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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최우수상-후박나무/윤봉중
펄벅기념관에 가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네가 한 사람 있다. 노인네 나이에 비해 색상이 좀 야하다 싶은, 핫 핑크색 재킷을 걸치고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다. 목걸이 명찰을 걸고 있는데, 명찰이 마치 태극무공훈장이라도 되는 양 뒷짐을 지고 다소 거오하게 서 있다. 그 노인네가 바로 나다.
문화해설사! 이 일은, 내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해온 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일이요 긍지를 갖는 직함이다. 노년이 내게 준 깜짝 선물이요 늘그막에 얻은 홍복이다. 하지만, 나는 펄벅에 대해서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고, 그녀의 작품도 <대지> 외에는 읽은 게 없다. 또한, 그녀의 고국인 미국이나 그녀가 사십 년 동안이나 살아 고국이나 다름없다는 중국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로 문화하고는 거리가 먼 촌뜨기다.
이런 내가 펄벅기념관 문화해설사라니! 그렇긴 해도, 세상살이에 이리 차이고 저리 밟혀, 자코메티의 조각 ‘걸어가는 남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헐쭉해진 내 몰골이, 기념관이라는 어감이 풍기는 예스러운 이미지와 어울림 직하기는 하다. 육이오 때 놀라고, 보릿고개 때 배곯고, 아이엠에프 때 데고, 주식에 투자하다 깡통 찬, 아픈 내력이 내 얼굴이나 몸, 어딘가에 화인처럼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야 나는 펄벅의 70여 작품을 찾아서 읽고, <대지 삼부작>보다 더 크고 두툼한 ‘펄벅평전’을 훑어보며 말깨나 하는, 유식한 문화인 문화해설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부천 시니어클럽에서 관장하는 문화해설사의 선발 기준은 ‘노인 일자리 만들어주기 사업’의 취지에 맞게 단순하고 아주 인간적이다. 면접이라는 요식을 치르긴 해도, 부천시에 적을 두고 있는 65세 이상 노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신체가 건강하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조금 부실해도 눈감아주니 다분히 친노적(親老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무(三無)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절대적 조건이다. 삼무란, 첫째, 돈푼깨나 나가는 어연번듯한 집이 없어야 하고 둘째, 돈푼깨나 받는 그럴듯한 직장이 없어야 하고 셋째, 돈푼깨나 되는 보수를 받았으면 하는, 돈 욕심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나도 삼무에 속한다. 주식에 투자하면서 돈푼깨나 나가는 대지 60평짜리 너른 집을 일찌감치 없애버렸고, 아이엠에프 때 그럴듯한 직장에서 쫓겨나 마누라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백수요, 책 욕심은 있어도 돈 욕심은-욕심낸다고 더 주는 것도 아니고-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없이 사는 노인네’라야 한다. 이걸 두고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 하던가. 하지만, ‘없이 사는 노인네’라고 해서 마음까지 가난하거나 옹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라고 했듯, 홀가분하게 삼무의 삶을 살다 보니, 저절로 삼락(三樂)을 얻게 되었다. 삼락이란,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 열면 마음에 맞는 손을 맞이하고, 문을 나서면 마음에 드는 산천경개를 찾아가는 세 가지 즐거움을 일컫는데, 조선조 유학자인 신흠(申欽) 선생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을 말함이다.
펄벅기념관은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성주산 자락에 집필에 몰두한 작가처럼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소설 <대지>로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는 세계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 평생을 바친 인도주의자요 박애주의자이다. 여사는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태어난 혼혈고아들의 양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미국에 ‘웰컴 하우스’를 창설하고, 그녀도 일곱 명의 혼혈고아를 입양했다. 그 후, 혼혈아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펄벅재단’을 설립해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한국에는 1967년, 현 펄벅기념관 자리에 사재를 털어 ‘소사희망원’을 건립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냉대받고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전국의 많은 혼혈아와 전쟁고아들이, 이 시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시장 중앙에 높이 170㎝, 폭 45㎝ 크기의 산수화가 한 폭 있는데, 그녀가 80회 생신 때 소사희망원 예전 원생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산수화 뒷면에는 소사희망원을 거쳐 간 2,000여 명의 원생 중 1,030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쓰여 있다. 그 명단에는 혼혈가수 인순이를 비롯하여 윤수일, 박일준, 함중아 등 유명 가수들 이름도 들어 있다.
