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이란 무엇인가?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 월암스님에게 듣는다.(1)
전현자
기자)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출가하신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인가요?
스님) 어린 나이에 절집에 인연이 되어서 출가 동기라고 말할만한 일이 거창하지 않습니다. 제 고향이 경주인데 중학교 2학년때 불교학생회를 만났습니다. 1970년도 양력 9월 2학기 시작되면서 경주 분황사에서 첫 법회에 참여했습니다. 저의 은사스님인 불심 도운 큰스님께서 주지스님이셨는데 이때가 난생처음 절에 가고 법문이란 걸 처음 들은 때였습니다.

문경 한산사 용선선원 선원장 월암스님
은사스님께서 한글 게송을 안내하셨는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 하여 도 생각하는 마음 잠깐인들 잊으리까” 라는 말씀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 게송이 어린 저에게 폭풍처럼 강렬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듯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시원하고, 수많은 세월을 넘어서는 듯한 충격을 어린 나이에 받았습니다. 이때 제가 ‘대장부가 태어나서 갈 길이 이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바로 집에 연락해서 행자생활을 시작하면서 학교는 반정도만 가게 되었습니다. 반학생 반행자로서 이때부터 절에 머물렀습니다. 불교학생회를 다니면서 이중,삼중의 역할을 하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출가 동기란 게 특별히 없고 이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불교적으로 전생사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5살 꼬마가 무얼 알겠습니까? 이 때 저는 당차게 스스로의 길을 알아본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만 3년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두 곳의 생활을 신나게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신심이 컸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공부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불교학생회장도 하고 승복을 입고 등교를 하곤 했습니다. 학업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으며 고2까지 다니고 나서는 생사해탈을 위해서는 학교는 휴학하였습니다.
이후 경주 남산 칠불암에 올라가서 암자에 혼자서 생식하면서 10개월 남짓 공부를 하였으며, 낮에는 염불하고 저녁에는 참선하였습니다. 노스님께서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이 참선을 늘 주장하셨습니다. “이 뭣꼬”하고 앉아있으라 하셨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기도, 염불을 하였죠. 하루에 8시간 이상, 밤에는 2~3시간 앉아서 달빛에 신심을 발휘하며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면서 꽃과 나무, 새들이 같이 관세음보살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온천지가 관세음보살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밤에는 “이뭣꼬” 하는 생각을 하며 참선을 하고 있으면 경계가 사라집디다. 어떤 때는 산이, 어떤때는 나무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공부가 실제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이런 체험을 한 것이죠. 몇 개월을 불국, 천상에 사는 즐거운 느낌을 가졌으며 당시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른 스님들께 깨달았다고 말씀을 드리니, 스님들께서는 학교 공부 더하라고 꿀밤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때 내 주변에 공부하던 스님들이 계셔서 인도를 해주셨으면 진척이 더 있었을텐 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들의 제안에 따라 1년 후 다시 복학하여 졸업을 하려고 갔더니 학교 공부가 너무 시시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졸업을 하고 나서 선방에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엔 절에 일이 많아서 은사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시봉하면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이것이 제 출가와 출가 이후 사미시절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의 간단한 내용입니다. 동기랄 것을 다시 짚어 보면 그 게송의 말씀이 저를 크게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초5학년때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도서실이 새로 생겼는데 도서출납을 담당하며 늦게까지 있었는데 이 안에 있던 책들을 매우 많이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대부분의 책을 다 읽었습니다. 이 중 가장 감동적인 책이 석가모니, 사명대사, 서산대사 원효대사 등의 위인전이었습니다. 원효, 서산대사의 고행장면이 특히 크게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불교가 뭔지 모르는 시기에 이미 도를 닦는 것이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경주중에 가서도 불교 철학 쪽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이 아마 그 법문에 제가 강하게 반응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생에 뭔가가 연결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입니다. 이때의 신심은 정말 지금과는 비교할 바 없이 강력했습니다.
기자)제가 보기엔 가장 근본적인 이유에서 출가의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강원생활은 어디서 하셨습니까.
스님) 강원을 가려고 했는데 갈 수 있는 정황이 못되었습니다. 선원을 가려했는데 어르신들이 선방에 가서 공부할 게 뭐 있나 하시며 시봉하면서 배우라 하셔서 여기서 하게 되었습니다. 강원을 안갔다고 안강출신이라고도 합니다.
기자)구체적으로 선불교를 공부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지요.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공부를 하셨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제가 군에 가기 전에 마곡사 선방 원주 노릇을 했습니다. 이때 틈만 나면 선방에 가서 앉았습니다. 이때가 참선과 선원의 연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봉자 현자 노스님을 모시고 보은사로 가서 참선에 대해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리곤 백양사로 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강원과 선방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때도 원주 소임을 맡았는데 강원을 기웃거리며 틈틈이 배워 명예 강원졸업장을 받았습니다. 4년간 배울게 아니라고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선원에도 틈틈이 가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군영장을 받고 부처님께 그간 시봉과 공부로 지쳤고 군에 가서 쉬도록 DMZ에 배치되거나 영어를 배우게 카투사로 배속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30사단 사령부에 떨어졌는데 군법당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사형 보광스님이 계셨습니다.
