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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성막을 세움(2) - 재료들을 드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곧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분향단과 그 채와 관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문의 휘장과 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장막 말뚝과 뜰의 말뚝과 그 줄과 성소에서 섬기기 위하여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니라(출35:4~19).”
우리는 지금까지 성막에 대한 전반적인 계시에 대해서 말씀을 봤는데 거기에는 상세한 내용들이 모두 기록이 되어 있었다. 이제 35장부터는 성막을 세우는 문제이다. 성막을 세우기 위해서 첫째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을 지난시간에 드렸다.
일하기 전에 안식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법칙이고, 또 믿는 사람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원칙이다. 일하기 전에 안식한다. 왜 그런가?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감사하고 만족함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일을 할 수 없다.
안식이 먼저이고 일이 그 다음이다. 그것은 창세기 2장에서 보여 진대로 하나님은 일하고 안식하셨고 우리는 안식한 후에 비로소 시작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독교나 다른 종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가 어디서 생기는가? 안식이 없이 일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안식이 없이 일한다는 말은 결국 자기 공로로 일한다, 자기의 노력으로 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기 노력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했으면 일하는 것이 자기에게 축복이 될 텐데, 은혜를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위해서, 자기 노력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마지막은 결국 자기 의가 남게 되고, 자기 의가 남게 되면 결국 남을 판단하게 되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세상은 모두 은혜가 없이, 안식이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싸움이 생긴다든지, 일을 하고난 다음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안식이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반드시 안식 후에 일한다는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가. 출애굽의 목표
1)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바꾸기 위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목표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바로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옮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느냐 아니면 사탄의 통치 아래 있느냐 하는 문제나, 바로의 통치 아래 있느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같은 문제다. 결국 인생의 모든 고통은 사탄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문제는 바로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였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옮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이 모두 있고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있는데,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고 사람들은 고심하게 되고 그 문제 자체를 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통치를 바꾸지 않는 한 그 문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애굽에 있는 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바로의 통치 아래 있으면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고, 누구 때문에 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가 사탄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원리와 사탄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어서 그 통치와 그 원리를 벗어나야 문제가 없어진다. 그 통치와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없앨 방법이 없다.
차나 배를 타면 멀미하는 사람들이 있다. 차를 타면 멀미하는 사람들도 있고 배를 타면 심하게 멀미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보통 때에는 안하던 사람도 파도가 일면 대부분 다 멀미를 한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다. 약을 먹기도 하고 지압을 하기도 하고 뭘 붙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파도가 심해지면 약이 없다. 멀미를 안 할 수가 없다.
거기서 멀미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은 빨리 배에서 내리는 방법 밖에 없다. 심하게 멀미하는 사람은 똥물까지 다 기어 나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배가 정박을 해서 육지에 발을 디디면 내가 언제 그랬냐 싶게 없어져 버린다. 이것은 바다의 통치에서 육지의 통치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통치의 세계가 바꿔졌기 때문이다. 이것과 꼭 같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어디서 나온 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문제들이다. 그런 문제들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사탄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와야 문제가 없어지지, 그 자체 세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안 된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천황의 통치 아래 있으면서 한국 사람으로 살려고 하면, 하면 할수록 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일본 사람처럼 살려고 하게 된다. 그러면 어찌되는가? 매국노가 되고 친일파가 되는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내가 한국 사람처럼 살려면 압제를 받아야 되고 일본 사람처럼 살려면 내가 친일파가 되고 만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일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엔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고 일본 통치에 협조하겠다고 도장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매국노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 되고, 견디다 견디다 안 되서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오래갔으면 누구나 다 친일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친일파 문제를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데 한 십년만 더 지나갔으면 다 친일파가 되었지 친일파 아닐 사람 어디 있겠는가?
나도 한 십년만 더 지났으면 친일파 안 되었겠는가? 내가 아홉 살 땐가 해방이 되었는데 한 십년 지났으면 열아홉 살, 십 오년 됐으면 청년기 아니었었겠는가? 그러면 그때는 나는 일본 사람처럼 일본말하고 또 시험 봐서 일본 순사가 되었을 수도 있고 다 밥 먹고 살려고 하니 안하겠는가? 그러면 자연히 친일파 되는 것이다. 지금 친일파 어쩌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때 태어났으면 친일파 안 될 방법이 있겠는가? 일본의 통치 아래 있는데 거기서 친일파 안 될 방법이 없다.
