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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눈물〉 - 조국
그리스 신화에는 ‘니케’(나이키)라는 ‘승리의 여신’,‘디케’라는 ‘정의의 여신’그리고 ‘티케’라는 ‘운명의 여신’이 나온다. 그중에 ‘디케’를 소환한 조국은 지난 4.10 제22대 국회의원을 뽑은 총선에서 비례대표 의원 12명을 배출한 〈조국혁신당〉대표다. 조국은 문재인 정부 시절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고, 법무부 장관을 잠깐 지내기도 했다. 〈디케의 눈물〉이라는 이 책은 그의 변명집?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변명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그의 변명을 왜 읽어보려고 하는가?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원래부터 그런 동물이라는 것이고, 누구나 곤경에 처하면 자기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라는 것’ 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변명도 들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변명으로 일관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남는다. 4.10 총선이 끝난 뒤에 써졌다면 또 모를까 그전인 2023년 9월에 발간된 이 책은 자신과 측근들의 불리함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백할 것이다. 그런데 왜 눈 뜨고 볼 수 없을 변명을 들어보고자 하는가? 무슨 이유가 있을까? 지난번 총선에서 그는 윤석열 정부와 각을 세워서 나름대로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많은 변명을 내가 다 들어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여기 옮겨 볼까 그런 생각을 한다.
신문을 보거나 TV를 켜도 온통 정치판인 요즘 시대에 정치색인 이런 책을 읽기는 하지만, 어디 가서 “조국이 쓴 〈디케의 눈물〉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하기는 한다.
조국은 흙수저로 태어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 미국, 영국 등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문재인 정부 시절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일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법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전에는 서울대 법학과 교수였고,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언제나 ‘학인’이란 생각으로 공부만 했다고 역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다만 그는 이전 정부들 모두가 검찰이나 행정가 출신으로 민정수석비서관을 임명했던 것과 달리 대학교수로서 비서관이 되었다. 그것은 무소불위 혹은 너무 비대해진 검찰의 권력을 바로 잡고자 했던 문재인의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가진 권력’을 쉽게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생각 그대로 반대에 부딪혔고,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기는 하다.
평생을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온 원로 사제 함세웅 신부는 2023년 2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검찰 독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윤석열 정부가 무절제하고 무도한 검찰권·행정권 남용으로 삼권분립을 파괴하고, 국회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경찰 독재, 박정희 정권에서는 중앙정보부 독재, 전두환 정권에서는 군사독재였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은커녕 독재 정권에 부역만 하던 검찰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검찰 권력을 정리할 때가 됐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우리 민주화 세대의 마지막 시대 과업이다.”라고 말했다.
조국의 변명을 들어보면 “정치가 바뀌야 검찰공화국도 바꿀 수 있다. 미흡하긴 했지만, 공수처 설치, 검경수사권 조정도 정치가 이뤄낸 것이다. 예로부터 독재권력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무시한다. 다만 국민이 가진 투표권의 행사를 두려워할 뿐이다. 국민의 정치참여만이 ‘대한검국’을 ‘대한민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 검찰개혁 운동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 1장을 마무리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추진함과 동시에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 시민사회와 학계에서 ‘지방검찰청 검사장 직선제’도입을 주장해 왔다. 이는 미국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제도다. 검사의 임명 방식은 법률로 정하는 것이기에 국회가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선출된 검사장의 임기, 임명 절차, 검찰총장과의 관계 등은 논의가 필요하다. 주권자 국민이 선출한 권력에 의해서만 지배받는다는 원칙을 이제 실현할 때가 되었다.”
이상은 제1장 ‘대한검국의 등장, 괴물의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고, 제2장 ‘법을 이용한 지배 vs. 법의 지배’, 제3장 ‘변함없는 재벌공화국’, 제4장 ‘공감하는 인간들의 연대’로 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대로 저자인 조국의 변명을 꼼꼼하게 다 살펴볼 생각은 없다. 또한 지루하고 딱딱한 법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도 미리 짐작해 본다.
