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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제의 건국과 성장(百濟建國記)
1절. 온조의 한반도 도래(溫祚渡來記)
백제의 기원은 여제(女帝) 소서노(召西努)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소서노는 연타발(延佗渤)의 딸로서 고주몽(高朱蒙)을 맞아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그러나 고주몽이 고구려 왕위를 부여에서 온 유리왕(琉璃王)에게 물려 주려하자 소서노는 스스로 떠나가서 어하라(於瑕羅)를 세웠다고 전한다. 백제의 기원은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는 소서노가 기묘년, 즉 기원전 42년 3월에 진번지간(辰番之間)에 이르러 10년만에 장원을 사고, 오백리의 땅을 차지하니 북으로 대수(帶水; 今 海城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는 바로 어하라 땅에 대한 기록이다. 해성하의 해성에 있는 영성자산성은 여왕이 쌓았다고 전설이 전해진다. 바로 소서노의 북쪽 경계 성인 것이다. 여기서 어하라(於瑕羅)는 대련시 득리사진(得利寺鎭) 예애(倪崖) 부근으로 추정하며 득리사진의 용담산성(龍潭山城)이 그 기원지로 추정한다. 북으로는 태자하에 이른 적도 있고 동쪽으로는 벽류하(碧流河)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해에 고주몽(高朱蒙)이 소서노(召西努)를 어하라(於瑕羅)라고 책봉하였는데, 후대에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로 부른 기록이 중국의 여러 사서 중의 <백제전>에 남아 있다. 어하라(於瑕羅)는 지역 이름을 의미하는 “라”로 끝나고 어라하(於羅瑕)는 존칭의 의미가 있는 “하”로 끝나니 왕의 우리말 호칭이 될 수 있다. 한편 어하라(於瑕羅)는 어하(於河)의 땅(羅)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 어하(於河)(於)(wú, yū, yú,)는 복주하(復州河)의 고대 이름인 낙하(樂河)(樂)(yꐃo, yuè)의 중국발음과 서로 유사하다. 또한 예애(倪崖)도 복모음을 풀은 우리말로는 어이아이, 어아가 된다.
어하라(於瑕羅)의 소서노(召西努)는 13년, 임인년에 붕어하였고 비류(沸流) 태자가 뒤를 이어 어라하(於羅瑕)로 즉위하였는데 이 해는 기원전 19년이 된다. 따라서 어하라가 제후 국가로 인정받은 어하라 1년은, 기원전 31년으로서, 이 해에 소서노는 고주몽을 떠난 기원전 42년으로부터 10여년만에 또하나의 나라를 일으킨 것이었다. 어하라 13년, 기원전 19년에 비류(沸流) 태자가 소서노의 뒤를 이어서 비류왕이 되었으나 온조(溫祚)는 스스로 독립하여 마한(馬韓) 땅으로 옮겨간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기원전 18년이 온조의 즉위년도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서문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같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서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비류는 자기 어하라 왕국에서 온조를 따라올 이유가 없다. 소서노를 계승하여 어하라의 왕이 된 것이다. 즉 미추홀에 비류가 왔다면 그것은 비류가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다. 그런데 온조 13년, 기원전 6년에 온조왕의 북쪽 국경은 이미 패하(浿河;今 遼陽市 太子河)에 이르고 있으며, 온조왕 38년, 기원전 20년에 패하(浿河;今 遼陽市 太子河)까지 순무(巡撫)하고 있다. 즉 비류가 일찍 죽었으며, 그의 후손도 온조에게 귀복한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중에 온조왕의 개국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하 마려(馬黎)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이 풍문을 들으니, 마한이 쇠퇴(衰敗)하였으므로 뜻을 세워 마한에 가서 도읍을 세울 시기입니다.(可往立都之時也)” 온조 왕자가 마한의 미추홀에 상륙하고, 둘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한산(漢山)으로 떠나 부아악에 올라 위지성(慰支城)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마한(馬韓) 땅에는 월지국, 목지국, 달지국 등과 마찬가지로 “지”로 끝나는 성 이름이 많다. 따라서 본래의 위례성은 어하라성이고 온조가 세운 것은 위지성인데 비류의 어하라가 귀복하였으므로 위지성이 위례성으로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비류와 온조가 패대수(浿帶水; 今 遼陽市 太子河와 海城河)를 건너 같이 복주 어하라에 살았다는 것과, 온조가 홀로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국(十濟國)을 세우고 다시 마한까지 병탄하였을 때에, 북쪽 어하라로부터 비류가 아닌, 비류의 후손이 도래하여 미추성(彌鄒忽)에 따라와 살았다는 것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온조왕 서문>의 패대수는 [한서지리지]의 패수와 대수로서 각각 요양시 태자하(太子河)와 해성시 해성하(海城河)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후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패수는 청천강이며, 대신에 태자하는 패하(浿河)로 바꾸어 기록되었다.
2절. 하북 위례성과 평성시 청룡산성(河北慰禮城, 平城 靑龍山城)
[한단고기]<고구려본기>는 온조 왕자가 마한의 미추홀에 상륙하고, 둘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한산(漢山)으로 떠나 부아악에 올라 바라보고, 하남의 위지성(慰支城)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서문 중에 온조왕 정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온조(溫祚)는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보고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여 개국하였다. 온조는 요동반도 어하라로부터 배를 타고 미추홀(彌鄒忽; 평안남도 永柔縣)에 상륙하여서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지를 정하여, 하북 위례성(慰禮城)에도 살고 다시 하남 위지성에도 살았다. 미추홀은 미추성(彌鄒城)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지리지>에 명확한 기록이 없다. 미추홀을 경기도 인천 운운 하는것은 온조의 한수(漢水; 大洞江), 한성(漢城)을 오늘날의 한강(漢江)에서 찾고 거기에 꿰어맞추려 한 김부식의 잘못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미추성은 두 번 나온다. 한번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빼앗은 성으로서 소개되었는데, 야리성(也利城) 앞에 기록되어 있고 두번째는 414년 수묘인을 공출한 성 이름 중에서 야리성(也利城) 앞에 나온다. 따라서 야리성(也利城)과는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뒤에 나온 미추성의 추(鄒)자가 확실한 판독이 어렵다. 그러나, 미(彌)자가 확실하고 추(鄒)의 자리에는 읍(ꞥ)변이 확실하게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도 <광개토왕 비문> 앞 부분에서 이미 나온 바가 있는 데다가, 그것도 기록 순서에서 야리성(也利城)의 앞자리인 것이 일치하기 때문에 미추성이라고 추정하여도 거의 틀림없는 것이다.
이 미추성(彌鄒城)을 비정하는 데에 있어서의 조건은 첫째 해안이 가깝고 둘째 부아악이 바라보여야 한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던 함종현(咸從縣)은 <백제본기>에서 비류의 후손이 광무제의 침략을 피해 즐거이 온조 백제 땅으로 따라온 것을 기리는 지명일 수 있다. 또한 온조가 사냥을 다닌 아산(牙山; 咸從縣의 古名)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함종현의 북쪽인 평원군 영유현(平原郡永柔)에는 미추성(彌鄒城)의 변음으로 추정되는 미두산성(米豆山城)이 남아있다. 미추성(彌鄒城)의 발음이 오늘날같이 현대적으로 분화하기 전에는 미투성이었다가 훗날에 고구려에 의해서 폄하되어 미두성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현재는 태조산(泰祖山)이라고 하는데 바로 한반도에 처음 도래한 백제왕 온조(溫祚)를 곧 백제 태조로서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평원군 평야를 장악하는 영유현 태조산 미두산성을 백제의 미추성(彌鄒城)이라고 비정한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미추성(彌鄒城)은 두번 다 야리성(也利城)과 동반하는데 야리성(也利城)은 아리성의 변형이다. 아리성의 아리는 알이라는 어원을 가지며 이 아리는 어머니를 의미한다. 아리랑(阿利浪)이나 아리수(阿利水)도 어머니의 물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패수(浿水)는 풀어서 발음하여 바이물, 즉 아버지의 물이라는 뜻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정도 기록에서 비류(沸流)와 온조 형제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정도(定都)하였는데 반하여 비류는 미추성(彌鄒城)을 택하였다고 한다. 물론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비류왕자가 소서노의 어하라(於瑕羅)를 계승하자, 온조왕자는 혼자 어하라를 떠나와 바다를 건너 미추성에 도착하였다가 부아악에 오른 뒤에 위례성에 정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아악에서 위례성(慰禮城)과 미추성(彌鄒城)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부아악의 발음을 연상하여 서울의 북악산(北岳山)이라고 말하였다. 북악산에서 인천을 바라보고 광주(廣州)를 바라볼 수 있는가 의문이다. 대신에 필자는 부아악(負兒岳)의 뜻으로 새롭게 추정하는데 부아(負兒)는 아이를 등에 업은 산으로서 어머니 산이라고 이름이 변했다고 추정한다. 즉 부아악은 모산(母山)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라고 불러서 오늘날의 자모산(慈母山)으로 변한 것이다. 미추성이라고 추정한 영유현(永柔縣)의 동북쪽에 우리가 찾는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있다. 온조(溫祚) 때의 부아악이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 야리성(也利城)로 변하고 오늘날에는 자모산성(慈母山城)로 변한 것이다. 자모산성은 우물이 99개이고 성둘레는 5KM의 산성이다. 이중에서 북쪽 성벽 일부, 즉 내성이 백제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야리성(也利城)이 왜 아리성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 중에 어리성도 있고 아리수도 있다. 아리수가 압록강일 때 청천강 남쪽 아리성은 야리성으로 구분하여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즉 당시에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발음하면서도 표기는 달리한 것이다.
다음으로 자모산성(慈母山城) 남쪽에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위치하고 있다. <광개토왕 비문>의 정벌 기록에서는 야리성(也利城) 다음에 대산한성(大山韓城)이 기록되었다. 이 대산한성(大山韓城)이 바로 온조(溫祚)의 첫번째 하북 위례성(慰禮城)이다. 현재 청룡산성(靑龍山城)의 마을 이름도 상차리(上次里)로서 우리말로 윗 차례인 것이 위례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현재는 오리동(오리洞)이라고도 부르니 역시 웃리, 상리의 의미로서 위례성의 변음인 것이다. 온조의 위례성은 백제 시대에 이미 하남 위례성과 대비하여 대산한성(大山韓城)이라고도 불렀으며 오늘날의 평성시 청룡산성(靑龍山城)이 되었다. 하북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한 청룡산(靑龍山 559M) 산성은 성둘레가 약 5KM의 석성이다. 하지만 온조 당시에는 토성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온조는 평안남도 영유현 미추홀에 왔다가 산넘어 평성시 청룡산에 위례성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가 온조 13년에 한수 남쪽의 위례성으로 옮겨갔는데 얼마 후, 다루왕에 이르러 비류의 후손들이 와서 미추성을 쌓고 살았다.
3절. 하남 위례성, 한성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 8년에 낙랑국이 침범하여 청룡산의 위례성을 포위하였으나 온조왕은 농성하여 지켜냈다. 이는 온조가 안전을 도모하여 대동강 한수 남쪽 한성(今 樂浪土城)으로 천도하는 이유가 된다.
