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의 <파초와 잠자리>가 어린 때부터 인사하고 지내던 이병연의 시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면 정작 정선의 경우는 어떤가.
겸재 정선이 시를 소재로 그린 그림은, 특기인 진경산수도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그러나 겸재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홍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인 이상 그가 남긴 시의도 수 역시 결코 적지는 않다.
과연 그 가운데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절친한 친구인 이병연의 시를 소재로 그린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자 대화가이면서 둘도 없이 절친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십분 인정하며 존경하던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천은 그림에 관한 한 겸재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시인 사천은 당시 그림을 많이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매번 그림을 살 때마다 겸재에게 먼저 보이고 그가 ‘좋다’는 말을 하면 그때서야 이를 구입했다고 전한다. 반면 겸재는 겸재대로 5살 위인 대시인에게 시에 관한 모든 것을 일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데 겸재의 기록을 보면 1712년 금강산에 가 금강산 진경산수화를 그렸을 때 그림 하나하나에 대해 사천이 시를 지어 붙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만든 《해악전신첩》은 당시 장안의 문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서로 이를 빌려보려고 다투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겸재 그림에 사천의 시를 쓴 작품은 이후에도 여럿이 있었다. 이를 보면 겸재는 그림 말고 시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분을 사천에게 일임했던 것으로 추측해보게 된다. 실제 이런 추측을 믿게끔 해주는 자료도 있다. 겸재 그림에 사천이 시를 쓴 부채 그림 <야계상봉(野溪相逢)>이다.
정선 <야계상봉(野溪相逢)> 견본수묵 29x61cm 개인
이 그림은 진경산수와 달리 남종화풍의 산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산이 둘러서있는 호젓한 산간에 계곡이 지나가는 구도로 전형적인 남종화적 세트이다. 하지만 겸재는 산을 중앙에 집중 배치하고 계곡은 구름과 안개에 감싸인 듯 여백으로 남겨 두어 산이 구름속에 떠 있는 듯이 신비롭게 연출했다. 이 사이로 작은 띠풀 집이 한 채 보이는데 여기가 무대이다. 무대에는 두 사람의 노인이 점을 찍은 듯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눈길이 그림 한 쪽에 적인 시구로 가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사천이 직접 쓴 사천 자신의 시이다. 시의 내용은 산골 생활의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말해주는 것이다.
野客將溪叟 야객장계수
相逢尺徑分 상봉척경분
指頭何所見 지두하소견
千嶂一空雲 천장일점운
성밖 사람과 산골 노인
서로 만나 좁은 산길에서 헤어지네
손가락은 어느 곳을 보라 가리키나
산봉우리에는 하나 가득 구름만인 걸
시 옆에 시 주인의 호를 새긴 ‘一源(일원, 사천의 호)’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그리고 반대쪽에 그림 주인의 사인 ‘謙齋(겸재)’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글씨마저 사천 글씨이다. 이를 가지고 보면 겸재는 그림을 마친 뒤 바로 붓을 떼고 나머지를 모두 사천에게 내맡긴 것은 아닌가 하고 상상해 보게 된다.
시는 모두 사천에게 일임하듯 그림을 겸재에게 모두 맡긴 듯한 사천의 육성을 전해주는 자료가 있다. 1741년 겨울에 사천이 겸재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이 어느 한 때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라는 분담의 생각 끝에 이를 실천해보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여정겸재 유시거화래지약 기위왕복지시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아시군화환상간 경중하언논가간
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시출간장화휘수 부지수이경수난
辛酉仲春 槎弟 신유춘중 사제
나와 정 겸재 사이에는 시와 그림을 주고 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무슨 말로 경중에 값을 매기겠는가
시는 간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두르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
신유 봄에 사제
이병연 서찰 <시거화래(詩去畵來)> 1741년 지본묵서 24.4x35.3cm 간송미술관
편지의 신유년은 겸재가 양천 현감에 부임한 다음 해로서 겸재의 나이 66살이고 사천은 71살이었다. 글 가운데 사천은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실천해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아이들처럼 ‘시와 그림 어느 쪽이 더 힘든지 내기해 볼까’라는 듯이 읊고 있다. 글에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꿔온 두 사람의 짙은 우정까지 엿보이는 데 덧붙여 시는 자신, 그림은 겸재임을 서로 인정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사천이 이런 편지를 보내자 편지 속의 시를 첫 번째 시로 여겨 겸재는 약속대로 그림을 그렸다.(나중에 이때의 시와 그림이 한데 묶여《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이 됐다)
정선 <시화상간(詩畵相看)> 1751년경 견본담채 29.5x26.4cm 간송미술관
<시화상간도(詩畵相看圖)>라는 제목의 그림은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중의 한 점이다. 그림에는 커다란 옹이가 박힌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에 두 노인이 그림인 듯한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마주 보고 있다. 등을 보인 노인 뒤에는 큼직한 바위가 있고 또 오른쪽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즉 나무와 바위 그리고 물에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 연출되고 그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화면은 두 사람의 의복 선과 두루마리 그리고 바퀴살처럼 펼쳐진 소나무 잎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옅은 먹을 살짝 눕혀 쓴 듯 부드러운 터치로 일관돼 나무와 바위가 만들어내는 아늑한 공간과 잘 공명하고 있다.
