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시절이 없는 늙은이.
이 말은 논리상 맞는가, 틀리는가?
나한테는 맞다.
나는 1949년 1월 말쯤에 태어났다.
나는 키 작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컸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없다.
쌍둥이였기에 젖을 제대로 못 먹고 컸기에 유년시절이 없었을까?
동생은 나보다 몸집이 훨씬 컸고, 떼도 잘 써서 암죽(젖 대용으로 쌀밥을 으깨어서 만든 죽)을 안 먹었단다. 아무래도 순한 큰쌍둥이가 암죽을 더 먹을 터.
젖을 덜 먹었다고 해서 유년시절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한자때문이다.
幼年時節.
'어린시절'로 썼더라면 좋겠다.
우리말인 '어렸을 때'라고 쓰면 더욱 좋을 터.
나는 '어렸을 때', '어렷을 적'이라는 말을 쓴다.
이런 이유로 나한테는 '유년시절'은 없다.
유년은 아래에서 어떤 단어를 골라 써야 하는가?
乳年, 幼年.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을 썼으면 싶다.
중국말인 한자어라도 쉬운 단어로 말하고 글 썼으면 싶다.
우리말이 있는데도 유식한 체 중국말(한자어)를 쓰는 사람을 보면 고개가 흔들어진다.
더우기 괴상하기 짝이 없는 사자성어, 중국고사로 말하고 글 쓰는 사람을 보면 쥐어박고 싶다.
무식한 나는 전혀 알아들을 재간이 없기에.
수십 년 전의 일화다.
서울 한강교 너머 하숙집에서 생활할 때였다.
영어학과에 다니는 친구한테 영어 단어를 말한 뒤에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친구는 전혀 대답하지 못한 채 '그런 단어는 듣지도 못했어,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말했다.
내가 '촌사람은 다 알어, 농사꾼들도 다 아는 말인데...' 라면서 '스미치온, 파라치온, 이피엔' 등을 주욱 나열했다. 농약 이름을 도시에서 산 친구가 알랴? 농사꾼이나 아는 농약이기에.
남의 말과 글인 한자, 한자어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지난해 나는 서해안 산업단지 조성사업으로 산소를 수용당해서 이십 개의 무덤을 파서 새로 이장했다.
무덤마다 상석과 비석이 딸렸다. 열댓 개의 비석은 온통 한문 문장. 나는 전혀 해석할 수가 없다. 지명과 이름만 알 뿐 그게 무슨 내용인지 해석불능이었다.
나는 1949. 1월 생이기에 1956년부터 학교 다니기 시작해서 일흔 살인 지금까지 60년이 넘게 책을 읽는다. 소위 책벌레이다. 그런데도 한자로 된 문장은 읽지 못한다. 나한테는 아무런 쓸데도 없는 남의 나라 글자이다.
빗돌은 한 세대 이전 사람인 아버지, 할아버지 등이 쓴 글인데도 나는 읽지 못한다. 내가 이 지경이니 내 자식들은 오죽이나 할까? 나한테는 그냥 비문(碑文)은 석공예 장식품에 불과하다.
일전, 시골에 내려갔을 때 후배가 지방 문화역사에 관한 책을 냈다며 나한테 선물했다.
그 책 속에는 1909 ~ 1912년에 리정(지금의 마을 리장)이 쓴 공문들을 보았다. 내 증조부가 면사무소에 제출한 공문서이다. 한자 문장에 우리 한글로 토씨를 붙였다. 100년 전의 문서인데도 나는 읽을 재간이 없었다.
100년 뒤인 지금은 한자 대신에 한자어를 한글로 쓴다. 한자어이다.
그런데 앞으로 100년 뒤에는 이 한자어조차도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다.
요즘 내 자식들이 쓰는 말에는 요상한 외국말, 외래어, 조어(엉터리로 만든 말과 글자)가 숱하게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그림을 합성한 글도 있다.
한문을 모르는 세대이기에 이상한 문장으로 글 쓴다. 한자어가 많은 문장이다.
예컨대 '푸른 창공'이다.
푸르다는 의미가 든 단어가 창공이다. 이 앞에 왜 또 '푸른'이란 형용사를 써야 하는지...
'대통령 부인 000 여사님'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여자를 의미하는 '부인'이 있는데도 '여사'를 썼다.
단어가 겹쳤다는 뜻이다.
그냥 쉬운 우리말로 말하고 글 쓰면 이런 어색함을 줄어들 터.
어떤 단어가 눈에 띄였다.
'긴이자 하나'.
이 단어를 보고는 한참이나 멍했다. 이해불능이기에.
글 전체를 읽었을 때서야 글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이의자'.
왜 이럴까? 자기 글을 쓸 때 다듬지 않았다는 뜻이다.