보광스님은 얼마 후 제대하시고, 후임으로 오신 법사께선 법문하기에 적당하지 않으셔서 제가 이를 내내 담당했습니다. 3년동안 저는 승복을 입고 살게 되었습니다. 약 천 몇백 번이 될 정도로 법문을 많이 했습니다. 사단사령부라 고학력자들이 많아 일주일에 한번 하던 법문에 더해 주중에 공부를 더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이를 리드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공부를 매우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대승, 천태, 화엄, 정토, 선불교까지 이론까지 군대에서 강학의 배움이 많이 깊어지게 되었죠. 강원에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였고, 법회를 하면서 대중 앞에 서는 연습도 많이 되었습니다.
에피소드로 일요일 법회를 주관하는데 사단장이 왔습니다. 그때 사단장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법사님은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어서 제가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여 법문을 열심히 하였는데 사단장께선 군종병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초빙한 스님인줄 알 정도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나중에 군종 참모께 그 스님이 누구냐고 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감동한 사단장으로부터 일주일의 포상휴가를 받았습니다.
3년간 중노릇 제대로 하고 나온 것이죠. 이 시기가 제 인생에서 법문과 강의의 실기의 기본을 쌓게 된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강원에 가지 않은 시간을 보중한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후 참선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 도움을 청하셔서 서울 서초구 대성사에 총무겸 주지대행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데 이때 제가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면도 소고기 스프 들어간다고 안 먹고 법문하고 신도 가정방문하고 너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방에서 참선할 시간도 없었지요. 은사스님의 독특한 사례를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차 안에서 기차 아래를 지나가면 뭐라 하실 정도로 별나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모시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몸무게가 57킬로까지 내렸습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 부모님들이 계셨고 병원에 가서 진단했더니 영양실조, 과로, 과신경이었습니다. 이후 1,2년 요양하니 몸이 나아졌습니다. 부산에서 신도가 집을 한 채 내어주었고 이때부터 포교를 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제가 군 제대 후 30대 초반이었습니다. 3년간 중국어를 배우고, 양산에 신도의 도움으로 암자를 세웠습니다. 다음날 신도들에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참선을 해서 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3년만 말미를 주면 중국에 들어가 고승들을 뵙고 공부를 하고 오겠다고 말을 드렸습니다. 34살에 중국에 들어가 2년 6,7개월간 전 중국을 돌아다니며 고생 엄청하면서 교통도 불편하고 산적도 있을 시기였고, 치안도 엉망이었던 시간을 지나 예전 선종의 역사에 등장하는 도량들을 참배하고, 그곳에 계시는 큰 스님들을 모두 뵙고 참선을 같이 하고 법의 문답을 했습니다. 그 큰스님들은 모두 한결같이 겸손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거의 200여 곳이 된 것 같습니다. 도교의 선사들이나 기타 도인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의 6,70년대와 같아 거의 고행이나 다름없는 시간들이라고 기억합니다. 이 시간들이 저에겐 많은 만남과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후 돌아가 혼자 공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경에 가서 대학의 교수들을 만나서 참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경험을 쌓은 얘기를 하니 학교에서 공부를 더 하셔서 선학을 전공하시면 어떻겠냐고 제의했습니다. 한국에 와 신도들에게 물으니 반대하여서 저는 신도를 다 잃더라도 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판단해 북경 문화대학에 들어가 3년간 학부과정을 마치고, 북경대 철학과에 들어가 석사, 박사과정을 했습니다. 책 전체를 다 외워 강의하는 수준으로서 매우 깊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학도로서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장학금도 받고, 돈오선을 주제로 박사를 따게 되었습니다. 12년의 생활을 보내고 2001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 공부는 끝이고 죽을 때까지 참선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기자)중국에서 많은 공부를 하시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시겠다고 결정한 가르침이 뭐였습니까?
스님)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진여선원에서 참선을 하다가 참선 중에 마조어록을 열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조어록 중 수중월이라는 구절에서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거 칠불암에서의 경험과는 또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이때 기분을 담은 게송을 적기도 했습니다. 이때 스스로 공부해도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중국스님들을 만나던 중에 결국 사람이 부처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부처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내가 부처로 살아야 하고 모두를 부처로 섬겨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은 중학교 때 처음 큰스님께 들었던 내용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학생회, 부인불자회, 등산법회 등 천진과 북경에 많은 모임을 만들고 이 과정 중에 중국 공안(경찰)에 많이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당시 입버릇처럼 독립운동하러 온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행히 북경대 소속 학생이었고 승려라는 점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계속>
월암스님과 인터뷰중인 필자

첫댓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