오른쪽 소나무 가지 아래에 겸재 필치의 시가 적혀있다. 시구의 내용은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아시군화환상간 경중하언논가간)’으로 사천이 지어 보낸 칠언절구의 1,2구를 옮겨적은 것이다.
겸재가 적은 시구와 관련해 한마디 곁들이면 겸재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화제나 낙관이 간결, 간단하다는 점이다. 당시는 시와 서와 그림을 사대부가 갖춰야할 일체화된 교양으로 여겨지기 시작해 그림 속에 긴 낙관이 등장하던 때였다. 그래서 이렇게 간단한 겸재의 낙관에 대해 여러 설왕설래가 있었다. ‘겸재는 그림과 달리 글씨가 약했다.’ 또 나아가 ‘공부가 짧아서 그랬다’라는 등등의 추측이다.
그러나 이는 겸재의 장기인 진경산수화와 일반적인 남종화와 동등하게 놓고 보고서 한 착각일 수 있다. 겸재 진경산수는 실경을 그린 그림인 만큼 달리 화제가 들어갈 여지가 적다. 그래서 겸재도 자신의 간단한 사인(낙관)에 지명 정도를 적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이처럼 시가 들어 가야할 경우와 같은 때에는 제대로 붓을 들어 개성 있는 글씨를 써 보인 적이 적지 않다.
각설하고, 겸재는 사천과의 약속대로 그가 시를 보내오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천의 시를 테마로 했다는 점에서 이 그림 역시 시의도의 범주에 속한다. 《경교명승첩》은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됐으며 그 내용은 양천 팔경과 한강 일대의 명승을 사천이 시로 읊으면 이를 겸재가 시각적으로 해석한 그림들로 구성돼있다. 그런데 이 화첩을 시의도 화첩으로 부르기 애매한 점이 있다. 이는 <시화상간>처럼 사천의 시구를 그림 속에 다시 옮겨 적은 사례가 이외에 2점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사천의 시를 따로 남겨 나중에 그림과 나란히 표구했다. 그렇게 친다면 《경교명승첩》은 시의도 화첩이 아니라 시화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시화상간>으로 돌아가 그림 속의 두 사람 중 누가 겸재이고 누가 사천인가를 살펴보자. 어릴 때부터 절친했던 두 사람 사이지만 사천이 다섯 살이 많다. 그런데 그림 속 인물은 모두 수염이 덥수룩하게 그려져 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쪽 노인 수염이 조금 더 인상적이란 정도이다. 옆에서 봐서 그런지 성글게 보이고 약간 늘어져있어 바람에 날리는 듯인상이다.
여기서 당시의 문인, 화가들에 대한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기록을 보자. 『일몽고』를 보면 사천은 키가 큰 데다 수염이 멋있고 또 용모가 훤칠했다고 한다. 대시인답게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 먹기 전에 시를 몇 수 지을 정도로 시의 생활화가 습관처럼 익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평생 지은 시가 3만수를 넘는다고 했는데 시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심사숙고하고 끈질기게 읊조려 나온 것들이라고 했다.
신정하(申靖夏, 1680-1715)는 같은 김창흡이 지도하던 낙송루 시사의 후배였다. 그는 사천이 시 짓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글을 남겼다. 사천은 시 한 구를 만들 때마다 ‘반드시 수염 서너 터럭을 만지작거리면서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가 공교로운 대신 수염은 화를 당해 길어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규상과 신정하의 증언을 고려하면 두 노인 가운데 누가 사천이고 누가 겸재인지 자명해질 듯도 하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