조국은 법을 전공한 학자이니 동서양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법학을 공부하고 연구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그 상황은 전도유망하고, 인간은 신이 국가에 퍼붓는 축복을 만끽할 것이다.”라고 한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고,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는 법으로 막아야 우리 인간이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자유는 법의 보호를 받아 최초로 성립한다. 이 세상에 법 말고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이 말은 로마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법이야말로 자유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라는 것이다.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시민과 자유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법이라는 것인데, 현실은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라고 한 마르크스주의 명제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철학자도, 위정자도, 국민도 법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지키기로 약속한 규칙이다. 그런데 그것을 집행하는 국가권력이 법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에도 있고, 세계 도처에서 비일비재하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물론 이명박 정권 때는 국정원이 대선과 총선에 개입했고, 박근혜 정부 때는 비선 세력이 국정에 개입한 것이 밝혀져 정권이 망했다. 문재인 정부 때도 법을 어기는 일은 수두룩했다. 조국 같은 똑똑한 사람들이 챙겼음에도 문재인 정부가 국정 운영에 실패하고 정권을 재창출 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만이었을지 모르겠다.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이 무죄를 받는 것을 보면서 정치의 무익함을 실감하지 않은 국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오늘(5.9) 가석방된다는 ‘최은순’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가 누구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장모이자, 김건희 여사의 어머니다. 〈디케의 눈물〉에 조국이 한 말과 ‘오마이 뉴스’기사를 한번 본다. 「2023년 7월 21일 ‘의정부지방법원’은 토지 매입 과정에서 총 349억원 가량이 저축은행에 예치된 것처럼 ‘잔고증명서’를 4차례 위조하고, 그중 한 장을 민사소송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제출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은순 씨의 유죄를 인정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런데 덜 알려진 사실이 있다. 2022년 7월 최 씨와 공범으로 기소된 동업자 안 씨에 대한 재판에서 재판부는 ‘위조사문서행사’범죄사실을 안 씨에게만 적용하고 최 씨를 배제한 이유를 석명(釋明-사실을 밝힘)하라고 검찰에 요구했다. ‘석명준비명령서’에서 재판부는 “법정에서의 증인신문 결과를 토대로 판단했을 때 최은순을 기소 대상에서 아예 제외한 것은 다소 의문이 있다. 그러한 판단 근거, 법정에서 관련자의 증언이 있은 후에도(검찰이) 별다른 조치를 취한 것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상세히 밝히기 바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조직 수장에 대한 수사를 미루고 미루다가 여론이 들끓자 수사를 전개했지만, 기소할 때 ‘위조사문서행사’부문은 뺐다. 재판부가 의문을 표시했음에도 추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대응이다. 최 씨가 윤석열의 장모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유화적 태도를 견지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디케의 눈물 중에서)
당시 ‘오마이뉴스’기사다.
「저축은행 잔고증명서를 위조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윤석열 대통령 장모 최은순 씨가 가석방된다. 법무부는 8일 오후 2시 ‘가석방심사위원회’를 열고 최 씨에 대해 ‘적격’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 중인 최 씨는 부처님오신날 전날인 오는 14일 석방될 예정이다. 만기일인 7월 20일보다 약 두 달 정도 앞서 출소하는 것이다. 법무부는 “대통령의 장모인 최은순씨 본인은 지난달 밝힌 바와 같이 ‘본인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국민이 우려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유지하였으나, 외부위원이 과반인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는 나이, 형기, 교정성적, 건강상태, 재범위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9명 심사위원 만장일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현행법상 유기징역을 받은 자가 형기의 3분의 1을 지내면 가석방될 수 있다. 최씨는 형기의 80%를 채워 형식상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 상태다. 법무부는 이날 최 씨 등 1140명에 대한 가석방 여부를 심사해 650명에 대해 적격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들은 법무부 장관의 허가를 거쳐 14일 오전 10시 전국 55개 교정시설에서 출소할 예정이다. 앞서 최 씨는 두 차례 가석방 심사 대상에 올랐다. 지난 2월에는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이어 지난 4월 심사에서는 ‘심사보류’가 내려졌다. 심사위는 심우정 법무부 차관과 권순정 검찰국장, 신용해 교정본부장, 윤웅장 범죄예방정책국장 등 내부 위원 4명과 김용진 법률구조공단 변호사, 조윤오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김대웅 서울고법 부장판사, 주현경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경식 강릉원주대 법학과 교수 등 외부 위원 5명으로 구성됐다.