여기서 십제 건국지가 대동강 남쪽 십성동의 낙랑토성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의 천도 기록을 본다. “낙랑이 동쪽에 있고 말갈이 북쪽에 있어 편할 날이 없고 국모 소서노마저 돌아가셨으니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겠다.” 앞에서 소서노의 붕어는 어하라(於瑕羅) 13년으로 비류(沸流)태자 1년이고, 온조(溫祚) 1년이지, 온조 13년은 아니다.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13년 한성 천도 전에, 한산(漢山)에 책성(柵城)을 세워서 위례성의 민가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여기서 한산 책성은 평양 동쪽 안학궁 아래 청호동 산성(淸湖洞 山城)으로 추정된다. 청호동 산성 남쪽에는 대동강을 건너는 나무 다리가 발굴되었다. 1981년에 발견된 이 나무 다리는 너비가 9M, 길이는 375M 이다. 고구려 광개토왕 시대 신라인들이 평양에 쌓은 건축물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백제인들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漢山)은 훗날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漢山)으로서 평양 동쪽 대성산성, 안학궁 일대이므로, 평양 북쪽 하북 위례성민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던 것이다. 뒷날 장수왕 때에 개로왕의 한성을 치기 전에 먼저 친 북성, 즉 대성이기도 하다. 아신왕 4년, 394년경에 한수(漢水;大洞江)를 타고 올라가 고구려를 치려다가 회군한 한산성도 이곳이다.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13년 8월에, 마한왕에게 한수(漢水; 大洞江) 남쪽 한성(漢城) 천도를 알리고 경계를 통고하였다. 백제는 북으로 패하(浿河), 즉 요양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熊川)에 이르렀는데, 웅천은 오늘날의 임진강(臨津江)으로 본다. 임진강 상류는 고미천(古味呑川), 또는 웅천(熊灘川)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다. 서쪽 경계는 바다이고 동쪽 경계는 주양(朱壤)이라고 했는데 임진강의 발원인 마식령(馬息嶺)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추마리(秋馬里), 달해산(達海山), 북쪽의 달암산(達巖山), 두류산(頭流山), 동남쪽의 추애산(楸愛山) 등이 백제 주양(走壤)의 흔적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태백산맥의 임진강 발원(發源)이라는 것이다. 마식령의 남쪽 추가령은 적목령(赤木嶺)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북쪽의 청목령과 대비된다. 주양으로 함흥의 주이천(朱伊川)을 고려할 수 있으나 이때는 백제의 동쪽 경계도 바다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당시 웅천은 절대로 충청도 금강(錦江)이 될 수 없는 것이 백제의 금강 진출이 온조왕 31년에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한성이 마한과 동북 백리로 추정된다. 당시 [후한서-한전](韓傳)에서는 마한의 통치자가 진왕이며 월지국이었는데 이는 구월산의 안악으로 추정된다. 그 동북 백리가 십성동 낙랑토성이다.
4절. 백제의 성장 강역(百濟 成長 彊域) 온조왕 원년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그런데 이 두 성이 백제 하북 위례성 동쪽의 함흥 낙랑국과 국경 분쟁을 일으켰다. 병산책(甁山柵)은 평안남도 맹산군 병풍산(屛風山;1166M) 남쪽 철옹산성(鐵甕山城)이다. 토성이며 성둘레는 650척인데 지형이 마치 항아리, 혹은 호리병처럼 생겼다는 곳이다. 마수성(馬首城)은 요덕군 마유봉(馬踰峰; 972M), 모도봉(毛都峰;1883M)과 관련하여 대동강 발원(發源)인 대흥군(大興郡) 신성면 창의리 부근으로 추정한다. 2년후 온조왕 10년에 백제군은 말갈군이 쳐들어오자 곤미천(昆彌川)에서 패배하고, 청목산(靑木山)에 의거하였는데 온조왕이 직접 봉산(烽山)에 가서 구원하였다. <백제본기>에서 청목령에 대한 언급은 위의 기록까지 다섯 번이다. 374년 근초고왕은 청목령 위에 고구려 방어를 위하여 청목성을 쌓았다. 386년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관방(關方)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 靉陽 灌水鎭)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임하였다. 394년 아신왕(阿莘王)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수를 지나 청목령 아래까지 진격하였다가 기상이 나빠서 한수로 회군하여 한산성(평양 대성산성)에 머물렀다. 469년 개로왕은 청목령에 큰 책(柵)을 설치하였다. 즉 청목령은 고구려와의 주요 통로이므로 고구려 집안 평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의 만포천을 따라 청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길목으로 추정된다. 청천강 상류와 대동강 상류는 각각 희천군과 영원군으로서 서로 이웃하였다. 자강도 희천시(熙川市)는 옛이름이 청색(淸塞)으로서 백제 청목성으로 추정되는데, 고읍성은 토성이며 성둘레는 9707척이다. 희천시 남쪽 대추령(大楸嶺)은 개로왕의 방책이 설치된 곳, 즉 대책령(大柵嶺)의 변음으로 추정된다. 온조왕이 구원한 봉산은 희천군의 봉단성(鳳丹城)으로 추정되는데 온조왕도 대동강 한수를 따라 올라가 구원한 것이 된다. 곤미천은 독로강의 지류인 간성군(干城郡) 간북천(干北川)으로 추정된다.
다음해 기원전 8년인 온조왕 11년에 병산책이 말갈군에게 불탔다. 온조왕은 함흥 낙랑과 통로가 되는 곳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을 쌓았다. 후대의 성왕(聖王)이 신라군에게 전사한 구천(狗川)은 구양(狗壤)과 관련하여서 충청북도 회인 부근에 있던 양성(壤城)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때는 온조왕이 서울한강까지도 진출하지 못한 때이므로, 후대에 구천성(仇天城)이 된 은산 고읍성(殷山古城)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11년인 온조왕 8년에 말갈적 3000명이 위례성을 포위해 왔으나 반격하여 대부현(大斧縣)에서 격멸하였다. 당시의 위례성은 하북 위례성으로서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부현은 평양의 봉수대의 하나인 부산(斧山)으로 본다. 부산(斧山)은 순안(順安)과 평양(平壤)의 사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단지 봉수산(烽燧山)이라고 한다. 온조왕은 14년에 한성으로 천도하였다. 십성동의 낙랑토성이다. 그해에 온조는 한강(漢江)의 서북쪽에도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 한강 서북쪽의 성도 대동강 서북의 성이다. 기원전 1년이 되는 온조왕 18년에, 칠중하(七重河; 臨津江)에서 말갈을 격퇴한 백제의 남쪽 경계는 상당히 확장이 되었고, 금마 마한은 황해도 재령강 서쪽으로 축소되어 포위가 되었다. 칠중하는 임진강 파주군 적성(赤城)이다. 서쪽에 중성(重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같은해에 낙랑이 침입하여 백제 위례성, 즉 청룡산성을 불태우는데, 백제는 보복으로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치려다가, 구곡(臼谷)에서 눈에 막혀 돌아왔다. 이 낙랑국 우두산성은 함흥의 동쪽 40리에 있던 우두산(牛頭山)으로 추정되며, 현재 낙원군(樂園郡)의 퇴조고성(退潮古城)을 치러간 것인데 도중에 포기한 것이다. 퇴조고성은 석성이며 4917척이며 당시 낙랑 도읍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낙원군명도 낙랑과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왕 20년에 고목성(高木城)과 석두성(石頭城)을 쌓았는데 뒤에 다루왕 때에 말갈의 침략이 있었고 무령왕 때에도 말갈의 침략이 있었으나 무령왕은 고목성 아래에 두 책성을 보완하고 아울러 장령성(長嶺城)까지 쌓았다. 장령성은 오늘날의 함경남도 금야군(金野郡)으로서 신라, 고구려 모두 장령성, 또는 장령진성이라고 하였다. 성력산성(聖歷山城)으로서 성둘레 2982척의 석성이다. 고목성은 고원군(高原郡) 성내리(城內里)로 추정하는데 고성은 확인할 수 없다. 석두성은 양덕군(陽德郡) 석탕온천 동쪽 상성리(上城里)로 추정하는데 고성은 확인할 수 없다. 서기 12년인 온조왕 26년에 마한(馬韓)을 병탄하였는데 이 마한은 기준의 후예가 자리한 곳으로서 재령의 장수산성이다. 이때, 온조가 마한을 병탄하는 데에 반대하는 마한의 구세력이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우곡성(牛谷城)에서 각기 온조왕에게 저항을 하였다. 당시 마한이 78국의 연합이므로 연합체제를 깨트린 백제에 대하여 각국의 저항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마한 합병은 마한의 한성을 점령하는 것에서 겨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 일년여에 걸쳐 백제는 남진하여 서울 한강을 넘어 충청남도 공주 지방까지 진출하여 영역을 확장하였다.
원산과 금현은 정복당하여 강제로 한산 북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옮겨간 곳은 덕천군(德川郡) 금성(金城), 영원군(寧遠郡) 고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서기 18년에 온조왕이 원산, 금현성을 수리하면서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는데 고사부리성은 전라북도 부안 남쪽 고부(古夫)에 있었다. 고부 동쪽 덕안(德安)의 두승산성이 고사부리성이다. 따라서 온조왕이 수리한 두 성은 백제가 쳐서 옮기기 전의 원산, 금현성으로서 금현성은 충청남도 금산(錦山)으로 추정된다. 원산성은 알 수 없다. 우곡성은 현재의 법동군(法洞郡)으로 추정한다. 신라와 백제, 말갈간의 많은 쟁탈이 있었다. 서기 18년 온조왕은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고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 탕정은 충청남도 온양 바로 옆에 지명이 남아 있으므로 탕정성은 온양성이다. 대두는 우리말로 콩인데 콩산성은 공주시 공산성이다. 공주시에는 공산성과 웅진성이 다로 있다. 곰산성이 공산성이 된 것이 아니라 대두산성이 공산성이 된 것이다. 뒤에 문주왕이 웅진시로 천도하면서 서울 한강 이북의 백성을 대두산성으로 같이 옮긴 기록이 있다. 즉 공주에 수도 고마성(固麻城)을 세우기 위해 평안도에서 피난온 백성들을 먼저 콩산성에 옮겨 웅진시를 건축하는 일군으로 삼은 것이다.
서기 13년, 온조왕 31년에 백제는 남북 2부에 더하여 동서 2부를 설치한 기록이 있는데 4부를 갖춘 것이다. 북부는 압록강 이북으로, 동부는 대동강 동쪽과 강원도로, 서부는 황해도, 경기도로, 남부는 오늘날의 한강 이남으로 추정된다. 당시 전라북도 지리산 이남은 백제 영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에 백제에게 밀려서 새로 이주해 내려간 삼한, 즉 진한, 모한, 변한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 38년, 서기 20년에 온조왕은 50일을 걸려서 패하(浿河)를 돌아보고 돌아왔는데 패하는 바로 당시 고구려와 국경인 태자하이다. 온조 13년 이후, 광무제의 살수 공략 이전까지 백제의 북쪽 국경은 패하가 되었던 것이며 이때 어하라 비류백제와 통합되었다. 서기 22년, 온조왕 40년에 술천성(述川城)과 부현성(斧峴城)이 말갈의 공격을 받았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술천군은 경기도 여주 부근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가 된 여주 동쪽 취병리 성상봉을 고구려 술천군으로 추정한다. 부현성(斧峴城)은 부양(斧壤)이라고 했던 강원도 평강군으로 추정된다. 두 성이 서로 멀다.
