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0장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
고전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세상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세상은 단순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것은 진정한 만족을 찾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 시원함을 줄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한 그것을 아무리 따라가 보아도 갈증은 더욱 심해집니다. 사람들이 시원함을 얻는 것은 결국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만 갈증이 해소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4)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며 그 시험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성도는 아무리 힘든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위한 삶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을 통하여 생수를 공급받으며 사는 성도들은 더 이상 자기 중심의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신 것을 알기에 이제 이웃을 위해 자기를 줍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지 아니면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구약의 광야 백성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것을 주시려는지를 잘 알지 못해서 광야에서 오랜 세월을 방황했습니다. 오늘 날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면 방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은 방황대신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날마다 생수를 마시며 천국을 누리고 시험이 올 때도 넉넉히 이겨내고 승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잘 알아서 하나님을 가장 존귀하게 높이는 삶을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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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리.
1.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사도는, 자신이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사도는 한 부정적인 사례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사례를 듭니다. 그들은 홍해를 지나면서 세례를 받았고(사도는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에 비유한다), 신령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으며,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함께 먹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구원을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2. 하지만 놀랍게도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신령한 것을 먹었다는 것 보다 이들이 멸망당했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 그리고 주를 믿지 않고 시험했고 원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7~10). 이들은 고린도 교회와 모든 후대의 교회를 위한 거울이 됩니다(6,11). 이 과거의 교훈을 토대로 사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 즉 스스로 신앙이 괜찮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고 있습니다(12). 이미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하지만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시는 미쁘신(신실하신) 분이지,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13). 신자가 어떻게 자유를 사용하고, 자기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려고 한다면 모든 상황에서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감당할 은혜를 주실 것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피할 길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시험을 직면하여 믿음으로 감당하려는 자들에게 견딜 수 있는 힘과 이길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4. 14절에서 사도는 다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문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와,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고기를 바치는 연회에 참석해도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첫 질문에 대해, 사도는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먹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8:9~13). 이것이 사도가 자신의 경우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한 사례를 든 이유입니다.
5. 사도는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사가 드려지는 연회나 의식에 참석해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대답은 ‘안 된다’입니다. 사도의 이 대답은 고린도 교회에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우상 숭배 축제가 보편적인 문화 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런 우상 축제(제사) 따위에 참여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불평과 원망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한 신앙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상의 제사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6.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14) 말한 사도는, 지금 자신이 스스로 분별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하면서(15), 성찬(주의 만찬)을 예로 들어 논증합니다(16~17). 논증의 핵심은 ‘참여는 친교로 이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합니다(16절에 두 번, 18절과 20절). 기독교 친교(코이노니아)의 핵심은 주의 만찬에 있습니다. 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피를 상징하고, 떡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형벌 받아 찢기신 살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상징만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적인 임재를 말합니다. 성찬은 단순히 기계적인 간접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나눔과 교제를 가지는 것이 주의 만찬의 깊은 의미입니다.
7. 우상이 참 신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 속에서 영적 실재, 마귀의 실재가 작용하고, 결국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므로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 그것은 마귀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마음을 여는 행위입니다.
8. 사도가 우상 축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참여하는 그 축제의 우상과 참여하는 자들이 동일시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들어주고, 그리스도와 동일시(연합)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상 축제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상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우상 축제에 참여함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다 마실 수는 없습니다(21). 주보다 강한 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도는 강하게 권합니다(22).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를 그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에 참여해도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본문은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9. 이제 사도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의 문제를 정리합니다(23절 이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습니다(23). 먼저 일반적 원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24).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자기의 권리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성도의 삶, 특히 교회의 삶에서 이 원리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10. 사도는 이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구체적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개인적으로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시장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를 일일이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25). 둘째, 불신자의 초청을 받고 가서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27). 그러나 만일 누군가 이것이 바쳐진 제물이라고 말을 해서 알게 되면, 그것을 말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아야 합니다(28). 이것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말하는데, 왜 우리가 남의 양심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29~30), 사도의 대답은 31절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자는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존귀를 얻도록 하기 위해 나는 수고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범사에 이 원리를 신자들은 적용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도 거치는 자,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32). 범사에 모든 사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하고 자기 기쁨과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33). 이 말은 언제나 사도의 다른 말과 함께 읽혀져야 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범사에 참고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분별과 제한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일뿐입니다.
12. 사도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생활 원리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주장, 자기 권리를 말하고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와 자기 유익만 구하다가, 교회와 성도 앞에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여 교회의 방해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여 내 행동과 표정과 결정과 선택이, 누군가에게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려 섬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