검찰은 2020년 3월 최 씨를 사문서위조 및 행사, 부동산실명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구체적으로 2013년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4회에 걸쳐 모두 349억 5550만 원이 저축은행에 예치된 것처럼 ‘잔고증명서’를 위조하고, 동업자인 안 아무개와 공모해 도촌동 땅 계약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약 100억 원의 위조된 잔고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한 혐의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최 씨에게 모두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법정구속시키지 않았던 1심과 달리 2심 재판부는 지난해 7월 ‘죄질이 매우 나쁘다’라고 판시하며 법정 구속했다. 이 판결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2심 법정구속 당시 최 씨는 선고 직후 충격을 받은 듯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나를 법정구속 시킨다고”라고 재판부를 향해 소리치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난동을 부리던 최 씨를 여성 청원경찰 네 명이 각각 사지를 붙잡고 들어 올려 법정을 빠져나가게 됐다. 최 씨는 법정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건 절대로 안 된다, 가만히 있어봐라, 여기서 죽어버리겠다.”라고 소리쳤다. 당시 대통령실은 최 씨 법정구속 직후 “사법부 판결은 대통령실의 언급 대상이 아니다”라는 짧은 입장만 밝혔다.」
책을 읽는 나는 ‘검찰독재니, 정치검찰’이니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도,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지식과 도구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이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향을 갖고 있다. 정치권력을 쥐게 된 검찰이 모든 것을 검찰의 시각에서, 즉 수사와 기소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형벌권이라는 망치를 휘두르고 있다.”고 한 조국의 말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가진 도구가 망치뿐이면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고 한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한 것을 들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반년이 지난 2022년 12월 전국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과이불개(過而不改)였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2023년 작년에는 견리망의(見利忘義)를 뽑았는데 ‘이로움을 보느라 의로움을 잊었다.’는 뜻이다. 돌아보면 틀린 말 같지는 않다. 오죽하면 한동훈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토록 뛰어다닌 4.10 총선에서 국회의원 300석 중에, 108석만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조국은 〈디케의 눈물〉을 이야기하면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검찰수사 중 피조사자의 자살 발생원인 및 대책 연구」에 따른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에 검찰수사 도중 자살한 피조사가 83명이라고 하고 “법이 권력의 남용과 재벌의 탐욕을 규제하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면 존경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 사람들은 ‘법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고 하면서 법을 무시하고, 경멸하기 마련이다. 이제라도 법은 ‘정의의 여신’디케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힘, 이익, 선입견, 편견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한 저울질을 한 후 정의의 칼을 사용하는 여신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렇게 될 때 ‘국가는 시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억압과 차별의 도구로 작용할 때는 〈디케의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공정한 정치를 말할 때는 전통적으로 공정한 배분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고 요약되는 ‘배분의 정의’에 집중하게 되는데, ‘지배와 억압’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하고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막는 것이 바로 지배와 억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6세기 영국의 사상가로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 『유토피아』에서 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정의인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와 군주들의 정의인 “원하는 것을 다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를 대비시켰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지배와 억압을 해결하지 않으면 재화의 공정한 배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정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풀어내야 할 숙제라고 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중용(中庸, golden mean)을 취해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중용’이란,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대립하는 측으로부터 기계적·산술적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와 민주, 제국주의와 식민지, 억압과 자유 사이에서 ‘양비론’혹은 ‘양시론’을 펴는 타협은 중용이 아니라고 했다. 황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도금을 칠한 ‘중간치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용의 中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가 중용이다. 신영복 선생도 ‘방향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지남철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중용’이라고 했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공자가 말한 중용을 저울에 비유하고 ‘겸진만물이중현형(兼陳萬物而重懸衡)’이라고 했는데, 중용이란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어 헤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물의 관계와 인간의 행위를 두루 살핀다.’는 뜻으로 저울로 무게를 달 때는 저울추를 옮겨 주어야 양쪽이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것과 같다. 법원의 상징이 디케가 저울추로 균형을 맞추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형량의 기준’을 정한다고 해석되는 이것은 항상 ‘기계적이거나 형식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사회·경제적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것에서도 문제는 많다.
