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방학특강5 2015.7.14.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7월 14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5.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法念處]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身念處],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受念處],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心念處],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法念處]입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념처의 네 번째 수행으로 위빠사나 수행에서 얻는 지혜는 법념처에 속합니다. 이상 사념처 수행의 네 가지는 팔정도의 정념(正念)의 대상입니다. 팔정도의 정념(正念)은 사념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팔정도와 중도와 위빠사나 수행은 같은 항목으로 분류합니다.
법은 여섯 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붓다에 의해 잘 설해져 있습니다. 둘째,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시간을 지체하지 않습니다. 넷째, 와서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열반으로 이끌어줍니다. 여섯째, 현명한 사람에 의해 직접 체험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이 가지고 있는 진실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법(法)을 빨리어로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빨리어에서 담마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는데 법, 진리, 이론, 정리(正理), 상태, 성질, 사물, 도(道) 등이 있습니다. 법(法)은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라고 할 때는 관념적 진리[俗諦]와 궁극적 진리[眞諦]가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법이 있고, 진리로서의 법이 있습니다.
마음의 대상으로서의 법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할 때는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알아차릴 대상을 마음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념처 수행의 네 가지 대상입니다.
진리로서의 법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처음에 사념처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차츰 존재하는 것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 세 가지가 진리의 법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의 법이 나중에는 진리의 법으로 바뀝니다.
법을 관념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로 나눌 때 관념적 진리는 세속의 관점에서 본 진리입니다. 그리고 궁극적 진리는 출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입니다. 이것을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이지만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속제(俗諦)라고도 하고 또 세속적 진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개념은 출세간의 궁극적 진리만 말하지 않고 세간의 관념적 진리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실제로 있는 것이고 이것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면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간의 어리석음도 알아차릴 대상이며 세속의 법입니다. 똑같이 출세간의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출세간의 법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자가 가져야 할 바른 인식입니다.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 이런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이 법의 기본정신입니다. 이처럼 어떤 것에 대해서나 선입관을 갖지 않고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관념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크다고 했을 때도 크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크다는 기준은 온전하게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무엇에 비해 크다는 것인가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일 뿐입니다. 작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에 비해 작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크다는 것이나 작다는 것은 관념일 뿐이고 다만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처럼 대상을 자신의 선입관으로 보지 않은 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볼 때만이 비로소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성품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그렇지 않고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결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회통념과 진실은 항상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거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요약하면 수행자에게 법이라고 할 때는 먼저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념처로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려 지혜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됩니다. 이때 진리로서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신념처(身念處) 수행에서는 기본적으로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수념처(受念處) 수행에서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심념처(心念處) 수행에서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법념처 수행에서는 신념처와 수념처와 심념처를 모두 포함합니다. 법념처는 이상 세 가지 수행을 모두 포함할 뿐 아니라 세 가지 수행을 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장애와 지혜를 모두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완성은 법념처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느낌이 포함됨으로써 수행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 가지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법념처가 포함되어 완벽한 수행체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념처 수행이 이루어질 때만이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통찰하여 해탈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해서 법이 모든 사람들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만 법이 될 뿐입니다. 법이 있어도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법이 아닙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의 법의 차이입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가진다는 것이 수행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상이 갖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만약 알아차릴 대상이 없다면 수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 없는 수행은 없습니다. 또 수행을 할 때는 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수행자가 과연 무엇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말할 때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관념에 머무는 수가 많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실재를 알아차리도록 합니다. 법념처는 무엇이라는 대상과 함께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관념의 입장에서는 실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체적 실천방법을 제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알면 말할 수 있지만 모르기 때문에 그냥 관념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대상은 불선심이나 불선행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심이나 선행만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할 때는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것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법념처가 제시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선악이 없고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대상으로 삼아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 대상들 중에서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실재를 알아차리는 수행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수행의 대상이어야 비로소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것이어야 그것들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은 이렇게 알아차릴 대상에 대해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에 빠져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싫은 것에 빠져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념을 대상으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차별을 두지 않고 수행해야 통찰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강력한 집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통찰지혜를 얻기 위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 하는 수행입니다. 이것이 중도적 관점에서 시작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 무엇인지를 알아 근본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지혜가 납니다. 수행자들이 처음부터 이런 시각을 가지고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윤회하는 생명은 불선업의 과보를 받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 세계를 벗어난 정신세계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념처 수행의 가르침을 통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내면을 통찰해야 합니다.