바로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바꾸기 위해서 출애굽을 시켰다. 그리고 바로의 통치 아래서 무엇을 했는가?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일하게 되었다. 국고성이라는 말은 지금 같으면 뭐가 되겠는가? 만약 한국은행이면 한국은행을 짓는데 봉사했다는 말이 된다. 국가의 창고를 지었다는 말이다. 국고성은 성을 건축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바로의 총체적인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바로를 위해 살고 있는 한 그 인생은 망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백성이 그 안에서 바로를 위해 살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 잘못된 것이다. 잘한 사람일수록 더 잘못된 것이다.
우리 인생이 지어진 목적이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그 위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은 다 허무할 수밖에 없다. 자기 원래의 일이 아니다. 자기 본래의 일이 아니다. 본래의 사명이 아니어서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하나 저것을 하나 다 마찬가지다. 결국은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나서 내가 허망하지 않을 인생이 아무도 없다.
2)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기 위함
출애굽의 목표는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집을 짓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상태를 비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탄의 압제와 강탈 하에 있는 인생이 하나님의 통치와 그 건축 안으로 바꿔지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는가? 세상을 건축하는데 쓰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곧 사탄의 거처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의 영광을 위해서 어떤 걸 만들고 있는 그런 상태이면 하나님 백성의 상태로서는 망한 상태이다. 일본 사람이 일본을 위해서 사는 것은 잘한 일이지만, 한국 사람이 일본을 위해서 사는 일은 망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 백성 같으면 바로의 국고성을 쌓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로의 국고성을 쌓으면 그것이 멸망이다. 세상 사람이 세상일을 하는 것은 자기 일이라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망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멸망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멸망이라는 것이 핵폭탄이 터진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여 인생이 뒤집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진 백성이 사탄을 위해서 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일본 천황을 위해 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멸망이듯이,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진 인생이 사탄을 위해서 살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이런 상태에서 건져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사탄의 통치 하에서 사탄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쓰여지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는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천당에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위치와 상태가 바꿔지는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면 유대교는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망각하고 민족국가 건설에 몰두하고 있다. 어찌하면 우리 민족이 잘 살 수 있는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내쫓고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싸움이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국가를 건설하라고 불러놓은 백성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고 있지만 사실은 망하는 짓이다. 자기들은 이미 망해버리고 만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 카톨릭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살고 있다. 그래서 한 때 천하를 지배할 만큼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카톨릭 왕국이라는 것이 세상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님 백성으로서는 그것도 역시 망하는 짓이다.
그러면 오늘 개신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개신교가 크게는 두 파로 갈라져 있는데 하나는 사회개혁파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구원을 부르짖는 파들인데 소위 사회복음주의라고 말한다. 이 세상을 개혁하자, 불의한 세상을 의롭게 만들고 부정한 세상을 정결하게 만들자, 그것이 우리 하나님 백성의 임무이자 교회의 의무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회 개혁을 향해서 뛰어든 것이 한 파에 속한다.
그리고 다른 한 파는 천당으로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면서 개인의 구원을 주장한다. 개인 구원이냐, 사회의 구원이냐를 가지고 크게는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사회개혁파에서는 개인 구원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너희는 천당만 외치고 이웃이 굶어죽어도 모른단 말이냐? 이웃이 불의한 자에게 압제를 당해도 모른단 말이냐?’ 이렇게 비난하고 있다. 개인 구원파에서는 사회 구원파를 보고 너희는 정치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서로 이렇게 대립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많이 있었다. 과거 정권하에서 사회개혁파들이 많이 나와서 결국은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했던 일이 있었고, 한쪽에서는 예배당에서 ‘주여, 주여 내 영혼을 구원해 주옵소서.’ 하고 천당에 가기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나님 백성의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는 어떻게 지어지는가? 죽고 다시 사신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서 그분의 성분과 하나 되는 단체적인 하나의 실체로서의 인격적인 사회, 인격적인 실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할 길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 인격적인 단체,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 이것은 사회개혁도 아니고 천당 구원도 아니며 그런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사람을 지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었다고 했다.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 되려면 무엇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는가? 새 집이라고 하면 새가 살 수 있도록 지어야 되고 개 집이라고 하면 개가 살 수 있도록 지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실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인가? 그것이 그림으로 보여 진 것, 물질로 예표 되고 상징되어진 것이 성막이다.