조국이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종종 써먹었다는 정약용에 대한 일화가 있다. 정조는 중앙요직에 있던 다산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자, 잠시 그를 보호하려고 외직인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내보냈다. 곡산에는 농민 이계심이 주동한 불법시위가 있었는데, 관에서 군포 대금을 200냥에서 900냥으로 대폭 올리자 이계심이 백성 1000여 명을 이끌고 곡산관아로 달려와 항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시위는 폭력적으로 해산되었고, 이계심은 수배자가 되었다. 곡산부사로 가는 다산에게 좌의정 김이소는 불법시위 주모자는 물론 적극 가담자까지 잡아 엄히 다스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정약용이 부임하는 길목에 이계심이 나타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10가지 내용이 적힌 문서를 전달하려 했다. 이에 관졸들이 바로 포박하고 칼을 씌우려 했다. 다산은 그를 묶지 말고 관아로 데려오게 했고, 사건을 검토한 후에 그를 ‘무죄방면’했다. 다산의 판결은 이랬다.
관소이불명자(官所以不明者)
민공어모신 줄이막범관야(民工於謨身 不以漠犯官也)
여여자 관당이천금매지야(如汝者 官當以千金買之也)
‘관이 현명해지지 못 하는 까닭은 민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간을 부리고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이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다.’는 뜻이다. 놀랍고 현명한 사상이자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에 시민은 움츠려들기 마련이고, 권력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다산은 이런 시민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것은 함석헌 선생이 말한 “깨어 있는 씨앗이라야 산다.”고 한 것을 이미 실천한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로 동학농민운동의 발화점을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감이 있다. 그는 곤장을 맞고 잠시 강진 고금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1898년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 법부의 민사국장으로 발탁되었다. 근대식 외관을 갖춘 ‘한성재판소’재판에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법대로’참형에 처했다. 이 재판의 배석판사가 바로 조병갑이었다. 그는 ‘법을 이용한 지배’에 충실한 도구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여생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이계심이나 동학도가 다시 나타났을 때 법률가들은 정약용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김이소와 조병갑 또는 을사오적의 길을 택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촛불시위 참석자,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인과 네티즌, 생존권을 위해 거리로 나선 노동자, 빈민, 영세 자영업자 등을 ‘민란을 꾀하는 폭도’로 취급한 권력자는 종종 있었다. 다산 같은 위정자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강경 진압을 외치는 김이소, 조병갑 같은 이들이 어깨에 힘주고 위세를 부리고 있다. 2008년 5월 쇠고기 파동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 하라.”2019년 9월 서초동 촛불집회 당시 윤석열 국민의 힘 대권후보는 “조국 사태 때는 참 의의가 없는 일이 있었다. 대검과 중앙지검 앞에 수만 명, 얼마나 되는 인원인지 모르겠는데 소위 말하는 민주당과 연계된 사람들을 다 모아서 검찰을 상대로 협박했다. 완전히 무법천지다. 과거 같으면 다 사법처리 될 일인데, 정권이 뒷배가 되어서 그런지 마음대로 한다.”이렇게 두 사람은 촛불집회 시위가 ‘헌법적 권리’라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조국의 변명을 옮겨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20세기 초 미국의 연방대법관으로 재직했던 벤저민 카르도조가 퇴임하면서 한 말은 큰 울림을 준다.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
일찍이 예수도 경고했다.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너희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고 있구나.”라고.
2020년 기준 우리 국민 1인당 국민총소득(DNI)이 3만 달러라고 하지만,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들은 여전히 형편이 빠듯하고, 삶이 팍팍하다고 느낀다. 곳곳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266대 로마 가톨릭의 현 프란체스코 교황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이런 상황에 대해 「교황 권고」라는 성명을 통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질타하고 ‘십계명이 인간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규제였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을 죽이고 있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고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십계명이 그것이라고 했다. 경제적 살인의 피해자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실제로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 직업병, 자살 등으로 죽어가고 있다.