올봄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을 나온 날이었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노란 유니폼을 입고 나비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를 것 같은 앙증맞은 나비들이었다. 활짝 핀 철쭉을 배경으로 깜찍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는 손에 손잡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로 전시장 안은 금세 시끌시끌해졌다. 초상화 속의 펄벅 여사가 활짝 웃으며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자, 내 주위로 아이들이 나비 떼처럼 모여들었다. 나는 유리진열장 안에 전시된 펄벅 여사의 유품인 머리핀을 가리키며 애써 부드럽게 얘기했다.
“이 자그마한 머리핀은 펄벅 할머니가 앞머리에 꽂고 다니셨던 머리핀인데…….”
“할아버지! 할아버지 머리는 왜 하얘요?”
아까부터 내 등에 기대고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한 아이가 불쑥 내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다. 유치원 햇살 반인 내 손녀 또래의 아이였다.
“그건 말이야, 왜냐하면…….”
아이의 뜬금없는 행동과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머리가 허연 펄벅 여사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펄벅 할머니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거란다.”
“……우리 할아버지 머리는 까만데….”
“…….”
나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말대로라면, 그 아이 할아버지는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호연아, 그건…… 호연이 할아버지는 머리를 까맣게 물을 들여서 그런 거란다.”
아이들 뒤를 따라다니던 인솔교사가 얼른 나서 거들어주었다. 멋쩍어진 나는 아이를 향해 ‘봉숭아학당’의 영구처럼 헤벌쭉 웃어주었다. 또 다른 아이는 내 이마와 얼굴에 굵게 파인 주름살을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면서,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요?" 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내가 기념관 해설사가 아니라 유물이 된 느낌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거실에 있는 큰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까맣던 머리는 된서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허옇게 바랬고 이마의 주름은 밭고랑처럼 언틀먼틀 깊고 굵게 파였다. 윤곽도 희미해진 눈썹에는 흰 터럭이 성깃성깃 돋아 있고, 안경 너머 두 눈은 밤샘 문상이라도 하고 온 듯 퀭하다. 길고 깊이 파인 팔자 주름과 굵은 실로 꿰맨 듯 꾹 다문 입술은 몽니가 잔뜩 난 고집불통처럼 보였다.
한동안 허우룩한 눈길을 거울에서 거두지 못하고 서 있던 나는 서름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뭔가 알 수 없는 서러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서러움은 우울함으로 번져갔다. 노년에 찾아드는 우울증은 어떤 질병보다 무섭다. 어떻게든 나를 달래야 했다.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로해줄 것인가. 무릇,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것은 사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참모습이 아니다. 참모습을 보려면 심안(心眼)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자책이 아닌 자애(自愛)의 눈길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머리는, 삶의 긴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달려온 마라토너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이다. 이마의 굵고 거친 내천(川)자 주름은, 삶의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이요, 삼성(三星) 장군의 계급장이다. 흰 눈썹은, 마량(馬良)의 백미요 출중함이다. 움푹 들어가고 퀭한 두 눈은, 사려와 분별, 삶의 지혜가 그득 고인 웅숭깊은 혜안이다. 입가의 팔자 주름은, 지난한 삶을 경영해온 CEO의 관록이다. 꽉 다문 입술의 한일자는, 생(生)과 멸(滅)이 하나로 꿰어 있어 둘이 아니라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다…….
내 얼굴은 먹색 하나로 그릴 수 있는 묵화가 아니라, 수십 가지 색을 짜내 짓뭉개고, 셀 수 없이 덧칠하고 덧칠해 그린 유화다. 단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시가 아니라, 주저리주저리 사연이 많은 산문인 것이다. 비로소 나는 위안을 얻었다. 머리를 염색하느냐 마느냐, 하는 햄릿의 고민도 끝났다. 자랑스러운 왕관을 왜 검게 물들여 망가뜨릴 것인가.
이제는 혼혈아라는 비칭은 사라진 지 오래고, ‘다문화 가족’이라고 부른다. 펄벅기념관에서도 다문화 가족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매주 금요일에는 ‘오감으로 떠나는 펄벅 여행’이라는 체험학습을 시행하는데 장애아동들이 그 대상이다. 펄벅 여사에게도 장애아가 있었다. 딸, 캐럴은 정신연령이 서너 살에서 멈춘 정신박약아였다. 여사는, 장애아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을 깨고자 장애 아이를 낳아 기른 어머니의 체험으로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썼다. 훗날 ‘가장 힘들게 쓴 소설’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속에 묻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그 자체가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라고 토로했다.