서기 25년, 온조왕 43년에 온조왕은 아산(牙山)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는데 아산은 평안남도 서해안 함종현이다. 고지명이 아산(牙山)이었다. 서기 30년, 다루왕(多婁王) 3년에 말갈이 마수산(馬首山; 馬息嶺)을 쳤으나 백제가 물리쳤다. 다음해에는 고목성(古木城; 高原郡)에서 다시 말갈군을 물리쳤다. 5절. 횡악산성과 신평 달보산성(橫岳山城, 新坪 達寶山城)
서기 31년, 다루왕(多婁王)은 횡악(橫岳)에서 사냥하였다. 이 다음해 다루왕 5년 정월에 백제는 대사령(大赦領)을 내렸는데 국가적인 경사가 있었던 것이며 이는 다루왕이 횡악(橫岳)으로 천도한 것을 의미한다. 횡악은 다루왕의 새로운 왕성으로서 그 위치는 황해도 신평군(新坪郡)의 달보산성(達堡山城)으로 추정된다. 다른 이름으로 달운산성(達雲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모두 다루왕성(多婁王城)을 지칭하는 것이다. 달보산성은 성둘레가 15060척이며 석성(石城)이다. 앞에서 본 태백산성보다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 이제까지와 달리 석성이었다. 북쪽에 호위성으로서 다호천보(多乎遷堡)도 있었다. 북쪽에 흘령산(屹嶺山)이 있는데 다루왕이 좌보(左輔)로서 중용한 동부(東部)의 흘우(屹于)와 관련된다. 또한 서쪽에는 대동강의 남쪽가지인 남강(南江)이 발원하는 곳으로서, 횡천(橫川)이 흐르고 있다.
횡악성이 신평군의 달보산성이라고 추정되는 두 번째 이유는 남쪽의 오륜산(五倫山)이 있는데 원래는 오운산(五隕山)이 어원이다. 기루왕 때에 횡악에서 다섯 개의 돌이 떨어졌던 기록이 있다. (橫岳大石五一時隕落) 즉 오운산, 현재의 생왕산(生旺山,852M)이 백제 횡악 지방이었다. 횡악산은 달보산(달보산, 801M)을 지칭한다. 세 번째 이유는 506년 무령왕 때의 기록이다. 무령왕은 개로왕이 잃어버린 국토수복을 하여 506년에는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507년에, 고구려군이 한성(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에 주둔하니 무령왕이 횡악에서 싸워 이겼다. 여기서 평산위례성을 공격하기 위한 고구려군의 선택은 위례성의 서북쪽이 될 수 없고 오로지 태백산맥을 넘어오는 동북쪽 공격로라는 것을 고려할 때에 달보산고성이 횡악으로서의 방향으로 정확하다.
네 번째 이유는 다루왕의 낭자곡성(娘子谷城) 합병 기록이다. 서기 63년, 다루왕 36년에 백제는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국토를 넓혔다. 이는 함흥 낙랑을 백제가 점령한 것이다. 다루왕의 도성인 달보산성이 백제 역대 도성 중에서 가장 동쪽인 바,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백제는 기념으로 신라왕을 불렀으나 신라왕이 오지 않았다. 한편 이후에는 [신라본기]에서 신라에 대한 낙랑의 침입이 없어졌다.
그밖에 <광개토왕비문>에서 광개토왕의 396년 백제 정벌과정에서 백제왕이 국성인 한산성(漢山城, 平壤)에서 도망하여 성횡악성(城橫岳城)이자 편국성(便國城; 임시 수도)에서 항전하다가 고구려와 항복 조약을 맺었다.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일팔성, 구모로성---- 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광개토왕이 진노하여 직접 아리수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악성)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仇天城, [王旣破]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 城橫[岳城][][](百殘)便國城 而殘主因逼獻[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殘]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위 기록 중에서 58성은 백제성이며, 압록강 북쪽 단동시 봉황산성에서부터 대동강까지다. 따라서 396년 당시 광개토왕을 피해 아신왕이 남천한 성횡악성은 백제 횡악한성으로서 임시 백제 수도가 된 것인데 오늘날의 달보산성인 것이다. 서기 37년, 다루왕 10년에 철령시의 낙랑국(樂浪國)이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였다. 이후 낙랑 유민들은 함흥과 신라의 경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서기 44년인 다루왕 17년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의 살수(薩水; 渾河) 남쪽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광무제가 침범한 곳은 후한의 낙랑군을 넘지 못하며 이는 전한의 낙랑군과 비교하여 1)탄열(呑列; 英陵鎭 老城子), 2)불이(不而;昌圖 老城), 3)잠대(蠶臺;開原市 斷山子), 4)화려(華麗;法庫縣 依牛堡子鎭 花牛堡), 5)동이(東暆;復州), 6)야두매(邪頭昧;瓦房店市 倪涯; 穢涯), 7)전막(前莫;庄河市), 8)부조(夫租;普蘭店市 吳古城), 9)잡현(霅縣;吉林市) 등이 없어지고 대신에 낙도(樂都;義縣 大楡樹堡鎭)가 생겨났다. 따라서 요동반도 대부분, 현재의 개주시(蓋州市) 이하, 수암, 환인 등은 백제 땅이었다.
서기 64년 백제는 신라의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2년후 와산성을 다시 빼앗지만 도로 신라에게 내주었다. 다루왕 때에 신라와의 경계로 등장한 와산성(蛙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읍 부근에 와산이 있었다고 전하므로 보은의 노성산(老城山)으로 추정한다. 구양성(狗壤城)은 회덕 북쪽 문의면에 있는 양성산(壤城山)으로 추정한다.
6절. 한산성과 평양안학궁(漢山城, 平壤 安鶴宮)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서기 116년인 백제 기루왕(己婁王) 40년에 도성(都城)의 성문 위에 황새가 집을 지었다(鸛巢于都城門上)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백제 평양 한산성은 안학궁(安鶴宮)이라는 별명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안학궁은 오로지 평양 대성산성 남쪽에 있다.
기루왕 17년, 서기 93년에 백제 횡악에 큰 돌 다섯 개가 굴러 떨어졌는데, 이는 다루왕의 횡악한성으로부터의 천도를 의미하는 조짐이다. 27년에는 한산(漢山; 平壤)에서 왕이 사냥을 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백제 기루왕은 평양 안학궁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도했더니 상서로운 일이 생겨서 봉황새가 성문에 집을 지어 안학궁(安鶴宮)으로 고쳐 부르게 되는 것이다. 안학궁은 성벽의 각변이 622M이며 둘레에는 해자(垓字)를 설치하였고, 성벽의 높이가 12M인 정사각형의 궁성이며 광화문처럼 남쪽 중앙에 세 개의 문을 내었는데 고구려성은 이런 양식이 없다. 또한 궁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현재의 안학궁은 서기 371년 근초고왕 때에 고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이전에 기루왕 때의 한산성은 안학궁 서쪽의 청암동 토성(淸巖洞土城)으로 추정된다. 청암동 토성은 성둘레 5KM의 토성이며 사비성이나 웅진성, 평산 위례성처럼 강변을 끼고 만들어졌다. 근초고왕 때의 수도인 한산성, 즉 안학궁은 방위체계를 잘 갖추었다. 북쪽은 대성산인데 대성산 동북 자락에 토성이 있었는데 <광개토왕 비문>에 소개된 돈발성(敦拔城)으로 추정된다. 대성산성은 고구려가 쌓았다. 서쪽은 청암동 토성(淸巖洞 土城)이 있는데 강을 낀 둘레 5KM의 반월형 성이다. 현재의 안학궁 이전에 기루왕 때 쌓아진 백제 안학궁이었을 수도 있다. 남쪽은 청호동 산성(淸湖洞 山城)이 있다. 청호동 산성 남쪽에는 대동강을 건너는 목교(木橋)가 발굴되었다. 1981년에 발견된 이 나무 다리는 너비가 9M, 길이는 375M이다. 고구려 광개토왕 시대 신라인들이 평양에 쌓은 건축물이거나 그 이전에 백제인들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이 있는데 성둘레는 4KM이다. 고방산 산성은 단군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성인지도 알 수 없다. 즉 평양 한성은 사방에서 산성으로 안학궁을 호위하고 안학궁 자체는 또 강물을 끌어들인 해자(垓字)로서 보호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안학궁과 주위 4산성은 백제의 왕성과 그 호위성이다. 또한 이곳에는 수많은 벽화 무덤이 있는데 대개 백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642년 무렵에 남평양성으로 천도하였는데 오늘날의 평양성은 그 이전인 6세기에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한편 백제는 오방성(五方城)을 중시하였는데 동방에는 성천의 홀골산성, 북방에는 청룡산 위례성, 서방에는 용강의 황룡산성, 남방에는 평산의 한성이 지켜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고구려 남평양이라고 하면서 경기도 양주군에 비정한 바 있는데, 서울은 어떻게 보아도 평양일 수가 없고, 대동강 북쪽에 있었을 백제의 한산성이 평양이었던 것이다. 진흥왕 때에 신라가 쌓은 북한산성이 오늘날의 서울 북쪽 북한산성이다. 그후 신라의 북한산성을 신라가 한성주(漢城州)라고 고쳐 부른 시기에, 고구려 유민 안승 등은 자립을 도모하여 당시의 또다른 한성(漢城)에서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왕이 되었는데, 이 후고구려의 한성은 금마저의 황해도 재령 장수산성(長壽山城)에 있었던 것이다.
한산성이 고구려 한성인 것은 다음 기록들에 의해 지지된다. 첫째 오늘날의 대동강 북쪽 평양성 위치에다가 고구려인이 새로 성을 세우면서 평양 성벽에 각자(刻字)를 새겼는데 그 각자 속에는 평양성이라는 말이 없고 대신에 한성(漢城)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고구려도 평양에 성을 세울 때에는 평양성이 아닌 한성(漢城)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둘째 <광개토왕 비문>중에서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왕릉 수묘인(守墓人) 공출 기록에서, 백잔남거한성(百殘南居韓城)이 청룡산성인 대산한성(大山韓城)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이 수묘인들은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복속을 당한 백제 땅에서 공출하였다.
백제는 광개토왕의 침공으로 인하여 인질을 바치고 고구려에 항복하였지만 대동강 동남쪽의 영토는 보전하였다. 앞에서 대산한성(大山韓城)은 오늘날의 평원군 청룡산성(靑龍山城)이었는데 온조(溫祚)의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이었다. 반면에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광개토왕 무덤 축성 무렵인 412년 당시의 상황 기록으로서 대산 한성보다 남쪽의 백제 왕성이면서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빼앗긴 성인데, 이는 평양 한산성 안학궁이 된다. 셋째는 위에 이미 소개한 백제 성왕 때의 [일본서기]에서 평양성을 백제고지(百濟故地)로 기록한 것이다.
7절. 북한산성과 개천 고사산산성(北漢山城, 价川 古射山山城)
서기 131년 개루왕(蓋婁王) 때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는데 뒷날 비유왕 때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北漢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산성보다 북쪽의 북한산성은 개천군(价川郡)의 고사산산성(姑射山山城)으로 추정한다. 개천군에는 장환성(長桓城)과 조양진성(朝陽鎭城) 등 두 성이 고사산산성의 북쪽에 있었는데 두 성은 청천강을 끼고 있고 고사산산성만이 대동강 위에 있다. 고사산 산성은 석축이고 성둘레는 36761척이다. 다루왕의 횡악성에 비해 다시 두 배 규모이다.