기성세대는 물론 청년 학생들도 ‘88만 원 세대, 삼포세대’등 단어를 공유하며 위축되어 있다.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거나,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프리터족’이 늘어나고, 아예 일자리를 구할 의지가 없는 젊은이라는 ‘니트족’도 급증하고 있다. 겨우 구한 직장은 비정규직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의미도, 재미도 없다. 대부분 노동자들에게 오늘날은 생존의 몸부림을 쳐야 하는 서글픈 인생이다. “아프니까 청준이다.”(김난도)라 위로하기에도 미안하다. 일자리 문제, 주택 문제, 결혼 문제 등으,로 걱정하느라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다. 그러니 결혼도 않고, 애도 낳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군사 독재 종료 후에는 경제독재가 자리 잡았고, 윤석열 정권 출범과 동시에 경제독재를 공고히 하는 검사독재가 들어섰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행사하는 검찰의 힘은 두렵다. 채용과 해고를 통해 노동자의 삶을 결정하고 하도급을 통해 중소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재벌의 힘도 무섭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주권자 국민은 선출되지 않은 이 두 개의 권력 앞에서 위축된다. ‘검찰독재와 경제독재’‘검찰공화국과 삼성왕국’이 모두가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민주주의 핵심 중 하나는 ‘1인1표제’다. 한 표를 가진 주권자 한 명이 검찰이나 재벌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한 표 한 표가 모이면 달라진다.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와 ‘광장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면 달라진다.”조국이 외친 소리다. ‘우리는 더 부유해졌는데 더 불안해졌다.’면서 한 말이다.
조국의 눈은 날까롭고 따갑기까지 하다. “북한 정권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가 세습되듯이 삼성의 권력도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3대 세습되었다. 이 혈통에 따른 승계선에 있는 총수 및 그 일가에 대한 내부 비판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민주공화국의 원리는 ‘삼성왕국’의 성벽 앞에서 작동을 멈춘다. 삼성의 불법이 드러나면 수사기관도 머뭇거리고, 공소기관은 기소를 주저하고, 법원은 솜방망이 판결을 내리며 유죄판결이 나도 대통령은 특별사면을 해준다. 시장권력은 자신에 대한 비판도 교체도 용납하지 않는 성스러운 ‘마몬’이 되었다. 이 재물신 앞에서는 노무현도, 이명박도, 문재인도, 윤석열도 5년짜리 계약직 고용 사장일 뿐이다.”따끔한 일침이다.
삼성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한 故 이병철 선대회장의 유훈을 지켰다. 다른 대기업들 대부분이 노조를 인정하는 것과 달랐다. 노조 결성을 추진하면 개별 감시는 물론, 휴대전화를 복제해서 위치 추적을 했고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주어 마침내 해고했다. ‘무노조’정책은 그룹을 넘어 하청업체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전제군주와 다름이 없었다. 이건희 회장 마음속에는 자신이 왜 수사를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차원의 범죄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내가 이 나라를 먹여 살리는데…,’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주는 녹봉으로 먹고사는 신하 또는 하인이 노조를 만들어 왕과 대등하게 교섭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이랄까 2020년 5월 6일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무노조 경영 폐지’를 선언해 “저는 아이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이 1995년 베이징에서 ‘기업은 2류, 공무원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한 이후에 삼성은 세계 1류 기업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것에는 의문이 없지 않다. 권한만 늘리려고 해서는 1류가 될 수 없다. 현 이재용 회장 일가의 주식 지분은 2%에 불과한데도 ‘순환출자’라는 기법으로 삼성 전체를 재배하는 구조가 세계 일류 지배구조일 수 없고, 현재처럼 총수 1인에게 의존하는 경영방식과 지배구조가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2020년 비로소 폐기된 무노조 경영으로 인한 노조 역시도 변수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모순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마련하자는 것이 사회주의인데, 그 필요성을 색안경을 쓰고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과연 이상적인 접근일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회주의 논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랄 수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자본주의가 온갖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등사상’은 여전히 소중하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에게 평등의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는 우리 정치의 고민이다.
냉전, 전쟁, 분단 이후에 과잉 우경화되어 있는 정치지형을 생각하면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우리 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편향된 마르크스주의는 극복해야 한다. 1980년대 군사독재를 반대하며 민중운동권에 퍼졌던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거나 김일정 주체사상의 이론과 실천은 이제 현실 합리성을 잃었다. ‘사회’와 ‘회사’는 어순도 다르고 그 의미도 완전히 다르다. 사회는 민주 원리가 회사는 이윤 논리가 작동되는 곳이다. 회사가 사회 위에 서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오래전부터 나왔던 ‘자유권’보장만큼 ‘사회권’보장도 중요하다.
