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건축 현장 끌려온 백성들, 아리랑으로 슬픔 달랬대요
1395년에 지은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으뜸 궁궐이에요. 경복궁은 북악산을 등지고 있는 데다 정문 앞엔 육조거리가 펼쳐져 있었어요. 육조거리는 지금의 세종로를 말하지요. 조선 왕조의 중심이었던 이곳이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완전히 없어졌어요. 그 후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에서 생활하며 정치를 펼쳤어요. 경복궁을 다시 세운 사람은 흥선대원군이에요. 경복궁이 사라진 지 270여년이 흐른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왕과 왕실의 위엄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조선의 정치적인 상황은 세도정치(조선 후기에 특정한 가문이 권력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던 정치 형태)로 몸살을 앓고 있었어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사람들이 높은 관직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그들은 왕을 대신하여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어요. 순조·헌종·철종은 왕의 권위를 잃고 허수아비처럼 지내야 했지요.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얻게 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로 추락한 왕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왕실의 위엄을 보이려 했어요. 그걸 위해 왕실의 상징인 궁궐을 으리으리하게 다시 지으려고 마음먹은 거예요.
경복궁을 다시 짓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필요했어요. 흥선대원군은 전국 팔도의 남자들을 부역으로 동원해 공사에 참여토록 했고, 재상 이하의 모든 관리는 능력에 따라 원납전이라는 이름의 기부금을 내도록 했어요. 백성에게도 기부금을 내게 해 그 액수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기도 했지요. 원납전으로도 공사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당백전이라는 돈을 새로 만들어 유통시키기도 했고요.
경복궁 중건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대원군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밤마다 횃불을 밝히고 노래판을 벌였어요. 바로 이때 백성들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주장도 있어요. 전국에서 뽑힌 일꾼들이 고향 떠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음을 슬퍼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게 '아이랑(我離娘)'이라고 해요. 또는 부역에 끌려온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고 부른 '아난이(我難離)',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에서 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뜻의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말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