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1장 1-10절
설교제목 : 삶의 실험
챗지피티(Chat GPT)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김남경 선생님의 어머님께서 2년여 시간 암투병을 하시고, 지난 주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영혼이 안식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어머님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기를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만남도 어렵지만, 이별은 늘 서툴고 낯설어서 어려운 듯합니다.
최근에 해외와 국내에서 가장 큰 이슈는 거대 언어 모델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 GPT)입니다. 사전 학습된 대화형 인공지능Conversational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방대한 사전 학습 정보를 기반으로 질문에 답을 하며, 인간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논문의 얼개도 짜고, 소설의 줄거리도 만들고, 작곡이나 작사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지혁명의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거짓 정보와 합성 데이터가 섞이면 이를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이 없는 사람은 무분별하게 거짓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답을 제시하는 것은 정보의 효율성과 처리의 측면에서는 유익할 수 있지만, 사유를 위한 시간적 머뭇거림은 배제되어 새로운 창조적 산물을 산출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정신적 현실과 미묘한 감정적 세계까지 다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급변하는 문명 앞에서 가끔 씩 멀미가 날 때도 있지만, 나의 한계를 늘 직시하면 인간의 됨됨이를 잃지 않고 살맛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금주부터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이천년여 동안 기독교 세계관에서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생애주기라는 원형적 드라마를 지켜왔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삶의 주기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C.G. 융은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원형적 드라마는 더 높은 운명에 의해 변환된 한 사람의 의식적 삶-의식을 초월한 삶을 포함하여-의 사건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C.G.Jung, “A Psychologica Approach to the Trinity”, CW11, para.233]고 했습니다. 탄생, 성장, 죽음, 부활은 모든 생명체가 걸어갈 생명의 리듬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으로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체현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희생으로 낡은 것을 극복하고 씻어내는 시간입니다. 자발적인 희생은 심리학적으로 의식적인 개성화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희생당하면 그것은 병리적인 퇴행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희생은 고통을 통한 부활, 재탄생을 가능케 합니다. 사순절 절기를 통하여 자발적인 희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요구
사순절 5주와 종려주일까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부터 십자가 사건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제자 둘을 보내서 심부름을 시킵니다. “너희들은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왜 이러는 거요?’ 물으면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고 말하여라.” 제자들은 일러주신 대로 시행하고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이 구절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은 참 난처한 심부름을 시키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서 이런 일을 만일 시킨다면, 당장 아버지 미치신 거 아니냐고 펄쩍 뛸 것입니다. “남의 새끼 나귀를 그냥 끌고 오라니요!” 심부름을 성실하게 이행한 제자들도 대단하지만, 순전히 그 나귀 새끼를 내어준 나귀주인도 놀랍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낯설고 무리한 요청 앞에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신뢰함으로 기꺼이 응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살면서 낯선 방식으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요청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했던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이성적이고 감정적인 가치판단을 내려놓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내적 충동에도 이런 것들이 유사하게 게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삶 속에도 우리 안에서 어떤 공상과 관념들이 일어나고 그것을 요청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들을 잘 응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 내가 의식적인 확고함과 무의식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그것은 실현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충동에 희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낯설게 요청받고 있다면 그 사건은 새로운 전환을 위한 마중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라하실 때 가보고, 쓰겠다 하실 때 기꺼이 내 줄 수 있는 무모해 보이는 신뢰로 새로운 길을 열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귀를 탄 예수
새끼나귀를 가지고 오기는 바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입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걸쳐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스가랴의 예언과 맞물려 있습니다.
“크게 기뻐하라! 시온의 딸아! 예루살렘의 딸아! 보라, 네 왕이 네가 임하리니, 그는 의로우며 구원을 베풀고, 겸손하여 나귀를 타며,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신다”(슥 9:9)
스가랴는 메시아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귀는 곧 메시아를 운반하는 본능적 요소로 여호와와 관계있는 신성한 리비도를 대변합니다. 그런데 고대에 이런 당나귀는 음탕함의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에게 속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디오니소스적인 망아경, 성, 술에 취한 상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당나귀는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의 상징으로, 살인, 거짓말, 잔인성, 악마 등의 원리를 인격화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귀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끈기 있고, 겸손하고, 참을성 있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동물로서 간주되었습니다. 새끼 나귀는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인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는 로마시대 왕과 귀족이 탔던 준마의 위풍당당함과 화려함, 권력의 과시함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려함에 도취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때로 과시욕으로 한껏 자신을 부풀리며 살고자 합니다. 폼생폼사해야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부실함과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두려움과 불안을 감추기 위해 힘을 과시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여러분, 명품 옷 걸친다 해서 영혼의 누추함까지 가릴 수 없는 법입니다. 궁궐 같은 집에 산다고 해서 영혼의 만족과 평안까지 보장할 수 없는 법입니다. 자아의 시작과 끝이라는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나치게 높이 있거나 지나치게 낮게 있게 됩니다. 그러면 중심을 잃고 수축과 팽창의 양극단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그 말씀을 겸손하게 실행했습니다. 오버하지 않고, 위축됨 없이 나귀를 타고 운명의 길을 이행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오버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축됨 없이 나의 한계를 직시하며 우리에게 주신 길을 결연하게 이행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삶의 실험
예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여 자기들의 겉옷을 길 위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엄청난 열렬한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예루살렘이 이 일로 소란스러웠는지,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냐(마 21:10)”라고 떠들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소동’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에세이스테(ἐσείσθη)로 지진이 일어나 요동할 때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일종의 삶의 토대를 뒤흔드는 요동이 소동이라는 말의 뉘앙스입니다. 물리적 요동이 아니라 정신적 요동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이는 예수의 출현과 입성이 불러오는 현상입니다. 신성한 힘이 자아의 성채에 들어올 때 엄청난 요동이 일어납니다. 내가 가진 기존의 토대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영적 왕국을 실현하시는 주님의 입성은 우리 자신을 뒤흔드는 사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나를 뒤흔들어 새로운 영적 왕국을 내 안에 실현하는 시간입니다. 겸손하게 나귀타고 오시는 주님을 나의 중심으로 모시는 일입니다. 자아의 욕망을 넘어서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 각 개인에게 부과된 운명과 소명을 이해하고 이를 실현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한 개인으로서 예수의 편에서 보면, 예루살렘 입성은 모험이자 실수입니다. 예수님은 무의식적 군중에게 왕의 투사, 메시아의 투사를 용인하여 모험을 감행합니다. 이전에는 이런 일을 공생애동안 보이신 적이 없었습니다. 한 개인이 이런 엄청난 투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히 팽창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팽창의 위험을 감수합니다. 이런 팽창으로 성전에서 채찍을 들고 화를 분출하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왕으로의 입성은 죽음을 예고하는 길임에 분명했습니다. 권력자들은 반드시 예수를 죽음을 몰고 가서 처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수가 걸어갔던 위대한 예루살렘의 입성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리스도는 그가 분명한 확신에 따라 진리에 헌신한 삶을 살았던 삶 전체가 무서운 비전(환상)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정말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진솔한 실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보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충분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부활의 몸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실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수를 피한다면 여러분은 살 수 없을 것입니다.”[C.G. Jung, Speaking, p108-109. 로렌스 자피 지음, 심상영 옮김, 융심리학과 영성, p24재인용.]
의식적으로 자신의 길을 아는 자만이 이 실험을 감행하고 실수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용기있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통하여 기꺼이 실수할 수 있는 용기로 진솔하고 신실한 실험을 해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