개루왕의 개천에 개루왕의 북한산성이며, 동쪽에는 백탑산(白塔山;1136M)이 있다. 백탑이 있었을 것이다. 고사산산성의 남쪽에는 횡계산(橫溪山)이 있다. 백탑산과 이어진 갈인봉(葛仁峰)은 본래 개루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고왕 22년, 도성의 우물과 한수(漢水)가 모두 말랐다고 하였다. 이후에 고사산(枯死山), 고사산(姑射山)으로 이름이 바뀌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188년에 초고왕(肖古王)은 신라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듬해 구양성(狗壤城)에서 패배하였다. 모산성은 충청북도 진천읍에 있던 대모산성으로 추정하는데 오늘날의 진천군(鎭川郡) 만근산의 만뢰산성에 해당한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구양성은 앞에서 문의면 양성산으로 추정하였다. 190년에 백제는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가 항거하여 퇴각하다가 와산(蛙山)에서 신라군을 물리쳤다. 앞에서 와산성은 보은으로 추정하였고 원산향은 앞에 나온 한산의 원산성과 구별하여 원산향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원산향은 보은에서 신라쪽으로 고려하며, 금산군 서쪽에 있던 원산향(猿山鄕)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대전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204년 백제가 신라 요거성(腰車城)을 함락시키니 신라는 6부의 정병을 거느리고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해 왔다. 요거성은 뒤에 거유성(車踰城)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되는데 거유령이 있던 함경남도 신흥군(新興郡)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총공격으로 나선 사현(沙峴)은 훗날의 사도성(沙道城)과 관련하여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으로 추정된다. 위의 기록을 종합하면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는 보은을 중심으로 노령산맥의 북서쪽은 백제 땅이고 동남쪽은 신라 영역이었다. 한편 백제와 말갈의 경계 지역은 사도성(沙道城), 적현성(赤峴城), 석문성(石門城), 고목성(古木城) 등이었다. 210년에 말갈은 사도성을 침범하였고, 214년에 말갈의 석문성을 빼앗았으나 같은 해에 말갈은 술천을 침범하였다. 사도성은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서쪽 도성산(道成山, 到城山)으로 추정한다. 적현성은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적봉(赤峰) 동쪽 성내리로 고려한다. 석문성은 함경남도 문천군(文川郡)으로 고려한다. 고목성은 고원군 읍성 부근으로 추정한다.
구수왕(仇首王) 때에 역시 적현성과 사도성, 우곡(牛谷) 등에서 말갈과 싸웠다. 우곡성은 법동군(法洞郡)으로 추정한다.
218년에 백제는 신라 장산성(獐山城)으로 쳐들어갔으니 실패하였다. 장산(獐山)은 경상북도 경산의 옛이름이기도 하지만 경상북도 문경도 옛이름이 장산이었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접경 지역으로 고려되므로 이 장산성은 문경으로 추정하고 조령(鳥嶺) 남쪽으로 추정한다. 222년에 백제군은 신라 우두진(牛頭鎭)에 쳐들어가서 웅곡(熊谷)에서 이겼는데 우두진은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 우두동으로 고려한다. 224년에 신라는 백제의 봉산(蜂山, 烽山)을 함락시켰다. 춘천 서남 강촌의 봉화산으로 추정한다. 245년 동천왕 때에, 고구려가 최초로 한반도로 남진하여 신라를 쳤다. 고구려는 말갈을 복속시키고 말갈족의 길을 따라서 동해안으로 남침하였다. 신라는 장수 우로(于老)가 고구려군을 마두책(馬頭柵)에서 막았는데 함흥시 오로고성(吾老古城)이 바로 우로의 고성이다. 이후 함흥시 성천강(城川江) 동북은 고구려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246년에 위나라 관구검(母丘儉)의 침입을 받아 도성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비운을 맞아 모든 국력을 수도 회복과 위나라 경계에 쏟아야만 하였으며 한반도 남부 진출은 꿈꾸지 못했다. 255년에 고이왕 때는 백제가 신라를 침범하여 괴곡(槐谷)에서 백제가 이겼고, 봉산성(烽山城)에서 신라와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 괴곡은 충청북도 괴산으로 추정하고 봉산성은 춘천으로 추정한다. 286년에 책계왕 때는 고구려를 방비하기 위하여 위례성(慰禮城)과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였다. 위례성은 하북위례성을 말하며 청룡산성이고, 이를 수호하는 아차성은 아단성(阿旦城)의 오기일 수도 있는데 아단성은 선천군(宣川郡) 검산성으로 추정된다. 사성(蛇城)은 강동군 고천면(高泉面)의 고성(古城)이다.
아차성은 경기도 하남(河南)에서 강하나를 건너 서울에 아차성(峨嵯城)이 지금도 있는데, 뒷날 장수왕 때에 고구려군이 백제 한성을 함락시켜서 개로왕을 끌고가 참살하였던 곳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전설이다. 온달 장군이 아차한 곳은 될 수 있다.
사성은 책계왕 때에 처음 등장한다. 개로왕(蓋鹵王)이 숭산(崇山; 慈山郡 殷山邑)까지 방죽을 쌓기 시작한 곳이 사성이며, 사성의 동쪽에 사수(蛇水)가 있었고 신라군이 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사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제 사성은 강동군 서하(西河)의 동안(東岸)에 있던 고천면의 고성(古城)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5759척이다. 개로왕의 방죽은 이 강동군 고읍성에서 북으로 숭아산(崇娥山)을 감싼 것이 된다. 숭아산은 숭화산이라고도 했는데 백제의 숭산(崇山)이다. 숭산 부근에 비유왕릉이나 혹은 온조왕릉이 있을 것으로 추정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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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수도는 요동반도 만주와 대동강 평양, 황해도 평산 위례성에서 금강 공주로 넘어갔습니다.
공주의 [무녕왕릉]과 같은 중국식 [벽돌 고분]은 서울에 없고,
요동반도와 평양, 황해도에 수천 개가 있고 그 벽돌 고분 문화는 서울을 건너 금강 공주로 이어집니다.
서울에 백제 수도가 있었다는 국사책은 거짓입니다.
집안의 수만개, 경주의 수만개 고분과 비교하면 백제 고분이 없는 서울은 백제 도읍지가 아닙니다.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식입니다.
[삼국사기] 백제 건국지 한수가 오늘의 한강이 아니라 대동강이었던 것입니다.
백제 수도의 변천(百濟 首都 變遷)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서노 어하라 ; 요동반도 득리사진 용담산성 ; 기원전 31년-19년
2) 온조왕 하북 위례성 ; 평안남도 평성시 청룡산성 ; 기원전 19년- 7년
3) 온조왕 한성(위례성); 십성동 낙랑토성 ; 기원전 7년-서기 32년
4) 다루왕 횡악성 ; 황해도 신평군 달보산성 ; 서기 32년-116년
5) 기루왕 한산성 ; 평양시 청암동토성 ; 서기 116년-131년
6) 개루왕 북한산성 ; 개천시 고사산산성 ; 서기 131년-234년
7) 구이왕의 석현성 ; 요동반도 개주시 청석령산성 ; 서기 234년-370년
8) 근초고왕의 한산성 ; 평양시 안학궁 ; 서기 370년-396년
9) 아신왕의 한성 ; 황해도 평산군 태백산성 ; 서기 396년-475년
10) 문주왕의 웅진성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성 ; 서기 475년-538년
11) 성왕의 사비성 ; 충청남도 부여시 사비성 ; 서기 538년-660년
2장. 구이왕과 대방고지(仇台王, 帶方故地)
1절. 한국 역사에서 사라진 백제 구이왕(仇台王考)
190년 요동왕 공손탁(公孫度)이 자립하고, 194년에는 공손강(公孫康; 公孫度의 子)이 요동왕이 되었다. 이 무렵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초고왕(肖古王;166-214)시절인데 중국측 기록으로 보면 백제 구이왕(仇台王)이 백제 요양시 대방왕에 진출하고, 공손탁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때 대방고지에 백제가 세워졌다는 기록을 중국 [북사], [수서] 등에 남기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삼국사기]에는 백제 구이왕이 없다. 왜 없을까? 그러면 백제 구이왕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먼저 백제 왕 가계를 다시 본다. 현재 [삼국사기] 기록에서 고이왕(234-286)은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인데 개루왕의 39년이나 재위하였으므로 고이왕은 이때 이미 장성하였다고 추정되며, 개루왕 사후에 초고왕이 재위 49년, 구수왕이 21년 도합 68년이 지나 고이왕은 나이 90세 가까이 되어 백제 대왕에 등극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고이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하였다고 전하니, 무려 141세경까지 살았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된다.
또한 비류왕(304-344)은 구수왕(214-234)의 차자인데 234년 구수왕 사후에, 고이왕 재위 53년, 책계왕 13년, 분서왕 7년등 도합 70년을 지나서 등극하여 재위 41년을 하였으니 최소한 121세 이상 산 것이 되어 있다. 즉 김부식이 기록한 [삼국사기](서기 1145년 편찬)의 고이왕과 비류왕의 나이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속일본기 권40](서기 797년 발간)에서 근구수왕(375-384)은 백제 16세왕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14대왕이고 추모왕부터는 15대다. 또한 [신찬성씨록](서기 815년 발간)도 백제 혜왕(598-599)에 대하여서 추모왕의 30세손이라고 하였다. 혜왕은 백제 추모왕이후 29대왕, [삼국유사]로는 28대왕이다. 즉 [속일본기]와 [신찬성씨록]에는 백제왕 한분이 사라진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6대왕인 구수왕, 즉 추모왕 이후 7대왕인 구수왕은 [속일본기]에서 10대왕이라 하였다. 이는 한자로서 十과 七의 착오로서 칠이 맞다. 사라진 한분이 서너 분이 될 수는 없으니까...칠이 맞다면 사라진 한분의 백제왕은 7대 구수왕 이후 16대 근구수왕 이전에 존재한다. 특히 왕의 성과 이름이 밝혀진 15대 근초고왕 여구 이전일 것이다.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마치 새로운 왕조처럼 초고왕, 구수왕과 똑같은 시호를 사용했다. 초고왕, 구수왕과 근초고왕, 근구수왕은 분명 계통이 다른 것이다. 발해 때 대인수황제가 고조 대조영이 아닌 동생 대야발의 혈통이었던 것처럼... 근초고왕의 다른 계통의 선조 혈통을 추적해 올라가면 13대 비류왕(304-344)이 부왕이고, 구수왕(214-234)이 비류왕의 부왕이라 했는데 여기에 엄청난 무리가 있으므로 비류왕은 7대 구수(仇首)왕이 아닌 10대 구이(仇台)왕의 아들로 추정한다. 구이왕과 공손탁의 딸이 통혼한 것은 아무리 늦춰 잡아도 (여자의 결혼 적령 14~5세와 공손탁의 194년 죽음을 고려) 210년 이전이다. 구이왕과 고이왕이 착오하기 쉬우므로 두 왕이 겹친 것으로 본다.