법의 정의를 확대해석해서 무조건 법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특히 우주법계에 법이 아닌 것이 없다는 표현은 위빠사나 수행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서 대상의 법이 아닙니다. 이런 견해는 초월적 존재의 힘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세간에 있는 것이건 출세간에 있는 것이건 알아차릴 대상이 되어야 법입니다. 그렇지 않고 알아차릴 대상이 아니면 법이 아닙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그것 자체가 불선심입니다. 그러나 불선심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면 세속의 법이 됩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정의입니다.
일부 서양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법에 대한 표기 약속이 있습니다. 법을 표기할 때 소문자와 대문자로 다르게 표기합니다. 대상의 법이라고 할 때는 첫 글자를 소문자로 써서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법이라고 할 때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대상은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알아차립니다.
둘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알아차립니다.
셋째,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十二處]를 알아차립니다.
넷째,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알아차립니다.
다섯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星諦]를 알아차립니다.
이상의 법념처 수행의 지혜로 위빠사나 수행의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1)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알아차림
(1)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개요
다섯 가지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오개(五蓋)라고 합니다. 오개는 청정을 덮어버리는 다섯 가지의 덮개라는 뜻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가 마음의 청정을 더럽힙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장애는 법(法)입니다.
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고 오직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장애를 완전하게 극복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장애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장애의 힘은 크기 때문에 없애려고 해도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장애는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축적된 성향이라서 쉽게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서 장애가 스스로 소멸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알아차리는 힘이 바로 지혜입니다.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망입니다. 장애를 없애려 하는 것은 성냄입니다. 욕망과 성냄을 계속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장애가 없기를 바라거나 장애를 없애려 해도 장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오히려 장애가 더 커집니다. 장애는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을 때 소멸합니다. 수행은 장애를 없애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장애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고서는 장애의 성품을 알기 어렵습니다.
장애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장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 장애를 받아들이는 관용이 생깁니다. 이런 관용이 대상에 대한 자애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 지혜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 초기에 마주치는 장애는 매우 중요한 갈림에 서게 합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이 장애의 벽을 넘지 못해 수행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선업의 공덕이 있는 끈기 있는 수행자는 이 벽을 뛰어넘어 지혜를 얻습니다.
장애는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생긴 과보입니다. 장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과거에 만들어 놓은 원인을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혜가 계발됩니다. 괴로움 속에서 지혜가 성숙되듯이 장애 속에서 수행이 발전합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장애가 스승입니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듯이 장애는 현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대상입니다.
장애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입니다. 장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장애 속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장애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애는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보지 않고 싫어하거나 없애려고 하면 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집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연상하기 쉬운데 법념처의 첫 번째 대상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장애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선하지 못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과보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며 잠재적 성향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다섯 가지 장애가 발목을 잡아 수행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마음이 집중하기 어려워 지혜를 얻을 수 없고 수행의 발전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누구나 똑같이 제일 먼저 장애와 맞닥뜨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 어려운 것은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라서 어렵기도 하지만, 또 처음부터 다섯 가지 장애와 만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장애가 우리의 마음을 덮어버리면 습관과 어리석음의 지배를 받기 마련입니다.
