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창시한 파성 설창수(59)
리명길이 문협 진주지부장 시절 한 일 중에 뚜렷한 것의 하나는 개천예술제 백일장 시조부문 일반부 장원자를 이화여대 이태극 교수가 주재하던 계간 <시조문학>의 추천 작가로 인정받게 한 일이었다. 이 점은 리명길이 오늘날 경남 지역의 시조시단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의 근거가 되어준다.
리명길의 곁에는 그의 경상대 제자 김호길(전 대한항공 조종사, 시조시인, 현 L.A 거주) 전의홍(시조시인, 경남도민일보 칼럼니스트), 박평주(시조시인, 작고, 전 마산여상 교사), 강남구(소설가, 초등교사), 이영성(시조시인, 전 대아중 교사) 등이 있어 늘 머리를 맞대고 시조의 방향 설정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한때는 시인 신찬식이 끼여들어 특유의 지론을 펴기도 했다.
리명길은 평소 그의 행동에 두 가지 지향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나는 '정의'(正義)이고 하나는 '낭만'(浪漫)이었다. 어떤 모임이나 어떤 단체에 관여하게 되면 그곳에 사사로움이 끼여 들거나 불의가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상대학교 교수 재직시절 그의 연구실에는 늘상 교수들의 출입이 잦았다. 무슨 무슨 연구비 수혜에 있어 형평이 깨졌으니 문제를 삼아 달라는 교수, 예산 편성에서 특정 학과가 불이익을 받았으니 바로잡아 달라는 학과장 등등 발언권이 약하다 싶은 교수들은 그의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리명길은 학장(경상대가 종합대가 되기 전 복합대 시절)이 주재하는 교수회의에서 머뭇거림없이 문제를 제기했다.대체로 바른 소리 했다는 때가 많았지만 어쩔 때는 '작은 정의'를 건드리다 '큰 정의'를 만나서는 낭패를 보기도 했다.리명길은 정이 많아서 불문곡직 읍소하는 약자 편을 들다가 오히려 스스로에게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파성이 "리명길이 정의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장 서는 사람 아닌가"라 질타할 때도 리명길의 '정의감'을 거론했었다.
리명길이 호주가이고 또 낭만파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는 진주시내에서 선후배간에 아는 사람이 제일 많고 아울러 지인들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문인협회 일로 동행하다 보면 길거리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성님'이거나 '동생'이다. 그는 파성이 다닌 진주농업학교 출신인데 그 학교는 동창의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니까 선후배간의 관계가 끈끈하다 보니 리명길처럼 걸출한 동창을 보고 그냥 지나가는 동창은 없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찌 동창뿐이겠는가?진주지역의 각종 사회단체 인사들도 리명길과 일정부분 영역이 맞물리는 부분이 있을 터였다. 스포츠이거나 언론사이거나 대학이거나 문화예술쪽이거나 층위도 다양하고 관심도 다채로왔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리명길의 낭만적 기질에 대해 말하려 하는데 이야기가 빗나갔다. 그는 술자리가 넓은 데서 벌이는 여흥에는 반드시 마이크를 잡았다. <라콤파르시타>나 <베싸메 무쵸>의 약간의 이국적인 리듬을 애호했다. 그는 키가 크므로 댄싱에 들어갔을 때 외관상 손색이 없었다.
대학내 개교기념 축제때 가요제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는 반드시 그곳에 리명길이 있었다.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가면 학생 관중들을 압도했다. 역시 <라콤파르시타> 또는 <베싸메 무쵸>였을 것이다. 발 스텝은 마이클 잭슨의 기초동작은 따라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도 한 번 올라가면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지 . 환상에 젖기도 했다. 필자가 부르는 <고향에 찾아와도>나 <삼팔선의 봄>류를 를 가지고는 리명길의 그 멋진 스텝이나 동작을 따라갈 재간이없다는 판단으로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래 하루는 필자가 리명길의 스포츠 취약 종목인 탁구를 선택하여 필자에게 도전해 보라고 큰 소리를 쳤다."그래 한 번 해보자"하며 필자가 이끄는 대로 배영초등 옆에 있었던 탁구장으로 따라 들어왔다.필자는 중학교 2학년때 교내 체육대회 학급 탁구선수로 잠시 뛰었었다. 그 실력이면 무방비 상태의 리명길의 바닥 기량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