펄벅 여사가 소사희망원을 건립한 때가 그녀 나이 75세였다. 소사희망원 개원식 때 “오늘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말한 그녀는, 인터뷰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40년 전 아니 10년 전보다 더 사회적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일흔 이후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했다.”
“노년은 남은 생애, 여생이 아니다. 늙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늙음이 가져다주는 지혜는 오래 묵힌 포도주처럼 깊고도 그윽하다.”
“저물어간다는 것은 깜깜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다.”
전시장 입구 공원 언덕에, 제법 키가 큰 후박나무가 기념관 지붕을 이윽히 내려다보고 서 있다. 잎이 무성한 가지를 널찍하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의 넉넉한 품새다. 후박나무는 수종이 다양해 다 자라면 키가 20m가 넘고 둘레는 1m가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 후박나무에는 잎자루에 다섯 개 혹은 일곱 개의 두툼한 잎사귀가 달려 있는데, 마치 사람 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릴 적 아픈 배를 밤새 문지르면서 ‘내 손은 약손’이라고 하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 같다. 녹색의 윤채 나는 색상은, 피로한 눈과 마음을 금세 싱그럽게 해주고, 타원형의 넓적하고 긴 잎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오지랖 넓게 사방으로 죽죽 뻗은 가지에는, 낮에는 새들이 내려앉아 쉬어가고 밤이면 돌아와 편안하게 깃을 튼다. 5~6월에 피는 연노랑 꽃은 연꽃처럼 청아하고 소담스러우며, 은은한 향기는 멀리까지 퍼져 나가고, 9~10월에 맺는 빨간 열매는 물론, 줄기와 뿌리의 껍질(후박피)까지 한약재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원목은 가구나 선박재로 널리 쓰인다. 후박나무는 온몸을 아낌없이 내준다. 이와 같이, 후박(厚朴)나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후박나무는, 펄벅 여사의 후덕(厚德)한 인품과-꾸밈없이 검소하고 진솔한 삶을 산-질박(質朴)한 성품을 그대로 닮았다.
펄벅 여사의 헌신, 희생, 박애 정신을 계승하려는 듯 공원 곳곳에서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후박나무를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의 혼과 기를 받아 좋은 글을 쓰고 싶고, 자애로운 성품을 본받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한, 펄벅기념관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는 ‘펄벅평전’이 되어 자상하고 해박하며, 전기수(傳奇叟*)처럼 입담 좋은 문화해설사로 기억되고 싶다.<끝>
수필 최우수상 당선소감…윤봉중
내게 수필은, 저녁 밥상에 오르는 밥이요 된장찌개요, 한 잔의 반주다. 밥은, 여든여덟 번의 손을 거친 입쌀을 충분히 불린 다음, 압력밥솥에 쪄낸 존득한 쌀밥이요,
된장찌개는, 멸치와 다시마로 잘 우려낸 육수에 재료를 넣고 끓인 다음, 양념을 반술 쯤 넣은 된장찌개다. 경상도 며느리가 전라도 시어머니한테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배운, 구수한 손맛이 나는 된장찌개다.
반주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음풍농월하며 옥반가효(玉盤佳肴)에 마시는 만전향주니 두강주니 하는 비싼 술이 아니라, 일용직노동자들이 땀내나는 현장에서 마른안주로 마시는, 구멍가게에서도 파는 소주다.
내게 수필은, 아련한 추억과 애환이 배어 있는 삶의 역사이되,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실(史實)은 아니며, 화가가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지, 사진사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찍은 사진은 아니다.
내게 수필 쓰기는,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잘 경영했는가?
부족함은, 수필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시니어문학상’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정해주신 매일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작품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선`후배 모든 수필가님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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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전남 함평 출생 -육군 병장 제대
-주택공사, 내무부 근무 -남강인쇄, 도서출판 석림서원 운영
-취미:서예, 바둑
-문학상 경력
행자부장관상(최우수상) 서울시장상(은상)
부천신인문학상 김유정기억하기(우수상)
* 원본에 단락 구분이 불분명해 게시자가 단락을 나누었음을 밝힙니다.
첫댓글 문장도 주제도 연륜의 넉넉함이 밴 수필입니다.
강선생님, 수상을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김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