여기에 백제의 연호로서 문헌상 최초인 낙초(樂初)가 [삼국유사]에 우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 239년 기미년, 사비왕 2년이 낙초 2년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사비왕(沙沸王)이 너무 어려서 왕위에 세웠다가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이상은 [삼국사기]와 똑같은데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여기에 또다른 기록을 인용하였다. “혹은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239년)에 사비왕(沙沸王)이 붕(崩)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사반왕은 붕(崩)하였으므로 제위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며 무녕왕릉에서도 붕(崩)을 썼다.
여기서 234년에서 238년까지 고이왕, 238년부터 239년까지 사비왕, 239년부터 286년까지 구이왕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 5년, 즉 238년에 궁문 기둥에 벼락이 떨어지고 황룡이 날아나왔다는데 혁명의 은유적 기록으로 보여진다. 구이왕의 재위는 239-286년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고이왕(234-238)은 98세까지만 살아도 되고, 141세까지 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구이왕의 아들인 비류왕도 41년을 통치하지만 이 비류왕도 [삼국사기]에 짜맞추기 위해 최소한으로 121세를 살지 않고 평범하게 60세여도 충분하다.
구이왕 뒤에 286년 즉위한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 부인과 결혼한 바가 있는데 이 대방왕이 구이왕이다. 즉 평양 한성의 고이왕, 그 아들 책계왕이 있었고, 대방에 황룡왕 구이왕과 그 아들 비류왕이 있었다. 298년 책계왕은 맥인(부여인)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분서왕은 303년에 낙랑 서현을 공격하였다가 304년에 낙랑태수에게 암살당했는데, 낙랑의 서현은 물론, 백제의 낙랑 공격이 중국측 기록에 전혀 없으므로 이는 백제 한성왕와 백제 대방왕 사이의 분쟁이다. 분서왕을 암살한 낙랑태수도 대방고지의 비류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백제 대방왕은 요동반도에 있었다. 전한(前漢)의 대방현은 함자현으로부터 대수(帶水)가 바다로 나가는 해안이었다. 해성으로 추정된다. 후한시대 194년 공손강의 요동국은 영동칠현을 대방군으로 하였으므로 대방은 천산산맥의 동쪽, 즉 안산(鞍山)의 남쪽이 된다. 벽류하가 당시 비류하이고, 오고성(吳古城)이라고도 불렀던 위패산성(魏覇山城)이 237년 위나라가 요동국 배후에 바다 건너 밀파한 낙랑 태수와 , 대방 태수의 임시 치소로 고려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삼국유사]에서 중국에 없는 낙초(樂初)라는 연호가 백제 사비왕 즉위초에 세워졌다는 것이며, 낙초 원년은 238년 무오년이 된다. 중국의 연호는 당시 경초(景初)로서 기미년은 경초 3년이니, 경초와 낙초는 글자가 근본적으로 틀리고, 또한 태세 간지도 틀리므로, 경초 3년이 낙초 2년이 될 수는 없다. 또한 고이왕의 즉위는 청룡(靑龍) 2년이었으므로 일연(一然)도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구수왕 사후에 어린 사비왕 대신 구수왕의 삼춘인 고이왕이 즉위했고, 고이왕이 죽자 비로소 사비왕이 즉위했는데 사비성은 당과 고구려 전쟁에 나온 요동반도 성이다. 그해 요동국 공손씨가 멸망했으므로 백제가 그 뒤를 이어 연호를 세운 것으로 고려된다. 238년 요동국을 멸망시킬 때에 요동반도의 위나라 낙랑,대방군도 전쟁에 참여하여 요동군 양평으로 건너갔을 것이며, 이에 백제는 쉽게 위나라가 비운 낙랑을 취득하여 기념 연호를 세운 것이다.
이후 구이왕의 큰아들인 책계왕, 책계왕의 아들인 분서왕을 지나 분서왕이 일찍 죽자 구이왕의 또다른 아들인 비류왕이 등극하였다. 비류왕의 사후에는 분서왕의 아들 걸왕이 즉위하였다.
2절. 대방 석현성, 개주시 청석령산성(帶方 石峴城, 蓋州市 靑石嶺山城) [삼국사기]에서 240년에 구이왕의 백제 대군의 열병이 석천(石川)에서 이루어진다. 석천은 개주시(蓋州市) 대청하로 고려되며 개주시 석성산이 석현성으로 고려된다. 석현성, 지금의 청석령산성은 성둘레가 10여리로서 토축과 석성이 섞여 있다. 기루왕(己婁王)의 평양 한성 안학궁은 사비왕 시대 238년에 낙초로 개원하면서 대방 백제 석현성으로 천도하였다. 대방 백제 시대에 안악3호분 동수묘가 만들어졌다. 영화13년 10월무자삭 26일 계축 (永和十三年 十月戊子朔 二十六日癸丑) 이 기록에서 “사지절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위교위 낙랑상”까지 요양의 낙랑지방을 다스리던 백제 왕에 대한 동진(東晉)의 공식 호칭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은 [진동장군 령 낙랑태수]였다. 낙랑상(樂浪相)은 낙랑왕(王)보다 한 단계 아래의 작호인 것인데, 진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 백제 지방왕 동수(冬壽)의 작호는 낙랑상(相)에 머무른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낙랑공, 백제 근초고왕은 낙랑태수였다. 피장자의 이름 동수(冬壽)는 당시에 유행하던 백제 왕족 이름이다. 261년 고이왕기 내신좌평은 고이왕의 동생 우수(優壽)였고, 고수(高壽)는 위사좌평이었다. 죽은 자의 성씨(姓氏)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백제왕가이기 때문이다. 동수(冬壽)묘에서 동수(冬壽)는 298년에 태어났다. 300년대초에 유주(今 北京)의 요동군 평곽현령(平廓縣令; 今 盤山市)을 제수받았지만 가짜다. 그 땅은 전연국이 지키고 있었고 동진은 백제에게 전연국을 쳐서 그 땅을 차지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동수(冬壽)는 승진하여 도향후라는 작호가 있는 창려군 태수, 현도군 태수, 대방군 태수를 겸직하는데 백제의 대방군 태수 이외에는 실제가 아니다. 영화는 중국 동진(東晋) 목황제(穆皇帝)의 연호였다. 한편 동수묘 벽화 행렬도에서 주인공은 수백 명의 무사와 시녀를 따르게 하고 성상번(聖上幡; 임금의 행차 깃발)이라고 쓰인 깃발을 주인공의 수레 앞에 휘날리는 것이 보이며 이는 백제의 일개 제후가 아니고 자칭 백제 대왕묘라는 확증이 된다. 백제 구이왕은 대방왕이었지만, 343년 비류왕의 사후에 백제왕위 계승권은 계왕에게 있었는데 귀국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346년 선비족 전연국의 침입에 의한 백제 부여 함락때에는 부여왕 여현(餘玄)이 대신 끌려갔다.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근초고왕도 대방왕이었는데 371년 한산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중국의 진나라가 근초고왕을 낙랑태수라고 불러주니 대동강 평양이 갑자기 낙랑으로 된다. 때로는 대방도 된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광개토왕은 대방왕, 장수왕은 낙랑왕이라고 했으나 그 지역은 천리 북쪽이다.) 한편 357년에 사망한 동수가 동진에서 인정받은 낙랑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초고왕에게 토벌당한 후에 묘를 쓸 때는 백제 왕의 반열에 기록되지도 못하고, 당연히 붕(崩)자를 쓰지 못하고 훙(薨)자를 써야했던 것이다. 전연국 모용황의 수도였던 조양시에서 안악3호분과 주인공이 매우매우 흡사한 벽화묘가 발굴되었다. 346년 모용황에게 끌려간 부여왕 여현의 묘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 여울은 384년 후연국의 태부를 지냈다. 북한에서는 동수묘를 미천왕(美川王)묘라고 하다가 고국원왕묘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선비족 동수(佟壽)묘가 아니라 좀 낫기는 하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가 요동반도 중간 혼하(渾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실상은 백제 왕릉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고이왕의 복식(服飾)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동수묘 주인공 초상화와 같이 검은 비단의 모자를 쓰고 금장식을 모자에 달고, 자색 비단의 도포를 입은 것이 일치한다. 허리띠의 색깔은 [삼국사기] 기록에 흰(素色; 하급관리 허리띠인 白色과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가죽대라고 하였는데 희지도 검지도 않다. 소색(素色)은 누런 가죽색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북사(北史)]에 기록된 고구려왕의 복식은 오색의 비단 도포에 흰 비단 모자를 썼다고 하였으며 가죽혁대에 금테두리를 하였다고 하였다. 즉 피장자 동수의 복식과 고구려왕의 복식은 전혀 관계가 없다. [양서]의 주요한 기록 중에 신라가 백제의 동남으로 5000여리(착오가 아니다. 한자로 百과 千은 전혀 다르다.)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구이왕(仇台王)의 대방성(帶方城, 蓋州市)로부터 신라 경주가 5000리 되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송서(宋書)]와 [남제서(南齊書)]에서 백제는 구이(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이는 구이왕의 대방(帶方) 천도 기록으로 대신할 수 있다. 또한 신라로부터 서북쪽으로 5000리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당시 백제 수도는 한반도 밖이다. 중국 기록에는 대릉하에 후퇴한 중국의 요동군으로부터 고구려나 백제 모두 동쪽으로 1000리에 위치해 있다. 이는 각각 철령시 최진보 환도성과 개주시 대방성인 것이다. 구이왕의 백제 수도 이름은 대방성(帶方城), 또는 석현성(石峴城)으로 추정한다. 백제 한성은 서울이라는 통설이 부정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곳은 중국의 당시 요동이던 진황도시 노룡현으로부터, 동천왕(東川王)의 평양성인 철령시 평양성과 거의 같은 거리여야 하는 것인데 서울은 최소한 삼천리 밖이다. [북사] 등에서 백제(百濟)가 백인으로 도래하여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처음 나라를 세웠고 공손탁과 사돈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3절. 근초고왕과 평양 한산성 시대(近肖古王, 平壤漢山城 時代)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은 고구려 남평양성인 서울을 빼앗아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 남평양성이 서울이든 평양이든 백제가 빼앗을 이유가 없이 본래 백제 땅이다. [삼국사기]는 물론 서울을 고구려 남평양성이자 백제 한성으로 보고 있는데 어불성설이다. 백제 기루왕이 평양에 안학궁을 지어 천도하였던 바가 있는데, 이는 청암동토성, 즉 노성(魯城)으로 추정되는 곳이고, 근초고왕의 한산성은 대성산성 남쪽의 안학궁이다. 근초고왕은 370년 겨울에 도읍을 한산(漢山; 平壤)으로 옮겼는데 이는 평양의 대성산성 아래 안학궁(安鶴宮)이다. 근초고왕은 집안(集安)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나, 불행히도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기실 고구려가 집안에 둥지를 짓고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것은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백제 대국의 등허리에 바늘을 꽂은 것이다. 근초고왕은 남쪽 대동강 유역의 평야, 마한의 옥토가 위협받으면 백제의 근본이 위태하다고 판단하고 마한 땅을 지키기 위해 대동강 한성으로 천도한 것이다. 근초고왕은 한성 천도 이듬해 372년 동진(東晋)과 교류하여 진동장군(鎭東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라는 작위를 받았다. 따라서 371년까지 요양시 낙랑군 조선현은 근초고왕의 백제 영토였다. 근초고왕의 안학궁한성은 동쪽으로 고방산성, 서쪽으로 청암동토성, 남쪽으로 청호동산성, 북쪽으로 대성산성이 지키는 훌륭한 방어체제를 갖추었다. 그외 동쪽의 홀골산성, 서족의 황룡산성, 남쪽의 횡악산성, 북쪽의 청룡산성 등으로 오방성체제를 갖추었다. 근초고왕의 평양 한성은 아신왕에 이르러 396년,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함락당했고, 아신왕이 수복하였으나 다시 광개토왕에게 빼앗겼고, 다시 비유왕 말년에 수복하였으나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빼앗겼고, 동성왕이 484년에 수복하였으나 동성왕 말년에 잃어버리고 506년에 무녕왕이 수복하였으나 성왕이 안장왕에게 빼앗겼고, 성왕이 550년경에 다시 한번더 마지막으로 수복하였으나, 곧바로 다시 빼앗겼으며 이후로는 완전히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왜왕의 수호신, 혹은 임명장으로서,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가 일본의 신사에 남아 있다.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년 []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왕의 세자 기(奇)가 태어나니 성상은 말씀하시어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 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중국에 태화(太和)라는 연호가 있었지만, 태화(泰和)는 없었으므로 당연히 백제 연호이다. 음력 5월16일 병오일이 있던 해는 서기 400년전에서 362년이 가장 타당하다. 이는 [日本書紀]에서 신공왕후 시대와 맞물려서 더욱 그러하다. 이 태화가 백제의 연호라는 심증으로 태화(泰和)를 간략히 하여 태화(太和)로 금석문을 새기는 일은 가정할 수 있지만, 태화(太和)를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글자가 더욱 복잡한 태화(泰和)로 새기는 경우는 상식적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해석은 칠지도 태화 4년을 중국 동진의 태화(太和) 4년으로 치고 서기 369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하여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기 369년에는, 이 해의 모든 16일에 병오일이 없다. 물론 13일에도, 11일에도 없다. 그래서 비슷하게 생긴 태시(太始) 4년을 찾아봐도 없으므로 이 태화만큼은 백제의 독자 연호라고 인정되게 되었다. 기생 성음(奇生 聖音)은 기(奇)왕자가 태어나자 임금님이 말씀(聖音)하시기를 “왜왕으로 봉한다.”는 것이고, 뒤에 이어지는 지조(旨造)의 지(旨)역시 앞글자인 성(聖)에 걸려서 성지(聖旨)를 내려서 왜왕의 신물인 칠지도의 제작 지시를 말한 것이다.