수행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은 수행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수행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나타나는 장애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가짐과 습관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장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모습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적 향상을 가로막는 장애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수 있으며, 상대적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장애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려고 하면 나타나는 장애는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를 꼽습니다. 소소한 장애는 이 다섯 가지 장애 속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누구나 이러한 장애 속에서 살아왔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장애 속에서 성숙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는 이러한 불선심과 불선행의 정보를 바탕으로 두고 형성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고정관념의 가치관으로 사물을 평가한다면 왜곡될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은 금물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견해로 인한 피해는 온전하게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혼자서는 장애를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은 자신의 선입관으로 보지 말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법은 알아차릴 대상이고, 그 대상은 실재하는 것으로 어떤 것이나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고정관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르게 법념처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고요함을 목표로 하지 않고 지혜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장애에 대응하는 자세가 취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가르침이 없으면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수행의 시작은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선하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를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행위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갖가지 장애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 아름다운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과거의 정신적 습관으로부터의 탈출이기 때문에 수행을 시작하면 즉시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청정이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어떤 번뇌도 스며들지 못하도록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섯 가지 장애가 이것을 막아서 청정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자를 세속의 번뇌에 붙들어 매는 족쇄와 같은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궁극의 목표고, 수행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에 얼마나 접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특히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어떤 장애가 자신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는지 알아서 그것에 알맞은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명상 주제라고 합니다. 명상 주제가 분명해지면 이것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려서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이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장애는 이렇게 단계적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저 스스로를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나타나면 나타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없애려고 하면 없애려고 하는 만큼 장애가 더 커집니다. 감각적 욕망은 감각적 욕망을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악의는 악의를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나태와 혼침은 나태와 혼침을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들뜸과 후회는 들뜸과 후회를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회의적 의심은 회의적 의심을 자양분으로 삼아 더 커집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일어난 순간에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만이 바른 수행 방법입니다.
누구도 다섯 가지 장애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향상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선정의 단계에 이를 수 없으며, 위빠사나 수행의 청정과 지혜가 나지 못해 결코 도과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정만이 아니고 선정에 들기 이전의 수준인 정신적 고양을 얻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장애는 선하게 살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건너야 할 고통의 바다입니다. 이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팔정도입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장애를 잠재운 뒤에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로 이 장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사실 사마타 수행은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생겼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강력하게 대상과 하나가 되어 근본집중을 하는 수행인데 바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으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행의 수순입니다. 하지만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장애에 대처하는 힘이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적절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장애는 좌선을 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좌선을 할 때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나 고요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들이 두드러지지만 수행은 좌선을 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자의 모든 생활 속에서 드러납니다. 눈을 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장애가 시작되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장애가 계속됩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꿈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이런 장애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장애는 특별한 시간에만 오는 것이 아니고 원래 우리에게 내재해 있는 요소입니다. 수행을 해서 장애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내재해 있는 장애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대로 살면 장애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제 수행자는 살아온 습관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습관의 물살에 떠밀려 가면 윤회를 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통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수행자는 장애를 헤쳐 나가려는 의지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수행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장애의 늪지대이고, 뚫고 나가는 힘은 오직 알아차림 하나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을 때 스스로 빚에서 헤어난 사람, 병이 쾌유한 사람, 감옥의 굴레에서 풀려난 사람, 자유인, 안전한 곳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장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장애를 극복하고 고요함을 얻어 통찰지혜를 계발할 수 있습니다.
(2)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림
대념처경에 있는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법(法, dhamma)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의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고 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악의가 있을 때 내게 악의가 있다고 안다. 악의가 없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악의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악의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나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게 나태와 혼침이 있다고 안다. 나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게 나태와 혼침이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안다.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회의적 의심이 있을 때 내게 회의적 의심이 있다고 안다. 회의적 의심이 없을 때 내게 회의적 의심이 없다고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 법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는 법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는 단지 법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법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비구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① 감각적 욕망