'해 질녘'이란 문구도 보았다.
'질녘' 이 무슨 뜻?
우리말 바로쓰기 책을 펼쳐보고서야 뜻을 알았다.
'해질녘'의 단어를 잘못 썼다.
'해질녘'이라고 붙여 쓴 것도 있고, ' 해 질 녘'으로 떼어 쓴 것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해질녘'으로 붙여 썼으면 싶다. 하나의 단어로 보고 싶다.
이와 반대되는 말은 '해뜰녘'이 되겠지.
우리말을 글로 쓰려면 무척이나 어렵다는 하나의 예이다.
2.
나는 청소년 시절이 별로 없었다.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5학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서해안 벽촌으로 우리나라 6대도시인 대전으로 전학갔기에 어린시절, 젊은날의 이야기는 별로다. 1960년의 대전 생활, 1960년대 말의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나는 농촌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별로 만들지 못했다. 수십 년 뒤에서야, 퇴직한 뒤에서야 시골로 내려갔으나 이미 늦었다. 늙은이가 되었기에 어린 때에 가졌어야 할 느낌, 생각들은 다시 얻지 못했다.
1950년대의 농촌마을의 느낌, 1960년대의 가난했던 산골마을의 생활상을 조금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젊은날인 1970년대의 시골의 정서는 2017년인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아쉽게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에 쓰던 옛말은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다. 배우지 못했거나 배웠어도 초등학교, 중등학교가 고작인 사람들이 쓰는 말은 많이 사라졌고, 변질되었다.
하나의 예다.
내가 사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온 때는 1974년 여름철이다.
이때부터 등잔불, 촛불은 사라지고 대신 전기불(100왓트)을 켰다. 전기가 들어왔기에 마을에 흑백 텔레비젼이 한두 대씩 들어왔다. 나중에는 전화기도 들어 왔다. 새로운 문명의 세계가 펼쳐졌다. 아쉽게도 구시대의 말(생활물품)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내가 젊은날에는 일제의 잔재가 남았기에 일본말을 제법 썼다. 쓰루메(오징어), 벤또(도시락), 요잇땅(달리기 출발 신호), 간스메(통조림), 바께스(양동이) 등 지금은 숱하게 사라졌다. 안 쓰기에.
나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좋아한다.
한자, 한자어보다는 우리말과 우리글이 훨씬 쉽다. 자연스럽고.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기에. 귀로 들어도 그 뜻을 금방 알아먹을 수 있기에.
그런데 한자어는 아니다. 소리는 하나인데도 뜻은 40~50여개가 수두룩한 게 중국말이다.
내가 한 세대 전인 아버지, 두 세대 전인 할아버지 시대에 썼던 글(한문투성이)를 읽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내 친구들은 집에서 만든 검정바지를 입고 초등학교에 다녔다.
우리집 머슴(일꾼)할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짚신을 삼아서 신고 다녔다.
양말도 없는 맨발로...
나는 한문을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한자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별로 쓰고 싶지도 않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12월까지 대전에서 한문선생 밑에서 붓글씨 쓰며 한자를 배웠다.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오셔서 신문지에 붓글씨 써서...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문을 가르치는 노인은 오지 않았다. 내 한자 교육도 끝이 났다. 물론 학교에서는 한문시간에 있어서 한자를 배우기는 했지만 그거야 조금뿐이었고...
대학입시에 바빴기에 한자 교육은 그다지 매력적인 공부는 아니었다.
2017. 7. 4. 화요일.
저녁밥 먹자.
나중에 보태고..
첫댓글 언어 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뀌고 있습니다 한자한문 세대의 구학문 을 지금와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소모되는
나이살 밖에 없습니다
한글이 발전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갈수록 외래어 가 판을 치고 남이 잘알지 못하는
말을하면 유식해 보이는 사대부적정신들 누구탓을 하리요 온갖잡동사니 말 알아듣기만 해도 다행인것이
다문화 가정이늘고 외국 유학중
인가정도 있고 해서 남탓할 일
아닌듯합니다
우리말을 배우려고 외국인이 많이 한국에 와 있습니다.
이들은 쉬운 말도 힘들어 하는데 한자말은 상상도 못하겠지요.
쉬운 우리말을 다듬어서 하나의 자원으로 활용하면 돈이 되겠지요.
국가품격도 높아지고요.
남북한 인구에 해외 동포를 포함하면 최소한 8,500만 명쯤 한국말을 쓸겁니다.
세계 언어 대국에 속하지요. 그런데 정작 우리 현실은요?
외국문자, 외국말, 괴상한 조어(새롭게 만드는 엉터리 말과 글)로써 장난치지요.
문학인이 조금은 우리말과 글을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런 글 씁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