근초고왕이 요동반도에서 한반도의 평양으로 남천한 데에는 고구려의 위협도 있지만 그의 시대에 칠지도에서 보듯이 백제 왕자를 왜국왕으로 임명하는 등, 일본으로 진출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도 큰 이유도 있다.
343년 고국원왕의 집안 황성 천도는 백제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제까지 백제의 북쪽에 있던 고구려가 백제의 동쪽에 가까이 내려온 것이다. 이전에 동천왕이 신라를 쳐서 마두성(馬頭城)까지 내려와 신라의 우로(于老)가 마두성을 보전하였다. 함흥부에는 견두산, 우두산이 있는데 마두산은 전하지 않고 대신에 오로촌고성(吾老村古城)이 전한다. 신라 장수 우로의 성이 바로 오로촌고성이며 1076척의 석성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餘句)은 345년에 즉위하였는데 368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 2만명으로 백제의 치양(雉壤)에 쳐들어와서 유린하였다. 당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는 반걸양(半乞壤)에서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수곡성(水谷城) 서북쪽까지 고구려군을 추격하였다. 훗날 동성왕 때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살수(薩水)를 쳐서 신라가 패전하고 견아성(犬牙城)에 포위되니 백제가 구원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가 백제 치양을 쳤고 이번에는 신라가 백제를 도와 장군 덕지(德智)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다.
여기서 신라의 살수(薩水)는 강원도 함흥과 정평군을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이다. 사수산(泗水山,1747M)에서 비롯되며 하류에는 사수리(泗洙里)가 있다. 바로 이 부근에 고구려 장곡현(長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현재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이다. 백제 수곡성은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부근에 장곡폐현, 여위고성, 봉대고성, 수시리고성 등 고성이 많은 것은 국경지방이었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살수, 즉 금진강에서 패하고 쫓겨간 신라군이 보전한 견아성(犬牙城)은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술(戌)은 견(犬)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이어지는 천앙봉(天仰峰), 또 북쪽의 왕장리(旺場里)도 개짖는 모습을 의미한다. 한편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고구려는 백제가 신라의 견아성을 구원하자 백제의 치양성을 쳤는데, 서로 가까운 곳이다. 이때 백제를 구원한 신라장수의 이름은 덕지(德智)인데 그의 이름을 붙인 덕지강(德池江)이 고원군(高原郡)을 가로지른다. 즉 덕지강과 금야강 하구까지가 5세기말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또 금야강 상류는 백제 땅, 정평군(定平郡) 금진강(金津江)은 고구려 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성왕 시대에 백제왕 모도(牟都)가 생존하였던 것을 중국 사서를 통해 알고 있다. 모도봉(毛都峰,1883M)은 치양으로 추정한 요덕군 북쪽에 남아있다.
근초고왕은 368년 겨울 11월에 한수(漢水)에서 열병하였는데 이 한수는 대동강이다. 370년 10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하(浿河)에 쳐들어왔는데 근초고왕이 패하(浿河)에서 맞아 싸워 고구려를 물리쳤다. 이 [삼국사기]의 패하(浿河)는 단군 시대 패수인 태자하(太子河)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청천강은 [삼국사기]에서 패수(浿水)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서 370년 전쟁은 패하(浿河), 392년 사건은 패수(浿水)로 각각 달리 구별해 기록한 것이 일치한다. 이는 [백제본기]에서 한수(대동강)와 한강(서울 한강)을 구별하여 쓴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직후 근초고왕은 고구려 평양성을 치도록 하여 태자 근구수가 정병 3만명을 이끌고 평양성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당시의 평양성은 황성, 즉 집안이거나 환인 오녀산성이다. 즉 요령성으로부터 길림성 집안에 숨어들어가듯이 천도한 고국원왕은 서남쪽으로 백제, 동남쪽으로 백제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숨을 쉬자면 백제와 맞부딪게 되는 것이다. 고국원왕은 한반도 태백산맥 동부로 진출하려다가 실패하고 태자하를 따라 내려가 요양으로 진출하려다가 실패하고 대신에 집안성에서 백제군을 맞아 전사한 것이다. 당시 백제군의 공격로는 본계시 태자하를 따라 동진하여 길림성 통화시로 넘어가서 집안의 평양성을 공격한 것이다.
372년 백제는 청목령(淸木嶺)에 성을 쌓았는데 청목성(淸木城)이고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고읍성(古邑城)으로 본다. 뒷날에 개로왕이 청목책을 설치한 곳은 희천군의 대추령(大楸嶺)으로 추정한다. 희천군은 본래 청색(淸塞)이라고 하였었고 청목(淸木)은 청물의 의미로서 청천강변을 의미한다. 이는 고구려 집안 평양성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을 타고 한반도 옥토로 내려오는 길목에 방어성을 쌓은 것이다. 374년에 소수림왕(小獸林王)이 함경남도의 백제 수곡성(水谷城; 今 定平郡 長原面)을 쳐서 점령하였다. 백제의 치양성(稚壤城; 耀德郡 宣興面)이 위협받게 되었다. 375년에 소수림왕은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듬해인 376년에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餘須)은 정병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집안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물러나왔고, 그해 11월에는 고구려가 추격군을 보내어 백제를 침범하여 왔다. 383년 4월에 근구수왕이 서거하여 침류왕이 즉위하였고 11월에는 고구려 소수림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왕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384년 백제는 침류왕이 퇴위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384년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군사 4만명으로 후연(後燕)을 쳤다. 당시 용성을 지키던 모용수의 부하장수 대방왕(단,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호칭이다.) 모용좌(佐)가 구원한 요동, 현도 2군을 빼았았는데, 11월에 연의 모용농(慕容農)이 다시 찾아갔다. 이 요동, 현도는 진황도시 노룡현의 요동성과 수중현의 현도성으로서 2차 현도군으로 추정된다. 즉 조양시, 부신시, 신민시, 흑산현 등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왔고 이는 백제의 요양시 낙랑(遼陽市 樂浪), 개주시 청석령산성(蓋州市 靑石嶺山城) 지역을 삼면(三面)에서 포위한 모습이 되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몰리게 되었다. 385년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설치한 백제의 국경 초소는 관방(關方)이라 하였는데 청목령, 즉 평안북도 희천군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임하였다. 팔곤성은 요동반도 애양현(靉陽縣) 관수진(灌水鎭) 고대자산성(高臺子山城)으로 추정한다. 애하(靉河)의 가지인 관수(灌水)는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하고, 관은, 곤과 통한다. 청천강 북쪽의 희천성, 즉 백제의 청목령에서부터 험한 산맥을 따라 북으로 팔곤성, 즉 관수진에 이르렀는데, 서쪽으로 바다는 봉성을 지나 본계에서 요양시, 개주시로 이어져 서해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관수진(灌水鎭)의 위도는 해성시보다 북쪽이고 요양시, 본계시보다는 약간 남쪽이다.
385년에는 고국양왕이 백제를 쳤고 388년에는 백제 진사왕이 고구려를 쳤다. 386년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군이 관미령에서 백제를 이겼다. 당시 백제의 동쪽 관미령은 북청군(北靑郡) 통팔령천(通八嶺川)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팔령(八嶺)은 백제령(百濟嶺)에 대한 고구려식 표기이다. 즉 고구려의 말갈군이 북청군 영덕산(嶺德山)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387년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쳤다. 특히 389년에는 백제가 고구려 도압성(都鴨城)을 빼앗았다. 고구려쪽에서는 도곤성(都坤城)이라고도 기록하였다. 북청군의 통팔령천의 동쪽 가지는 곤파천, 혹은 압파천이라고도 한다. 즉 당시에 도곤성과 도압성이 각각 양국에 기록된 흔적으로서 지금도 곤파천, 압파천이 병용되는 것이다. 아무튼 도곤성은 대곤호(大困湖), 압해산이 있는 신포시 구남대천(舊南大川) 남안 발해고도비(渤海古都碑)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니망지산성, 홍도동산성, 다탄대고성, 허천평성 등 고성들이 상당히 밀집되어 있다. 390년 말갈이 백제 적현성(赤縣城)을 합락시켰다. 여기서 적현은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으로 추정한 바가 있다.
4절. 개로왕의 한성
개로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침공으로 한성을 함락당하고 왕의 일가족이 살해당했다.