다섯 가지 장애의 첫 번째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이 감각적 욕망이 탐욕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감각적 욕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이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접촉[觸], 생각[法]이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다양한 형태의 욕망이 일어납니다. 산다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서 이것을 벗어난 다른 감각적 욕망은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있다고 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는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감각적 욕망이 없기를 바라거나 없애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단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비단 감각적 욕망뿐이 아닙니다. 다른 장애가 일어났을 때 일어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모두 법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 욕망이 있는 것을 안다. 없을 때는 없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이것 때문에 다른 것을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말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정신적 장애의 첫 번째 현상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갈애, 애착, 갈망, 동경, 탐욕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으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 이미 있는 것은 소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훌륭한 정공법입니다. 애써 다른 방법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대상을 제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감각적 욕망은 그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는 것에 개입해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 내게 감각적 욕망이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감각적 욕망이 있는 것만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도 똑같이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둘째는 감각적 욕망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사라진 뒤에 다시 일어나지 않고,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첫째는 감각적 욕망이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둘째는 감각적 욕망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사라진 뒤에 다시 일어나지 않고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새로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만큼 감각적 욕망이 다시 들어올 위험이 없어집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없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처방법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대상이 나타나면 대상에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과연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최상의 이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있는 대상은 사라집니다. 그러니 애써서 이것을 없앨 다른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없애려고 하는 새로운 욕망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의 이익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원래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거나, 아니면 욕망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원래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 감각적 욕망이 완전하게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건이 성숙되면 일어날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없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라고 했을 때 수행자는 없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명하지 않은 생각과 현명한 생각입니다. 현명하지 않은 생각은 해로운 생각이고, 현명한 생각은 이로운 생각입니다. 현명하지 못한 생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불만족을 만족으로 알고, 자아가 없는데 자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해서 해로운 것을 일으킨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현명한 생각을 해서 이로운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현명한 생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불만족을 불만족으로 알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없다고 알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지 못하다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현명한 생각을 해서 이로운 것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한 잠재적 성향의 감각적 욕망도 나타나지 못합니다. 만약 나타났다면 다시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리기만 하면 감각적 욕망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지혜가 나서 차츰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며 괴로움뿐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을 부정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감각적 욕망의 더러움에 대한 개념이 생겨 선정을 얻게 되고 번뇌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범부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으로 삽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감각적 욕망의 괴로움을 압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려서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처음부터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 윤회가 끝납니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이 욕망을 제어하는 재미는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감각적 욕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온전히 누구의 힘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이 선택해서 스스로 얻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일어나는 느낌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인데, 이 중 보는 것과 함께 먹는 것에서도 감각적 욕망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먹을 때 알아차리고 먹어야 합니다. 먹을 때 알아차리고 먹으면 탐욕으로 먹지 않고 계율로 먹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즐기거나 자만하거나 몸을 윤택하게 만들거나 몸을 가꾸기 위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이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 여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 부정관을 배울 것, 둘, 부정관을 전념할 것, 셋,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알아차려서 잘 간수할 것, 넷, 식사를 절제할 것, 다섯,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여섯, 감각적 욕망을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통 속에 빨강, 노랑, 파랑, 적황색의 물감이 섞인 물이 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곳을 들여다본다 해도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욕망에 짓눌려 있을 때는 이미 일어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거나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얻어다가 탕진해버렸다고 하자. 이제 그는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고 거친 말로 다그치며 괴롭히고 때린다고 해도 대들지도 못하고 모두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곧 그 빚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향한 감각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욕망의 대상에 대해 애착이 가득한 나머지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상대로부터 호된 소리를 듣고, 괴로움을 당하고, 매를 맞는다고 해도 이를 모두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감각적 욕망은 마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빚을 내어 장사를 해서 번창하게 되었다. 그는 이 빚이 고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이자와 함께 빚을 갚고, 빚 문서도 찢어버렸다. 그 뒤로부터 대금업자에게 심부름꾼을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는 일도 없다. 이제 그들을 만난다고 해도 인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는 더 이상 그들에게 매이거나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이 장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감각적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을 닦아 감각적 욕망의 장애를 제거한다. 그러면 마치 빚을 청산한 사람이 예전의 채권자를 만나도 더 이상 두렵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린 사람 또한 욕망의 대상에 더 이상 집착하거나 구속당하지도 않는다. 설령 천상의 미녀를 보고도 열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을 빚을 청산한 것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② 악의
다섯 가지 장애의 두 번째는 악의(惡意)입니다. 악의는 악한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선하지 못한 생각을 악의라고 합니다. 악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성냄, 분노, 미움, 두려움, 무서움, 걱정, 긴장, 후회, 인색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가 있을 때는 악의가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져 불선행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악의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에서 오는 해로운 것들입니다.
누구나 선심과 불선심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과보심에 의해 조정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악한 마음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악의가 있을 때 내게 악의가 있다고 안다. 악의가 없을 때 내게 악의가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악의가 일어날 때는 악의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악의를 가진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악한 의도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악한 의도가 사라진 것을 아는 것이 악의가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의는 항상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습관적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악의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악의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했을 때 수행자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악의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라진 악의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악한 의도를 알아차리면 악한 의도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의를 가진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 일어나서 그 순간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의를 가진 마음이 사라지고, 악의가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악의를 분리해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의가 사라지는 것은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에 의해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악의가 사라집니다. 악한 의도가 있을 때는 자애가 없으며, 자애가 있을 때는 악한 의도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의를 알아차려서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이 순간의 마음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알면 이 결과로 자신을 학대하거나 더 나쁜 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의가 일어났을 때는 ‘악의가 일어났네’라고 알아차리고, 악의가 일어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악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 여섯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애관을 배울 것, 자애관에 전념할 것,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행위의 주인이며, 상속자임을 알아차릴 것, 이것에 관해 자주 반성할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악의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입니다.