이제 한국사회 구성원이라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구성원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기본적 생존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부담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성장 최고, 효율 최고’라는 가치만을 신봉하며 같은 종족인 사람에게 자기가 키우는 개가 누리는 복리후생만큼 사회권도 보장하지 않으려는 우리 사회의식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다. 사회보장은 시민 자신을 위한 사회적 보험제도인데도 말이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며 개를 부러워하기만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 팔자가 상팔자가 되도록 의식과 제도를 바꾸어야 하고 키워 가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구직을 포기한 청년의 수가 50만 명에 달했지만, 정부와 보수언론은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시장 독점과 불공정 거래로 인해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외면하고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춰라.’고 한다면, 그것은 요원할지 모른다. 직장인이 평생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도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사기는 여전히 지난하다. 2020년 OECD는 한국에서 확대해야 할 장기임대주택은 전체의 8.9% 뿐이라고 했다. 162만 명이 부동산 6계급에 해당하는 비닐하우스, 움막, 지하방, 심지어 동굴에서 살고 있다. 고령화로 가족해체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효도만을 강조할 뿐, 노인복지는 취약하다. 왜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계급이 있는 것처럼 반려견, 애완견에도 계급이 있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개가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불허한다. 이런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귀족 개’를 키운다. 주인에게 학대당하는 개, 버려진 쓰레기를 뒤지는 유기견, 동족의 내장을 먹으며 사육되는 식용견 등은 ‘하층 계급’에 속한다. 하층 계급 개는 사람의 야만성과 비정함의 희생물이다. 보통의 애완견 또는 반려견이면 우리는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키고 목욕을 시키고 빗질을 해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또 정기적으로 전용 미용실에 데려가 예쁘게 다듬어 주고 동물병원에서 예방접종과 치료를 해 주며 순산을 위해 제왕절개 수술을 해주기도 한다. 이런 보살핌에는 당연히 비용이 드는데, 그 비용이 사람을 위한 경우보다 크다. 보통 남자 이발 비용이 대략 1∼2만 원인데 비하면 개털을 자르는 데는 그 두 세배가 든다. 진료비도 사람보다 비싼 경우가 많다. 사람보다 평균수명이 짧은(18년)개가 죽으면 화장하는데도 비용이 사람보다 네다섯 배 비싸다. 그만큼 비용을 부담하면서 개를 키운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규모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사이 치열한 갈등에 지쳐서 개와 교유하는 것으로 위로를 얻으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아무튼 사람 권리만이 아닌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2023년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고 하는 ‘동물보호법’이 여야 합의로 통과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스를 통해 「노란봉투법」이라고 여러 번 듣기는 했어도 그것이 어떤 법인지 아는 사람은 노동법을 연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친김에 이 법이 어떤 법인지 알아본다. 2014년 《시사인》의 독자인 주부 배준환 씨가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당한 노동자를 지원하는 데 써달라면서 아이 학원비 47,000원을 《시사인》에 보냈다. “해고 노동자에게 ‘47억 원의 손해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보냅니다. 47억 원은 듣도 보도 못한 돈이지만, 4 7,000원씩 10만 명이 모이면 되더라고요.”라는 편지와 함께였다. 10만 명 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돈을 보냈고, 이에 ‘아름다운 재단’은 ‘노란봉투 캠페인’을 전개했다. 가수 이효리도 이 캠페인에 동참했다.