당시 개로왕이 멸망한 백제 한성(漢城)의 지리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서기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직전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충청도 부여 땅으로부터 북진하면서 대곡[]한성(大谷[]漢城) 등 2군12성을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가 군(郡)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 대곡군이 오늘날의 평산군이었으므로 대곡군에 한성(漢城)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기록은 대곡군 한성과 오곡군(五谷郡; 今 瑞興郡) 쌍현성 등 2군 12성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평산은 백제의 한성이고, 신라가 뺏은 도살성이고, 고구려의 대곡 한성이었다. 둘째는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蓋鹵王) 편과 [일본서기] 웅략왕(雄略王) 20년조에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기록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는 백제 북성(北城)을 7일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주살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이 백제 왕도 한성(漢城)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 백제 개로왕의 을묘년(475년)에 맥(貊,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쳐서 칠일칠야동안 쳤고 왕성까지 함락시켰다. 마침내 위례성을 잃었다.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貊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 大后王子等 皆沒敵手 즉 칠일주야로 공격하여 먼저 함락시킨 대성은 황해도 서흥군의 대현산성으로 추정된다. 서쪽 라장산(羅將山)은 신라장수 이사부와 관련될 것이다. 북쪽 모니산은 개로왕의 모니부인(일본서기)을 연상하게 한다. 남성은 평산 태백산성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위례성이다. 따라서, 마침내 백제 위례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왕 12년 기록에서, 550년 경오년에 백제 성왕(聖王)이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쳐서 회복한 기록이 있다. 百濟 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任那, 倭) 王伐高麗 獲 漢城之地, 又進軍 討平壤, 凡 六郡之地 遂復故地. 百濟 棄 漢城 及 平壤 新羅因此 入居漢城 今 新羅之 牛頭方, 尼彌方
[삼국사기]에서 529년, 성왕(聖王) 7년 10월에 고구려 안장왕이 쳐내려와 백제의 오곡군(五谷郡)을 차지하였는데, 오곡군은 오늘날의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이다. 이어서 550년 성왕(聖王) 28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으며, 이어서 신라가 어부지리로 두 성, 즉 도살성과 금현성을 다 빼앗아 차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의 반격에 쫓겨 백제가 평양성 등에서 물러나니, 한성(漢城)에는 신라가 들어갔는데 이곳이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 되었다. 신라 우두방은 고구려 우잠군(牛岑郡)이었던 오늘날의 금천군(金川郡)을 가리키는데 평산 한성의 동쪽이다. 도살성이었다. [일본서기]의 한성 위례성은 바로 평산군 태백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금현성은 서흥강의 발원인 대현산성(大峴山城)으로 각각 추정된다. 고구려가 붙인 도살성이라는 이름은 장수왕의 고구려군이 백제왕성, 즉 평산위례성을 공략하여 백제 왕족을 도살(屠殺), 도륙(屠戮)하고서 붙인 섬뜩한 새이름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서 평양(平壤)은 분명히 백제의 고지(故地)로서 한산성이었다. 대성산 아래 대시한성, 즉 안학궁이 있고, 한성(漢城)은 평산한성으로서 고구려 도살성이자 신라 진흥왕의 신주(新州)가 되었던 평산한성인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보아서 성왕(聖王)이 되찾았다가 신라에게 빼앗긴 도살성은 백제의 평산 한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56년 신주를 폐하고 서울에 북한산주(북한산성)를 두었고 다시 북한산주를 567년 남천주로 바꾸었다.
넷째는 현재 물이름인 예성강(禮成江)이다. 예성강은 위례성강(慰禮城江)의 준말이다. 백제의 원고향은 졸본부여이므로 백제인은 부여씨를 성으로 삼았는데 위라천의 주변의 부여면(夫餘面)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다. 백제 성왕은 사비성 천도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다섯째는 위례성강을 끼고 건설한 평산군 태백산성과 금강을 낀 부여 사비성의 입지 선택과 건설 유형이 매우 유사한 점이다. 이는 요양시 구성, 평양의 청암동 토성 등과도 유사하다. 부여 사비성은 본래 부소산성이다.
<북한은 1.15 중앙방송을 통해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청암동 토성에 대한 발굴조사('95. 12--'97.4)에서 고조선 및 고구려 시기의 유적들을 발굴하였다고 보도했다.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가 발굴했다는 이 유적은 고조선과 고구려 시기의 성벽 및 고구려시기의 건물터로, 성벽의 크기가 밑넓이 약 10M, 높이 약 2.5M로 3차례 고쳐 쌓았는데 아래성벽은 고조선시기의 것이고 윗성벽은 고구려 시기 것으로 성벽을 쌓았던 흙속에서 신석기 및 청동기 유물인 반달칼, 돌창, 팽이그릇 조각 등이 나왔으며 건물터에서는 3개의 건물기초와 토방돌, 회색기와 조각등이 나왔고, 금분을 많이 사용한 꽃무늬의 장식등이 그려진 고구려시기의 건물벽화는 최초로 발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벽화다.) 북한은 이번에 발굴조사와 관련 동 지역이 고조선의 수도였을 것이고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처음 옮긴 3세기 중엽의 [왕궁성]일 것이라며 평양을 중심으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발전하였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4세기 중엽 백제 왕궁이다.) 여섯째는 주변 산성의 이름이다. 태백산성의 조선시대 이름은 성황산성(聖隍山城)이다. 위례성을 바꾼 이름이다. 남쪽에는 부아악(負兒岳)을 의미하는 새로운 자모산성(慈母山城)과 철봉산성(鐵峰山城)이 남아있다. 기타, 평양 서쪽에서 발견된 평산군(平山君) 신사비(다른 말로 점재현 신사비)에는 평산군(平山君)이 백제의 수호신(守護神)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위례성이 당시의 백제 수호신이 계셨던 곳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덕왕(景德王) 21년에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 휴암(鵂巖;봉산군), 한성(漢城), 장새(獐塞;수안군), 지성(池城;해주), 덕곡(德谷;) 등 6성을 쌓았는데 여기서의 한성(漢城)도 황해도로 보아야 하며, 그 위치는 평산군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평산군의 읍성인 태백산성, 즉 성황산성(城隍山城)이 개로왕의 백제 한성이었고, 주위로 자모산성(慈母山城), 철봉산성(鐵峰山城) 등을 쌓았다. 개로왕의 위례성으로 비정된 성황산성은 둘레 7525척의 석성이었고, 자모산성은 성둘레 2480척, 철봉산성은 둘레 213척의 석성이었다. 대현산성은 20238척이었다. 대현산성과 성황산성의 관계는 대동강 대성산성(24300척)과 안학궁(5160척)의 관계와 같다.
5절. 낙랑 유물의 허구성(樂浪 遺物 虛構性) 1. 낙랑 고분은 백제 고분이다.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하여 중국의 낙랑군이 대동강에 있었다고 해석했던 유물과 유적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낙랑 고분, 소위 중국식 고분인데 이 모두가 백제, 또는 고구려 고분이다. 그러한 고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의 부장품에는 왕망 시대에 주조된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최소한 후한(後漢)시대 이후로서 전한(前漢)시대의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윤내현(尹乃鉉)님의 해석이다. 그러니 필자는 백제 구이왕이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식으로 제례 의식을 도입한 이후에 백제인의 손으로 건설된 중국식 백제 고분으로 추정한다. 큰 특징은 무녕왕릉과 같은 벽돌 고분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고구려의 수천개 고분, 경주의 신라 고분들에 견주어 그에 상당하는 백제 고분이 기왕의 해석에서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여기 황해도 신천군, 봉산군, 서흥군, 그리고 평양 남쪽에 있는 수많은 낙랑 고분이 사실은 모두 백제 초기, 중기, 그리고 고구려 말기의 고분이다. 2. 낙랑 기와는 백제 기와다. 대동강 유역 낙랑토성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대진원강(大晉元康),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진원강은 서진의 혜제의 연호로 보면 서기 291년부터 299년간 사용된 연호이다. 이 시기는 백제 책계왕(責稽王;286-298년)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모용외의 선비족 국가가 요령성 조양부터 북경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이 한반도에 들어올 여력이 없다. 따라서 백제가 요동반도 중심 요양시 낙랑까지 확실히 차지하고 있었으며, 평양의 토성에까지 진나라 세력이 있을 수 없다.
[진서]에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평양 천도 후인 372년에 동진에서 낙랑 태수라고 책봉한 기록도 있다. 동수묘, 걸왕릉도 낙랑상이다. 즉 백제왕이 있는 곳을 낙랑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357년에 후연(後燕)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낙랑공이라고 했었고, 이후 장수왕부터 낙랑공이 지속되었다. [양서] 이후부터 백제왕을 가리켜, 중국에서는 대방왕이라고 일컬었다. 광개토왕도 대방왕이라고 칭한 적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요동반도를 광개토왕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3. 낙랑 봉니는 백제 낙랑군에서 온 것이다. 토성 지역에서 출토된 봉니(封泥)로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조선우위(朝鮮右尉)”,“염한장인(言冉邯長印)”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낙랑군 태수의 봉니와, 낙랑군에 속했던 조선, 염한현 등의 지명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동강이 그 지역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몰상식한 것이다. 그 이유는 봉니의 성격이 발신지를 표시한 것이지만, 발견되는 곳은 발신지가 아니라 수신지, 혹은 경과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봉니들은 하북성 낙랑군 지역 여러 곳에서 백제의 대동강 토성으로 보내온 것들이다. 즉 백제 구이왕의 신하 낙랑태수나 조선현령, 염한현령 등이 보내온 공문서이다.
4. 낙랑 인장은 백제 인장이다. 대동강의 여러 고분에서 각각의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는데 왕광묘(王光墓), 왕우묘(王旴墓),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 부조장묘(夫租長墓) 등에서 출토된 인장이다. 왕광묘에서는 낙랑태수연 왕광지인(樂浪太守掾 王光之印), 신광(臣光), 왕광사인(王光私印)이 발견되었다. 왕우묘에서는 오관연왕우(五官掾王旴), 왕우인신(王旴印信) 등이 발견되었다. 부조예군묘와 부조장묘예서는 각각 부조예군(夫租薉君), 부조장(夫租長)의 인장이 출토되었다.