악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불 땐 솥에 물이 펄펄 끓고 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 속을 들여다보더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의 마음이 악의에 차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악의에서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쓸개에 이상이 생겨서 앓고 있다면, 설령 꿀이나 설탕을 입에 넣어도 이 담즙 병 때문에 토해내며 쓰다고 불평을 하며, 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를 잘 내는 기질을 가진 사람은 스승이 좋은 뜻으로 가볍게 타일러도 귀찮게 여기며 불평을 하며, 그분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승가에서 나가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것이다. 마치 담즙 병을 앓는 사람이 꿀이나 설탕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화를 내는 병에 걸린 사람은 부처님이 베푸시는 선정의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악의는 병을 앓는 것과 같다. 마치 담즙 병에 시달리다가 약을 써서 낫게 된 사람이 꿀과 설탕 맛을 되찾듯이, 수행자는 악의가 많은 해악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떨쳐버리는 방법을 닦아 악의라는 장애를 제거한다. 병이 나은 사람이 제대로 꿀과 설탕 맛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수행자 또한 경외심으로 계율을 받아 계율의 진가를 인식하여 이를 준수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악의를 버리는 것을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③ 나태와 혼침
다섯 가지 장애의 세 번째는 나태와 혼침입니다. 나태와 혼침은 게으름과 졸림입니다. 수행을 하면 나른함, 권태로움, 무기력함, 선하품, 식곤증, 까라짐 등이 일어납니다. 수행자에게 게으름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게으름으로 의욕이 없어지면 대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졸음에 빠집니다. 그래서 노력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수행은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노력이 알아차림을 이끌고 알아차림의 지속이 집중을 가져오게 합니다.
“나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게 나태와 혼침이 있다고 안다. 나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게 나태와 혼침이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나태와 혼침이 일어날 때는 이것이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졸음이 올 때는 희미해지는 마음과 무거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지 않고 졸음과 싸우면 더 빨리 졸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졸음에 빠지지도 말고 졸음과 싸우지도 말고 단지 졸릴 때 나타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태와 혼침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이것들이 사라졌을 때는 나태와 혼침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른함과 졸음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이것을 극복했다는 기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혼침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좋아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갑자기 졸음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언제 졸았는지도 모르게 잠에 떨어집니다. 수행자들이 좌선을 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무기력해지고 졸음이 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법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수면욕은 본능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아차리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잠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상황이 종료됩니다. 그러므로 졸음도 와서 보라고 찾아온 손님이므로 졸음이 오는 것을 희미하나마 그대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전에 없던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했을 때 전에 없던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나태함과 졸음에 떨어지는 것은 권태로움과 무기력함과 졸음에 대한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스스로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생각은 스스로 노력을 하게 하여 나태함과 졸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마음의 노력과 몸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졸릴 때 희미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의 노력이며,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 몸의 노력입니다. 이때는 몸의 미세한 변화를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태함과 졸음이 오는 이유는 많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매번 같은 호흡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호흡인데 같은 호흡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싫증이 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호흡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호흡의 강약과 장단과 바람의 압력 등이 매순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집중이 되면 노력과 알아차림이 약해져서 졸음에 떨어질 수 있으므로 집중이 되는 만큼 노력과 알아차림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대상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매번 새롭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한 동작이 거듭된다고 볼 때는 마음이 싫증을 내서 달아나 버리거나 혼침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나태와 혼침을 극복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식이 혼침의 원인이므로 음식을 적절하게 섭취할 것, 수행 중에 자세를 바꿀 것, 빛을 볼 것, 즉 너무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갈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악의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나태와 혼침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 등을 할 것입니다.
