벌) 를 구경할수 있다는 곳 입니다.
다리에서 내려다 보니 뗏목 배인 주파이가 여러척 잇달아 내려오는데.... 이걸 마주친건 행운
이니.... 저 배들은 시간을 정해서 내려오기 때문에 시간을 못마추면 볼수 없기 때문 입니다.
동물원에 가면 사람들은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구경하고 원숭이는 우리 밖의 사람들을 구경한다는데,
여기 다리 위에 관광객과 다리 아래 뗏목에 탄 사람들이 서로를 사진 찍으며 구경하는걸 봅니다.
뗏목선은 길이 7~8m짜리 굵은 대나무 16개를 엮어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 의자 2열로 6개를
놓아 구명조끼를 입은 6명이 타고 뗏목선 앞뒤로 뱃사공이 각각 1명씩 노를 젓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명이 짧은 대나무 대신에 얼핏 보면 대나무 처럼 보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드는지라 6명이 아닌 8명이 타는데..... 전에 구이린(계림)
에서 탄 배는 대나무였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저기도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는지도?
현재 무이구곡의 뗏목 배 주파이는 모두 300척이고 사공은 600명인데.... 이들 중 여자 사공은
80명 이라고 하며 모두 운항 면허를 갖고 있고.... 뗏목의 수명은 약 6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5분쯤 걸어들어가니 '무이 서원' 안내판이 보이고 '주희원(朱熹園)' 이라 새긴 바위가 보이며
가마들이 대기하는걸 보는데 중국의 산에는 모두 돌로 포장을 했으니 흙은 전혀 밟을수가 없습니다.
무이정사 (武夷 精舍) 라는 건물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는데 유학을 대성해 이른바 성리학
곧 주자학을 만든 주자(주희) 가 8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른 곳이라고 합니다.
조선은 성리학 곧 주자학의 나라이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저 주자학을 받아들여
이(理) 와 기( 氣) 대해 더 연구를 했고 이후 조선 선비들의 국교가 되어
조선을 지배한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니 여기 누운 주자는 알고는 있는지나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도 나왔지만... 조선은 저 주자학 교조주의 에 빠져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중국은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이나 고증학에
불교와 도교등 여라 사상이 공존했는데 왜 조선은 주자학 하나만 유일한 사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성리학(性理學) 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 가 집대성한 유학의 주류 학파로 성리학의
어원은 정이가 주창한 성즉리 (性卽理) 를 줄인 것인데,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朱子學) 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 유학이란 뜻에서 송학(宋學) 이라고도 합니다.
송나라 이전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이라는 뜻에서 신유학(新儒學),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이라고도 하고
중화권에서는 송명리학(宋明理學) 이라 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 입니다.
주자(주희) 이전에 범중엄이나 정학(正學) 의 호원(胡瑗), 손복(孫復), 석개(石介),
진양(陳襄) 등은 특색있는 학풍을 폈는데..... 범중엄은 고매한 식견으로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고 호원(胡瑗, ) 은 역(易)을 이론적으로 해명했다고 합니다.
손복(孫復) 은 저술에서 종래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해석을 전개하였으니
중국(宋王朝) 의 정통성과 고전사상의 정통적 부활 및 양(楊)· 묵(墨)· 불(佛)·
노(老) 사상의 배격을 주장하여 송조 국가체제의 정신적 지주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진양(陳襄) 은 <대학> <중용> 에 의거 실천 도덕론을 전개하여 송대 도덕의 격물치지설
(格物致知說) 의 방향을 잡았으니..... 권농정책(勸農政策)이나 향촌민(鄕村民)의
교도에 이용한 "고령선생권유문(古靈先生勸誘文)" 은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채택됩니다.
주자의 학문은 북송에서 일어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며 또 사서를 특별히 중요시하여 주석을 하였고,
《대학》의 〈성의〉 (誠意) 장의 주해는 죽기 3일 전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고 합니다.
이기론(理氣論) 에서는 정이천의 2원론(二元論)을 계승하여 상세·엄밀하게 체계화하고
형이상적, 형이하적 논리 구별을 분명하게 하였으며 또 주돈이의
태극론(太極論)도 받아서 태극(太極)은 오직 1개의 이(理)의 자(字)라고 규정하였습니다.
, ‘이(理)=태극(太極)=도(道, 형이상)’ 와 ‘기(氣)=음양5행(陰陽五行, 형이하)’ 인 것은 형이하(形而下) 의
음양2기(陰陽二氣) 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는 개체와 상즉불리 (相卽不離) 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도덕론(道德論) 에서 이천이 명(命)·성(性)·이(理)·심(心)을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성즉리
(性卽理)’, ‘심즉리(心卽理)’ 라고 한 데 대하여, 주자는 ‘성즉리(性卽理)’ 만을 취하고
심(心) 은 형이하적 (形而下的) 인 것, 즉 음양 2기 (陰陽二氣) 의 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성(性) 은 이(理)이고 지선(至善) 한 것이며 사람의 본연의 것이라고 하였으니
심(心) 은 이(理)가 있는 곳, 이가 작용하는 장소이고 또한 심(心) 의 발동은
이(理) 에 의하여 있게 되는데..... 그 이(理) 야 말로 사람에게 본래의 성(性)이라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연의 성(性) 이 지선(至善) 하지만 현실에는 악도 존재하고 악인도 있으니 그것은
기품에 과불급(過不及) 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理)=태극(太極)’ 이라고 하는
형이상적인 것은 사사물물(事事物物) 속에 있으니 사사물물이 없으면 이(理) 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1물(一物) 에 ‘1리 (一理)= 1태극(一太極)’ 이 있는 것이니.... 논리적 과정을
말하면 이 (理)가 있어야 물 (物)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物)
이 없는 이(理) 는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이기(理氣) 에 선후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 주자에 의하면 1물(一物)에 1태극(一太極)이 있는데, 이 이(理)는 즉 만물의 이(理)이니 달이
호수나 냇물에 비쳐도 달은 원래 하나의 것이라? 이러한 논리가 도덕론에 적용되면
사람은 자기의 본연의 성(性)(理)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을 완성하는
것이며 개별적 인간은 실천에 의해서만 ‘도(道)~이(理)-성(性)’ 을 구현할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수양론(修養論) 은 우선 격물치지(格物致知) 이며 궁리진성(窮理盡性) 인 것이니 주자에 의하면 사사
물물의 이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궁구하는 것이며 나를 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물(物)의 이(理)’ 와 ‘심(心) 의 이(理)’ 와의 통일적인 파악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있었습니다.
