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회를 찾으며/전성훈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살다보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반복되는 하루하루 피곤한 생활에 허둥지둥 쫓겨 다니는 게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다. 분주한 듯 나른한 일상생활을 박차고 몇 시간 혹은 반나절 짬을 내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다든지, 고궁나들이를 하거나,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마음처럼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평소 애독하는 어느 일간지 주말 문화계 소식이 마음을 잡아끌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주제로 1930~40년대 풍요로웠던 미술과 문학의 상호 관계를 집중 조명하는 뜻있는 전시회를 한다고 소개하였다. ‘미술가와 문학가의 친밀했던 개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환경적 제도적 장치와 불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문예를 꽃피우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근대 지식인들의 주요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고 4월중 주말에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가까이 지내는 분으로부터 전시회를 다녀왔다면서 사전 예약이 필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분 말씀을 듣고 덕수궁 홈페이지를 찾아봤더니 주말 관람은 전시회 종료 때까지 이미 예약이 끝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평일에 박물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서 덕수궁미술관도 그럴 것이라고 여겼는데 사정이 달랐다. 그때서야 내가 세상을 너무나 잘못 이해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덕수궁도 평일은 한산하여 적당한 날 하루를 골라 예약을 하였다.
덕수궁미술관을 찾은 날은 비가 온 다음 날이라서 하늘이 그렇게 맑고 깨끗할 수 없다. 봄날 하늘은 높이 솟고 구름은 뭉게뭉게 떠 있어 나또한 구름 따라 둥둥 어디로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하루 종일 비를 흠뻑 맞은 초목들이 모두 연둣빛으로 멋지게 치장을 하여 세상이 모두 파랗고 푸르게 보인다.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자 벚꽃처럼 생긴 노란 꽃들이 반기고 있다. 그 꽃을 바라보던 아내가 꽃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 황매화라고 한다. 눈 속에 피는 설중매, 붉은 색의 홍매화는 사진도 보고 실물도 봤지만 황매화는 처음 들어본다. 꽃밭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황매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멋진 나무가 보인다. 황매화 덕분에 산뜻해진 마음으로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전시기획자의 이야기가 기다린다.
“이번 전시는 1930~1940년대 경성이라는 시공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헌신하며 이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 내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의 에꼴 드 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부조리한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 인식을 공유하며, 함께 ‘지식의 전위’를 부르짖은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어떠한 사회적 모순과 몰이해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믿고 이를 함께 추구했던 예술가들 사이의 각별한 연대감을 통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갈 추동력을 얻었다. 한국 근대 문학인과 미술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소중한 자산들을 발굴하고 소개한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록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 찼던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풍요로웠던 예술가들의 멋진 신세계를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기획자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천천히 그림을 보고 글을 만나며 구석구석을 누빈다. 예약제로 관람객 숫자를 제한하기에 붐비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다니면서 마음대로 볼 수 있어 전시회장 분위기는 아주 그만이다. 그러다가 평소에 각별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던 반가운 이름을 만날 때는 휴대폰을 꺼내어 그림이나 글을 찍기도 한다. 나라를 잃어버려 허무하고 암울했던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럼에도 불굴의 용기를 갖고 그 시대와 치열하게 싸우며 영혼을 불살랐던 지식인의 모습에 머리를 숙인다. 전시실 이곳저곳에서 만났던 몇 몇 작품 앞에서 잠시 동안 서성거리며 흩어진 감정을 추슬러 본다. 김환기 ‘무제’와 ‘자화상’을 보면서 시인 김광섭과의 교유 관계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화가인 ‘황소’의 주인공 이중섭과 시인 구상 그리고 김광섭 시인과의 얽히고설킨 가슴 먹먹한 이야기, 시인 백석 글에 정현웅이 그림을 그린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앞에서는 한 동안 발걸음 옮기지 못하였고,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진 천경자의 작품 앞에서는 이런저런 감회가 교차하는 진한 씁쓸함에 빠졌지만, 정현웅이 장정한(裝幀: 표지나 속표지, 도안 따위와 같은 겉모양을 꾸밈) 춘원 이광수 소설 ‘무정’원본과 김소월의 진달래꽃 원본 시집 모습을 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자 기쁨이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차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와 옆에 있는 잃어버린 나라 대한제국 황실 궁전인 석조전을 바라보니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다. 100여 년 전 어이없게 나라를 빼앗긴 고종황제와 집권층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이치와 사람 사는 길은 크게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힘없는 민초들은 가녀린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여념이 없다. 권세가들은 누구를 위해서 그토록 짜잔하게 아귀다툼만하고 있을까.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영혼을 불사른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1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