나태와 혼침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통 속에 물이 있어 이끼와 풀로 덮여 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나태와 혼침에 사로잡혀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나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축제가 있는 날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축제를 하는 행사의 시작도 중간도 끝도 볼 수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이 다음 날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사람들이 ‘어제 축제는 참 즐거웠지’ 하며 노래며 춤에 관해 이야기해도 대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는 축제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아무리 감동적인 설법이 진행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수행자가 나태와 혼침에 빠져 있다면 그는 법문의 시작도 중간도 끝도 모르게 될 것이다. 법문이 끝난 뒤에 ‘그런 법문을 들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법문의 주제도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비유들은 또 얼마나 좋은가’라고 찬탄하는 말을 들어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는 나태와 혼침에 빠져 그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태와 혼침은 감옥에 갇히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지나간 축제기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다음 축제에 참가한 뒤에 ‘예전에는 부주의했던 탓에 감옥에 갇혀 축제를 즐기지 못했지만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이렇게 어떤 해로운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도록 자신의 행위에 신중을 기한다. 그는 이렇게 축제를 즐기고 나서 ‘아! 얼마나 멋진 축제인가’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느 수행자가 나태와 혼침이 큰 해를 끼치는 것임을 알고 그것에 대적할 여섯 가지 사항을 닦아서 나태와 혼침이라는 장애를 제거한다.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이 7일 동안의 축제기간을 즐기는 것처럼 이렇게 나태와 혼침을 떨쳐버린 수행자는 진리의 축제를 시작과 중간과 끝의 극치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는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이런 이유로 세존께서는 나태와 혼침을 떨쳐버리는 것을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태와 혼침은 무기력한 것이고,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어리석음에 속합니다. 게으름에 빠져 있으면 아무것도 발전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노력의 반대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지혜의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나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④ 들뜸과 후회
다섯 가지 장애의 네 번째는 들뜸과 후회입니다. 들뜸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는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을 한 것과 좋은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말합니다. 후회는 과거에 한 일들에 대한 회한입니다.
노력이 지나쳐도 들떠서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의욕이 지나쳐서 탐욕으로 하면 들떠서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서 들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회까지 합니다. 후회를 하는 것은 마음의 동요가 해로운 것인지를 몰라서 하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들뜨지 않으면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있다고 안다.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게 들뜸과 후회가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들뜸과 후회는 모두 불선심으로 인해 생기는 불선행입니다. 그러므로 들떠 있을 때는 들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후회할 때는 후회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이 사라지고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가 되면 들뜸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후회하다가 후회하지 않을 때는 후회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것들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여지를 막는 것입니다.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했을 때 수행자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은 믿음이 없고 탐욕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며 노력이 지나쳐도 일어납니다. 바른 알아차림을 하지 못하고, 지혜가 없기 때문에 들뜸과 후회가 일어나므로 사물을 통찰하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들뜸은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소멸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단계에서는 아직도 들뜸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과의 단계가 높을수록 들뜸이 약해집니다. 후회는 아나함이 되면 소멸하지만 들뜸은 아라한이 될 때 소멸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극복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붓다의 가르침을 배울 것, 둘째, 교리에 대해 탐구하여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은 것을 알 것, 셋째, 계율을 지킬 것, 넷째, 연륜과 경험이 있는 분을 가까이할 것, 다섯째,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여섯째, 들뜸과 후회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입니다.
들뜸과 후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통 속에 물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고 출렁거려서 파문이 일어난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들뜸과 후회를 해서 짓눌려 있을 때는 그는 이미 들뜸과 후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은 상기할 수 없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축제에 끼고 싶었던 하인에게 주인이 말했다. ‘이러이러한 곳으로 빨리 가거라. 거기에 급한 일이 있다. 만약 가지 않으면 손발이나 귀, 코를 자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하인은 주인이 시킨 대로 서둘러 가야 되고, 축제의 일부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장을 숙지하지 못하면서 외진 곳에서 지내고자 깊은 숲 속에 들어간 수행자와도 같다. 가령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테면 허용된 고기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에 부딪쳐도 자기가 먹은 고기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화하기 위해서 벽지생활을 중단하고 율장에 밝은 비구에게 찾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외진 곳의 행복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들뜸과 후회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뜸과 후회는 마치 종살이와 같은 것이다.