후대에 육상산이나 명나라 왕양명이 그 정곡을 찔러 주자를 비판했는데..... 조선에서는 기존의
고려 말, 정몽주의 <의리론> 을 그의 제자 하연은 이를 더욱 심화하여
조선 절의파 사대부의 사상을 <수양론> 으로 발전시켜 계승한 대표적인 성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주자학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니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 (在野的) 입장
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 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 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조선이나 일본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안향이 《朱子全書 주자전서) 를 들여와 연구한 데서 비롯 되었으며, 성리학
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백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하연· 이언적· 이황· 김인후· 기대승·이이 등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
되면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여 정신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중시하는
주리설과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고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주기설 등이 나오게 됩니다.
주리설은 영남지방에서 발전하여 '영남학파' 라고 하는데, 이언적· 이황· 류성룡· 김성일로
이어졌으며, 주기설은 기호지방에서 발전하여 '기호학파' 라고 하는데,
서경덕·김인후· 기대승· 성혼· 이이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김장생 등에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오묘하지만 다르게 보면 휘황찬란한 말장난에 불과할수도 있는 것을
자기 주장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사문난적” 이라고 비난하며.....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등 교조즈의로 흘렀으니 결국 조선이 망하는 큰 원인이 됩니다.
나라는 성인군자가 다스리는게 아니고 인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게 오랜 전통이니 먼저 나라
를 지키려면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하고 강한 군대는 물산이 풍부해 국력이 강해야 함에도
정작 나라를 지킬 군비를 갖출 생각은 않고 유학만 숭상하면 모든게 태평해 진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라?
취안저우 서호에는 이탁오(이지) 석상이 있으니 긴 도포에 양손으로 문서를 잡고 깊이 사색하는 학자의
모습인데...... 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민 양명학 최대의 이단적 사상가로, 모두를 포용하면서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인’ 의 초상으로 개개인의 내면적 깨우침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성리학의 “‘천리(이성)’ 를 존중하고 인욕을 억제하라” 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개인의 사적인 욕망을
긍정하였으니..... ‘선도 악도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童心)’ 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면서,
성인의 말이라도 때에 따라서만 유용한 것이지, 만고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체포됩니다!
하기사 조선은 군비를 갖추지 않고도 나라를 유지할수 있었으니, 이는 천하의 중심이자 세계
최강국인 중국이 지켜주기 때문이었으니.... 조선 임금은 중국에 국서를 보내면서
“못난 신(臣)” 이라고 적었으니 임진왜란때 중국은 연인원 20여만명을 보내 조선을 살렸습니다.
이후 1841년에 아편전쟁에서 하늘 같았던 청나라가 유럽의 영국에 처참하게 패했으면 정신을
차리고...... 이제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자각으로 군비를 갖추어야
함에고 안동김씨 세도정치등 권력투쟁에만 눈이 멀어 군비를 갖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다가 대포 2문을 갖춘 운양호 단 한척이 들어와 수병 22명이 상륙하자 대포 30문
을 가진 광성진의 450명 조선군이 처참하게 박살이 났는데도.... 유학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1882년 임오군란도 청군에 진압을 구걸했고 1884년 갑신정변도 역시 청나라 군대에 진압을 애걸했습니다.
1894년 조선군은 대포에 기관포와 신식 서양총으로 무장하고도 주 무기가 죽창으로 화승총
몇자루를 가진 핫바지 동학 농민군 조차 진압하지 못해 또 청나라 군대에 진압을
애걸했다가.... 일본군이 들어와 청일전쟁으로 사실상 망했으니 저 유학이 원수인가 합니다?
내가 한가지 억울한 것은 조선이 망할 때 일본군과 전쟁을 한 적이 없으며, 작전명령서가
발급된 정식 전투를 한적이 한번도 없고.... 그럼 연대장이라도 회의를 열어 연대
병력을 이끌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일본군과 싸운적도 없이 종이 한 장으로 망한 것이라....
1910년 8월 29일을 경술국치 (庚戌國恥) 라고 해서 조선이 망한 날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어느 외국인의 글에 보니 한참동안 조선이 망한줄 몰랐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면 학생들은 동맹 휴학하고 상인들은 철시한후 종로 네거리로 몰려나와 돌이나 칼,
낫이라도 들고 일본군에 저항해야 하겠지만.... 당일 서울에는 삐라 한 장 뿌려지지 않았고
데모나 시위도 일체 없었으며 그냥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했으며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랬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