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11일 목요일>
중남미라는 세계(世界)
서구적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났던 중남미의 역사가 어떻게 보면
중남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관을 탄생시킨 것 같다
-가브리엘 G 마르케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1
산다는 꿈
깨어있는 줄 알았는데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눈만 떠 있다고
깨어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그럼 꿈이 맞을까
과연 깨어날 수 있을까
언제 깨어나고 싶을까
어디에서
아무 것도 모른 척 사는 것도
다시 잠들 수도
2
*《그날, 우리가 몰랐던 중남미 세계사》
-윤장훈 지음/팬덤북스 2023년판
가볍게 읽는 중남미(中南美) 역사와 상식
여행 중 포켓북으로 배낭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수시로 꺼내서 읽으며 자투리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을 것 같다.
‘머리가 이렇게 빨리 자라는 동안, 나는 배움을 게을리 했다. 지식이 없는 머리에 머리를 단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벌로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머리카락보다 지식이 더 아름다운 장식이기 때문이다.’
-후아나 이네스 수녀
(《그날, 우리가 몰랐던 중남미 세계사》, 11월 12일 <멕시코의 이네스 데 라 크루즈 수녀 이야기> 중에서)
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가진 후아나 이네스 수녀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이 책 11월 23일 편을 보면, 멕시코 음악의 왕 알프레도 히메네즈가 사망한 날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멕시코 역사에 길이 남을 ‘란체라의 왕’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그의 말년에는 인기, 재력, 모든 것 가졌음에도 삶의 공허함을 느낀 그가 <삶은 아무 가치도 없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이 책에는 1년 365일을 일별로 구분해서 남미의 거대한 영토를 가진 브라질, 아르헨티나부터 시작해서 조그만 나라인 수리남까지 중남미 아메리카 대륙에 산재한 약 30개국의 과거 주요 역사나 정치적 사건, 축제, 인물, 문물, 잇슈 등, 역사와 정치, 문학, 예술(음악과 미술),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에 걸쳐 간략한 지식들을 조그만 흑백사진과 함께 번갈아가며 소개하는데, 어릴 적 상식에 관한 흥미로운 백과사전을 읽는 것 같은 소소한 즐거움을 전해 준다.
이런 책들은 아직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이미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제약이 얕아짐에 따라 오래전부터 지구촌화된, 세계의 일상을 날마다 이웃으로서 함께 하고 있다는 공감대 형성과 공존의 기쁨을 공유하는데 일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라나는 세대와 이웃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깃든 관심을 여전히 지니고 있을 기성세대들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할 부류의 책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며, 서두에서 잠시 소개한 멕시코의 후아나 이네스 수녀의 ‘독서와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갈 길이 먼 것이다.
3
중절의 배
-김혜순
빛에 민감해졌다
빛이 스칠 때마다 피 맺힌 입술을 잡아 뜯었다
검은 커튼을 이마에 치고 식탁 앞에 앉았다
빛이 고문 경관처럼 정수리를 잡고 비틀었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포동포동한 주먹이
나 대신 빛에 꼬집히고 있었다
변덕이 심해졌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굳게 결심했지만
좋았다가 싫었다가 무서웠다가 기운이 없어졌다
감정 과다 충동 장애가 생겼다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는 프랑스가 낙태를 허용하기 전 네덜란드로 낙태 여행을 가는 여자들이 나온다. 중절 수술 후 그 여자들이 암스테르담 운하에서 배를 타고 관광을 했는데, 그 배를 중절의 배라고 불렀다. 중절의 배를 타고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빈 자궁의 허망한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아기들은 꺼내져 불에 타고, 여자들은 배를 타고 운하를 내려갔다.
말하다 말고 침이 흐른다
콧물이 길게 떨어진다
우는 건 아닌데
너무 오래 암막 커튼을 치고 살았나
머리에서 문득 수사슴처럼 나무가 올라온다
나는 암컷인데
나무에 아기 심장이 맺힌다
심장이 익는다
포크와 나이프를 던지고 뛰쳐나간다
내가 뛰면 옆에서 터널이 한 개 같이 뛴다
터널이 울며 따라오다가 매우 길어지기도 한다
아기를 뗐는데도 아기가 떼어지지 않는 여자가 달려간다
터널을 지나면 아기가 떼졌다가
터널에 들어가면 다시 붙는다
네덜란드에서 출항한 레베카 곰퍼츠의 배, ‘파도 위의 여성들’은 낙태가 금지된 나라의 임신한 여자들과 의사와 간호사들을 싣고 공해로 나간다. 그 배가 낙태 금지 국가의 항구에 잠시 정박하면 배에 승선한 성모마리아가 제일 먼저 ‘내 자궁은 나의 것’ 플래카드를 들고 나간다. 그러면 그 나라의 건장한 남자들은 배를 둘러싸고 떠나라 떠나라 주먹을 흔든다. 여자들의 네덜란드는 파도 위에 있다.
빛에 민감해졌다
피부가 시멘트에 쓸리듯 빛에 쓸리면 피가 배어 나온다
봄을 맞은 나뭇가지 위에 침 흘리는 조막만 한 아기 심장들이 열렸다
<斷想>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또 하나의 세계’라는 문구(文句)가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계 말고, 그에 비견되는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의미 같았다. 물론 여간해서는 안 보이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그런 세계. 그 세계는 아마 오랜 세월이 가져다 준 덕지덕지 낀 때를 우리의 인식이라는 창문에서 벗겨내야 보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어쩌면 그 또 하나의 세계는 여성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 이래 역사는 온통 남성 위주로 전개되어 왔고, 남성이라는 존재 곁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의 의미로 묻혀 온 여성들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언젠가 난 두 눈 벌겋게 뜬 채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세상의 한가운데서 오싹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에 대해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절대 고독!
그건 여성에 대해 잘 모르거나 어쩌면 대놓고 무시하는 어느 남자의 태연자약한 발언 때문이었다. 무지는 어쩌면 죄악이자 개인에게서는 공포일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모를 것 같았다.
모든 여성에게는 그 동안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라는 정원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그 정원은 남성들의 오만과 독선 탓에 쉽게 열리지 않은 채 지금껏 비밀리에 혹은 신비스럽게 유지되어 왔다. 그 세계를 아는 사람도 없지 않다. 아는 사람이 있으니 책이나 구전을 통해 혹은 문학작품으로 전해져 왔을 것이니 말이다.
난 이 지구라는 행성에 걷잡을 수 없는 종말이 다가오기 전에 남성에서 이제 여성으로 주도권을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 줄곧 해오고 있다. 세상사가 구질구질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쉽지는 않겠지만……. 시인 김혜순의 시집 《날개 환상통》에 실려 있는 <중절의 배>라는 시 작품은 이런 시각에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품 <중절의 배>는 시인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에 수록되어 있음. 문학과지성사 2024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