한 종이 있는데 친구의 도움으로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자유인이 되어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들뜸과 후회로 인해 일어나는 엄청난 장애를 인식할 수 있는 수행자는 거기에 대처할 여섯 가지 사항을 닦아 들뜸과 후회를 떨쳐버린다. 그것을 버리고 난 수행자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제 들뜸과 후회도 이 수행자가 행복한 출리의 길을 걷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들뜸과 후회를 버리는 것이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같다고 밝히신 것이다.”
⑤ 회의적 의심
다섯 가지 장애의 다섯 번째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회의적 의심은 대상에 대하여 의혹을 갖는 것입니다. 회의적 의심을 당혹이라는 뜻으로도 설명하며 또는 이해가 불확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어 곤혹스러운 상태를 회의적 의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심은 결단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지혜의 능력이 없으면 결단력이 부족하여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의심은 혼란한 상태로 인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회의적 의심은 진리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수행 방법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불신을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붓다는 수행을 할 때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탐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을 가지고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회의적 의심이 있을 때 내게 회의적 의심이 있다고 안다. 회의적 의심이 없을 때 내게 회의적 의심이 없다고 안다”고 했을 때 수행자가 회의적 의심을 할 때는 지금 내가 회의적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구나 의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생각으로 풀려 하지 말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는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의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지혜가 나서 자연스럽게 의심이 해소됩니다. 의심이 날 때 답을 모른다고 해서 그 자리에 멈추고 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답은 지혜이기 때문에 알아차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의적 의심이 없을 때는 내게 회의적 의심이 없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결과로 원인과 결과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면 비로소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인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는 지혜가 나면 검은 구름이 벗겨지고 밝은 곳에서 사물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에 이릅니다.
“전에 없던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했을 때 수행자는 전에 없던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심이 일어나는 원인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강화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이 의심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사라져 지혜가 나야 비로소 의심이 해소됩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새로운 의심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결정하는 능력이 없을 때는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을 겨냥한 뒤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차츰 단계적인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회의적 의심이 제거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는 열반을 체험해야 비로소 사물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회의적 의심을 극복하는 여섯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붓다의 가르침을 배울 것, 둘째, 교리에 대해 탐구하여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알 것, 셋째, 계율을 지킬 것, 넷째,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질 것, 다섯째,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여섯째, 회의적 의심을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입니다.
회의적 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 한 통의 흙탕물을 휘저어 어두운 곳에 두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의심에 쌓여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유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가고 있다. 여행자들이 강도들에게 약탈을 당하고 살해를 당하기도 하는 것을 아는 그는 나뭇가지나 새 소리에도 ‘강도가 왔구나!’ 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 것이다. 몇 발자국 걷고는 다시 두려움에 걸음을 멈추는 식으로 여행을 계속하거나 도중에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걷는 일보다 멈추는 일이 더 많은 고생 끝에 겨우 안전한 곳에 도달하거나 아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여덟 가지의 의심 중에 어떤 것에 대해 의심이 생긴 사람의 경우와도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분인지 아닌지 의심을 하기에 그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일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를 이룰 수 없다. ‘거기에 강도들이 있을까, 없을까’ 하고 반신반의를 하는 여행자처럼 의혹에 찬 수행자의 마음속에는 잇달아 동요와 주저가 일어나고 결단력도 부족해지며 근심만 생길 뿐이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성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자기 내면에다 스스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회의적 의심은 마치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 여기 한 건장한 사람이 있어 짐 보따리를 챙겨들고 무장을 잘한 채 무리를 지어서 사막을 간다. 멀리서 강도들이 이런 무리를 본다면 제풀에 달아날 것이다. 그러면 무사히 사막을 건너서 안전한 곳에 이르고 그는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회의적 의심이 큰 해악의 원인임을 알아 거기에 대한 해독제로 여섯 가지 사항을 닦아 의심을 떨쳐버린다. 마치 무장을 하고 동료들과 어울린 건장한 사내가 강도들을 땅바닥의 풀처럼 대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막을 빠져나와 안전한 곳에 다다른 것처럼, ‘악행의 사막’을 건넌 수행자는 마침내 가장 안전한 경지, 불사의 영역,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세존께서는 회의적 의심을 떨쳐버리는 것을 안전한 곳에 도달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회의적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나야 합니다. 그 뒤에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면 모든 사물의 이치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 모든 의문에서 풀려납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릴 때 비로소 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날 수 있습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법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