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성찬식을 하고도 배가 고픈가>
교회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 성찬식의 순간일 것이다. 반짝이는 은색 쟁반 위에서 들려오는 작고 미세한 소리, 그 뒤를 잇는 무거운 침묵.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 회복되기를, 혹은 메마른 영혼에 작은 파동이라도 생기기를 기대하며 빵 조각을 입에 넣는다. 하지만 성찬 예식이 반복될수록 그 기대는 익숙한 습관으로 무뎌지고, 우리는 가끔 이 의식의 끝에서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마주하곤 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어떤 신성한 예식의 절차를 제정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제자들과 나누었던 그날의 '최후의 만찬'은 어떤 은혜로운 퍼포먼스나 종교적 유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곧 닥쳐올 죽음과 배신, 그리고 거대한 상실 앞에서 나누었던 절박하고도 인간적인 '마지막 밥상'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뜨거웠던 현장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어 이 장면을 다시 재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성찬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그날의 '떨림'과 '연대'보다는, 얼마나 경건하게 빵을 나누고, 누가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정해진 순서를 어기지 않는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자신의 삶을 빵처럼 떼어주며 보여주려 했던 것은 '형식의 신성함'이 아니라,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서로에 대한 예의와 사랑'이었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어떤 대상을 소중히 보존하려 할수록 그 본래의 아우라가 희미해진다고 말했다. 우리가 성찬을 더 장엄하고 완벽한 예식으로 만들려 애쓸수록, 역설적이게도 그 식탁이 가졌던 본연의 생명력은 점점 사라져 간다.
지금 우리 앞의 성찬이 가끔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빵 조각에 담긴 의미가 '내 곁의 이웃'에게로 흐르지 못하고 매끄러운 종교적 절차 안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물론 성찬을 통해 영적인 위로를 얻고 신앙이 깊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지만 그 위로가 나 자신의 내면을 달래는 것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예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함께 먹고 마심'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진짜 성찬의 능력은 입안에서 녹는 빵이 예수의 살과 희생이라는 의미부여가 아니라, 그 빵을 나누어 먹은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는가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경건한 성찬식이 아니라, 잠시 그 예식을 멈추고서라도 '누구와 함께 밥을 먹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투명하고도 분명한 명령이야말로 모든 성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예식의 공간을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억눌린 자의 친구가 되어주고, 소외된 이의 밥상에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예수가 바랐던 진짜 성찬의 완성이다. 형식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닫는 성찬보다는, 차라리 형식을 허물고서라도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거친 식탁이 훨씬 더 예수의 그날과 닮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성찬의 빵을 입에 넣으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빵 조각은 지금 내 안에서 사적인 위안으로 소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곁의 누군가를 향한 뜨거운 연대로 흐르고 있는가.
신앙의 깊이는 예식의 엄숙함이 아니라, 그 예식이 끝난 뒤 마주하는 세상에서 얼마나 인간다운 태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찬의 진열대를 장식하는 화려한 기구들보다 더 거룩한 것은, 고단한 하루를 버텨낸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다. 지금은 자본의 논리가 사람을 지우고, 무한 경쟁이 연대를 비웃는 시대다. 그 한복판에서 우리가 '예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길은, 성찬의 식탁에서 배운 그 사랑과 섬김을 우리 일상의 식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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