왕씨는 백제인의 주요성에 포함된다. 다음 동성왕(東城王) 때의 [남제서]에 나타난 백제 관직과 백제인명을 소개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陣明)” 즉 백제 관직에 낙랑태수도 있고 조선태수도 있다. 또한 성양태수는 바로 왕씨였다. 그러니 왕광은 왕무의 조상으로서 일찌기 중국에 진출하여 낙랑태수연(낙랑태수 보좌역)을 지낸 것이다. 또한 왕우는 왕광의 혈연으로서 오관연을 지내고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보란점시(普蘭店市)에서 발견된 임예태수(臨穢太守)의 인장도 백제의 것이다. 평양시 고분에서 유주자사(幽州刺使) 진묘(鎭墓)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절대로 중국 땅 유주(幽州)가 될 수 없고, 그 고분에 묻힌 사람이 고구려왕의 임명으로서 유주(今 天津市 薊縣)에서 유주자사로 봉직하다가 돌아와서 영예롭게 묻힌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위의 고분들은 고이왕 이후 백제인들이 중국식 제례를 도입하였으므로 중국식 고분을 건설한 것이고, 그 안에 묻힌 사람들은 고이왕의 중국 진출 때에 같이 중국의 낙랑 지역에 가서 백제의 관직을 수행하고 돌아와 묻힌 사람들인 것이다. 왕우묘에 묻힌 중국 고대의 칠기에 대하여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일본에서 고려청자가 발견되면 일본이 고려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왕우가 중국 땅에서 봉사하면서 확보한 사유재산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분의 부장품으로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이 있다. 동종의 주조 연대는 명문에 의해서 기원전 41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동종은 훨씬 후대의 동경(銅鏡)과 같이 출토되었다. 즉 효문묘동종은 제조하고나서 한참 뒤에 부장된 것이다. 또한 효문묘의 주인인 문제는 한나라 무제의 아버지로서 낙랑군이 한나라에게 속하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즉 효문묘동종과 낙랑군은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이 효문묘동종 역시 우리 백제인이 중국에 가서 봉사하고 돌아오며 습득한 기념품인 것이다. 일본 땅에서 조선의 범종이 발견되었다고 일본을 조선땅이라고 말한 사람 누가 있겠는가? 그것이 일본에서 발굴된 고려 청자라도 일본이 고려땅임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신에 일본 땅의 조선의 범종이나 고려 청자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동강 유역의 중국 유물은 장기간 동안 백제가 중국을 경영하였음을 증거할 뿐인 것이다. 6. 평산군 신사비 평양 서쪽 용강현에서 발견된 평산군신사비(占蟬平山君神祠碑)가 있다. 비문은 일곱 줄로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 2년 4월 무오 점재장 발흥 []和二年 四月戊午 秥蟬長 勃興 [][]건 승속국회 []위거[][] [][]建丞屬國會 []爲擧[][] []신사 각석사왈 []神祠 刻石辭曰 []평산군 덕배대숭 승천출[] []平山君 德配代嵩 丞天出[] []우점재 흥감 풍우, 혜윤 토전 []佑占蟬 興甘風雨 惠潤土田 [][]수고 오곡 풍성, 도적 불기 [][]壽考 五穀豊盛 盜賊不起 [][]칩장 출입 길리, 함수 신광 [][]蟄藏 出入吉利 咸受神光
이제까지는 낙랑군 점재현이 바로 이 자리 평안남도 서해안으로서, 점재현의 수장이 풍년을 기원한 것으로 해석해오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나 정인보 선생은 중국땅에서 굴러들어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설령 점재현장이 자신의 관할 구역에 비를 세울 경우에는 자신의 관직명을 새겨넣지 않는 것이 한(漢) 시대의 비문 양식이라고 고증하였다. 또한 이 자리가 한사군 중의 낙랑군과 관계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첫행 “[]화 2년 4월 무오 점재장 발흥.([]和二年四月戊午 秥蟬長勃興)”은 점재현의 수장이 평산군 신사를 세웠다는 뜻이다. 둘째 행“[][]건 승속국회 []위거[][] ([][]建丞屬國會 []爲擧[][])”를 해석하면 중국에 나가 있는 하북성, 산동성의 백제 속국 태수나 현령들이 본국 백제에 들어와 회의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세째 행“[]신사 각석사왈 ([]神祠 刻石辭曰)”은 신사를 세워 글을 새겨 말씀을 올린다는 듯인데 하늘의 천신에게 부탁의 말씀을 올리는 것이다. 네째 행“[]평산군 덕배대숭 승천출[] ([]平山君 德配 代嵩 丞天出[])”은 백제 온조 한성의 토신인 평산군(平山君)에게 대숭신을 암신(여신)으로서 맞아 짝지우시라는 것이다. 평산군이 평산의 신이라면 황해도 평산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황해도 평산군에는 성황산성(聖隍山城; 今 太白山城)이 있는데 태백산성의 신이 평산군(平山君)이었을 것이다. 대산(代山)과 숭산(崇山)은 중국에도 있고 한반도와 만주에도 각각 있었다. 다음 다섯째 행은 “[]우점재 흥감 풍우, 혜윤 토전 ([]佑秥蟬 興甘風雨 惠潤土田)”으로서 한국신과 중국신이 함께 점재 땅을 도와서 제 때에 비를 내려 땅을 윤택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여섯째 행은“[][]수고 오곡 풍성, 도적 불기 ([][]壽考 五穀豊盛 盜賊不起)”으로 앞 행과 마찬가지로 오곡이 풍성하고 중국 도적이 침입하지 않게 보살펴 달라는 것이다. 일곱째 행은“[][]칩장 출입 길리, 함수 신광 ([][]蟄藏, 出入 吉利, 咸受 神光)으로서 악귀는 잠자고, 본인의 <들고 남>이 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들고 남>은 관직에 <들고 남>도 있지만, 황해 바다를 오가는 데에 있어서 뱃길이 편하게 해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평산군 신사비가 용강현에 세워진 것도 점재장으로 부임하는 백제 사람이 바다가 조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 영광을 두루 받고자 기원하는 것이다. 이 점재현장이 된 백제인은, 필경 이 곳에 신사를 세우고 굿을 한바탕 치르고나서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 백제의 낙랑군 점재현 땅에 가서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무사히 돌아왔을 것이다. 당시 점재현은 전한시대 [한서지리지]의 설명에 의하면 분려산으로부터 열수(列水; 今 渾河)가 탄열을 거쳐 서쪽의 점재로 오는데 그 위치는 요중현 자유타진(遼中縣 茨楡坨鎭)으로 비정한다.
이제까지 평양의 낙랑고분을 소위 중국식 고분으로만 해석하는 안일한 학문적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 중의 하나가 원강(元康)과 태강(太康)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벽돌 고분인데 주로 황해도에서 발견되었다. 고분 벽돌에는 각각 원강 원년, 원강 3년 3월16일 한씨(韓氏), 원강 4년 3월20일, 원강 5년 8월18일 을유일(乙酉日)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중에서 원강 5년 8월18일 을유는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원강 5년은 중국 동진 연호로 보면 295년이 되지만, 295년에는 8월 18일이 을유일이 아니라 병자일로서 9일이 차이가 지므로 원강은 백제 연호이며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은 5년, 10년, 14년 정월에 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다. 한편 고이왕기가, 사반왕기, 구이왕기에 의해서 조정되어야 하는데, 5년 기사는 사반왕의 238년 즉위 때였을 수도 있다. 사반왕이 2년을 재위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삼국사기]의 14년 기사가 고이왕 10년, 248년의 기사가 된다.
요양시 태자하 주위에서 발견되는 벽화고분으로 또한 태강(太康)년도 고분이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인 태강 10년은 중국의 연호로 보면 오로지 289년인데, 당시 요양은 백제 땅이어서 중국 사람의 묘를 쓸 수 없다. 필자는 백제 비류왕(比流王)의 후기 연호가 태강인 것으로 추정한다. 황해도 여러 곳에도 태강 연호의 고분(소위 낙랑 고분)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태강 7년 고분에서 일간지(日干支)가 밝혀져 있다. 신천군의 한 고분에서 다음과 같은 명전이 발견되었다. 태강 7년 3월 계축 작, 태강 7년 3월 28일 왕 작 이 두 명전은 한 짝이므로 3월 28일 계축일을 의미한다. 중국 동진의 연호인 태강 7년은 서기 286년으로서 3월 1일이 계축일이다. 즉 286년 3월 28일은 경진일이다. 따라서 황해도의 이 태강 연호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으며 당연히 백제의 연호다. 3월 28일이 계축인 병술삭 3월 중에 가능한 것은 오로지 고이왕 37년 270년, 332년 비류왕 29년 뿐이다. 동진(東晋)과 백제의 교류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동진의 태강(280-290)이 백제의 태강 연호를 쫓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비류왕 27년이 더 타당하다.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강(太康) 원년 3월 6일, 봉산군에서 태강 원년 3월 8일 왕씨, 태강 3년 7월 오씨, 신천군에서 태강 4년 3월27일의 명전이 나왔다. 특히 태강 4년 고분은 백제 제후의 고분 흔적이다. 태강 4년 3월 소명왕 장 조 太康 四年三月 昭明王 長 造 이 고분에서 소명왕은 백제 제후로 추정한다. 황해도 안악군에서도 태강 9년의 명전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태강 2년, 10년이 요양시내 북쪽 벽화고분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요양시 진출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이 요양시 벽화 고분들은 주제의 배열에서 안악3호분 백제 걸왕 동수(冬壽)묘와 아주 유사하다.
즉 구이왕,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때에 요양은 백제 땅이었다. 물론 요동왕 공손씨 시대부터 백제가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37년에 위나라가 요동왕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 건너 금주시(錦州市) 대릉하 동안에 백제 한군 태수(韓郡太守)의 허가를 받고 들어와 낙랑, 대방 2군을 두었다.
여기서 고구려 고분으로 확실한 유주자사 진(鎭)묘와 걸왕묘로 추정하는 동수묘를 비교해 본다.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주자사 진(鎭)묘 고분은 북벽의 글씨로 인하여 연대가 408년으로 밝혀져 있다. [][]군 신도현 도향(경) 감리 ([][]郡 信都縣 都鄕(敬) 甘里) 석가문불제자 [][]씨 진 (釋加文佛弟子 [][]氏 鎭) 사위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仕位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용양장군 요동태수 (龍讓將軍 遼東太守)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 진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使 鎭) 연 칠십칠 훙 (年 七十七 薨) 언이 영락 십팔년 (焉以 永樂 十八年) 태세재 무신 십이월 신유삭 (太歲 在 戊申 十二月 辛酉朔) 을유성천이 옥궤 주공상지 (乙酉成 遷移 玉櫃 周公相地) 공자택일 문제선시---이하 생략 (孔子擇日 文帝選時------下略) 신도(信都)는 [진서]에서 장락국(長樂國)의 현이지만 우리나라 평안북도에도 신도현이 있었다. 330년에 신도에서 출생한 진(鎭)은 귀족으로서 낳자마자 도향경 작위가 수여된다. 고향은 감리이고 성은 복성(複姓)이나 알 수 없으며 이름은 진(鎭) 외자이다. 이 성은 백제 왕족 부여(夫餘)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는 광개토왕의 391년 백제 정벌 때에 고구려로 투항하였다. 고구려는 이 진(鎭)으로 요동군 태수겸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을 제수하였고, 다시 용양장군 겸 유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진서지리지]에서는 유주 아래에 여러 군이 속해 있으므로 자사가 태수보다 상위직이다. 사리원 부근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묘는 백제의 대방태수 묘이다. 이제까지는 봉산군 대방태수묘가 한사군의 대방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결코 한사군(본래 한사군에는 대방군도 없다.)의 대방 땅이 황해도 봉산군 토성일 수고 없거니와 중국 대방태수라면 당연히 중국 연호가 있을 것이나 이 고분에는 연호가 없다. 한편 472년 중국에 사자로 간 백제 대방태수의 이름이 장무였다. 장무이는 468년경에 묻혔으므로 장무의 부형(父兄)으로 추정된다.
평안남북도 대동강 이북은 광개토왕에 의해 고구려 땅이 되었었다. 이후 황해도마저도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참살당하면서 고구려에게 넘어갔다. 이후 충청도 공주의 백제는 서진(西晉)과 동진(東晋)처럼, 북백제(北百濟)와 남백제(南百濟)로 논할 성질이다. 결론적으로 백제는 구이왕(仇台王) 때부터, 진사왕 때까지 요동반도의 중심인 요양을 다스렸다. 요동반도의 보란점시에서 발굴된 임예태수(臨穢太守) 관인도 백제 것이다. 중국에는 임예군이 없었다. 백제 비류왕(比流王) 때에 북한산성, 즉 개천 고사산산성에서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대방고지의 비류왕에 대한 한반도의 반란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