이것이 파업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제한해야 한다는 ‘노란봉투법’제정 운동으로 번졌다. 배준환의 편지 이후 9년 만에 국회 보건복지위는 노란봉투법, 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노동쟁의 범위를 근로조건까지 넓히며 노조의 손해배상 인정을 귀책 사유와 책임 비율에 따라 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와 고용노동부는 이 개정안을 반대했지만, 법원행정처는 손해배상을 의무자별로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책임 범위를 정하도록 한 것은 ‘근로자 개인에게 과다한 배상책임이 부과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입법 취지에 공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고 2023년 6월 15일 대법원은 노란봉투법 취지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려 이 법이 통과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노동으로 살아간다. 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 그냥 임대료를 받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노동을 꺼린다. 노동이 기본권이듯 노동조합 만드는 일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온갖 난관에 부딪힌다. 전교조 때도 그랬다. 유럽에서는 소방관도 노조를 결성하고, 노조활동을 보장한다. ‘뉴딜정책’을 펼쳤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내가 공장에 가 일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는 사람들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더 쉽게, 더 어렵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법을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것에서 미국을 찬양하는 우리가 미국 대통령의 이런 주장은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노동자 희생을 강요하고 그것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룬 권위주의 체제의 유산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다. 심지어 노조 설립 저지를 위한 대항마 육성이라는 것까지도 있었다. ‘귀족노조’라고 하면서 비난하기도 한다. 철도노동자 파업시 19년 근속자가 연봉 6,300만원 받는 것이 정말로 귀족노조인가? 임금이 하향평준화되어 모든 노동자가 ‘노동천민’이 되는 것이 제대로 된 세상인가? 연간 수십억, 수백억을 받는 진짜 귀족, 재벌 임원에 대해서는 비난은커녕 당연시하고 부러워하면서 왜 노동자의 연봉을 비난할까? 2013년 중앙대에서 청소노동자들이 비인격적 대우와 업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한 적이 있다. 이들은 철도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으므로 파업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정부와 보수언론은 이들 편을 들었을까? 어림없는 애기다. 더 서글픈 것은, 중앙대 총학생회가 파업으로 인해 학교의 브렌드 가치가 하락한다며 ‘이 문제는 중앙대와 관계 없는 하청업체의 일일 뿐’이라고 했다. 미래의 노동자가 자신을 자본가 또는 경영자와 동일시하여 현재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업무방해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해 2023년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손해배상소송은 진행 중이다. 대학생들이 사회 공감능력이 이다지 약해졌다는 사실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단지 국민소득만 높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하여 조국의 말을 가감 없이 듣고 읽어봤다.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아니다 싶은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맺는말’에서 “스스로 처렴상정(處染常淨 - 더러운 곳에 살지만 항상 깨끗함을 유지한다)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전혀 말할 수 없다.”하면서, “나를 냉정히 돌아볼 때 실력이나 기여에 비해 과대평가되어 왔다면서 대중적 노출이 많은 정치 전선에 서다 보니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자기변명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교수라고 해서 조선 시대 스승에 대한 존중이란 유교관념 때문인지, 엘리트가 부족했던 상황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2012년 대선을 거치면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고, 그 후에 정치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진보의 과제이며 연합정치를 통해서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고, 몇 번의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게 되고, 평택 재보궐선거에서는 김득중(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최고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를 특히, 좋아한다면서 그의 책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지식인의 역할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근본주의적 태도로써 그 모순을 초극하는 것이다.”그는 문재인처럼, 노무현처럼, 노회찬처럼 현실을 뒤로 하고 돌아서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는 4.10총선에서 12석이라는 국회의석을 확보했다.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민족통일이라는 과제를 생각할 때 여전히 민족주의는 소중한 가치지만,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 사회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이 시대에 폐쇄적 민족주의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대의정치와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촛불시민’으로 표상되는 직접민주주의의 중요성도 잊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어느 순간 ‘갈림길’과 ‘막다른 길’을 만났다고 하면서, 힘들고 지쳐서 무너질 것 같은 때가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퍼붓는 폭우를 같이 맞으며 위로와 격려를 해 준 시민들, 벗들, 동지들 덕분에 견디고 버틸 수 있었다.”고도 했다. 마지막에는 ‘봉산개도 우수가교(逢山開道 遇水架橋)’라고 한 《삼국지》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는데,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 건넌다.’는 말이다. 나도 그 말이 좋다.
부산에서 두 분 선생님이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혜광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대 법대로 진학해 미국과 영국 유학도 다녀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그가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왜 할 말이 없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앞이 말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고, 할말 다하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루터 킹 목사의 이 말을 들어보면서 마칠까 한다.
“날지 못하면 뛰어라. 뛰지 못하면 걸어라. 걷지 못하면 기어라. 무엇을 하든 계속 전진해야 한다.” - 2024.5.15.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