성막의 실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인격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한 인격 안에 계신다. 이 인격이 곧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이다. 이 인격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불이 된다든지 바람이 된다든지 그런 것 밖에는 될 수가 없다. 인격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마음이 될 수 있다.
인격이 없으면 하나님의 거처가 없다. 공중에 떠다니는 구름과 마찬가지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방인들이 말하는 신, 초월적인 어떤 존재, 어떤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으로 계시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격 안에 계신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신다. 인격이란 집 안에 계신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인격이 하나님의 거처이다.
이 인격의 단체적인 실체가 오늘의 교회이다. 교회 건축은 하나님의 집의 건축이다. 교회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 되는가? 그냥 초월자가 되는 것이다.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신이 되고 만다. 철학자들은 철학자들대로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질 것이고, 종교인들은 종교인들대로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질 것이고, 이방인들은 이방인들대로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되는 식의 신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교회가 있으면, 한 인격체가 있으면 거기서 그분은 인격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을 가지고 계시기를 원한다. 만물이 다 자기 집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집이 있다는 개념은 이런 개념이다.
우리가 집을 가지고 있는 이런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의 인격체라야 자신의 집이 될 수 있지 물질적으로는 그분의 집이 될 수 없다. 구약에서 만들어진 성막은 단지 인격체의 상징일 뿐이다. 예표이고 상징이었을 뿐이다.
나. 성막 건축의 재료들
우리는 지금까지 성막 건축에 관한 여러 가지 계시를 보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은 재료를 드리는 것, 재료를 드려서 건축을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이다.
1) 재료를 드림
첫 번째가 재료를 드리는 문제다. 5절 이하에서 9절까지가 재료를 드리는 문제가 나온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라고 되어 있다. 소유 중에서 취한다는 것은 드릴 것을 취한다는 말인데 이 드릴 것이라는 것은 예물이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다. 제물일 수도 있고 기부금이라는 개념도 되고, 봉헌물이라는 개념도 된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가면 높다. 높임을 받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떠오른다, 들려진다, 받들어진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아주 귀중한 것이라는 뜻이다. 높이 올려지는 것, 떠받들어지는 것, 귀중한 것,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릴 것은 귀중한 것이라야지 쓰다 남은 것을 드린다든지 이러면 안 된다. 귀중한 것을 드린다. 너희 소유 중에서 드릴 것을 취하라. 귀중한 것 중에서 취하라는 뜻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 건축에 쓰여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십일조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다, 가장 귀중한 것을 드린다는 뜻이다. 경제생활에 있어서 내가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내가 얻은 소득의 부분 중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린다는 뜻이다.
처음 열매를 드린다는 뜻이다. 내가 소중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부분을 내가 쓴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내가 쓰고 남으면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활 태도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소중한 것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를 내가 쓰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쓰고 남으면 드리고 안 남으면 안 드리고 하는 식으로 되는 것은 예물이라고 할 수가 없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예물이다.
요즘 누구 집에 인사드리러 가면서 바나나 사서 가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바나나 값이 너무 싸기 때문이다. 한 때는 바나나 값이 너무 비싸서 선물하려면 당연히 바나나 사가지고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무도 그것을 안 사간다. 값이 싸기 때문이다. 설 같은 때도 비싼 것이 잘 팔린다고 한다. 비싸야 선물 받는 사람이 비싼 것을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 봉헌물이라는 것은 귀중한 것을 드린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께 귀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바로 헌신하는 것이고 그것이 귀중한 것이지 쓰다 남은 것을 드릴 수는 없다.
2) 마음에 원하는 자가 드림
마음에 원하는 자가 드린다고 했다. 바로의 궁전은 어떤 사람이 지었는가? 강제적으로 지어졌다. 억지로 지어졌다.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궁전은 마음에 원하는 자가 지었다.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집은 자원하는 사람이 짓는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안식하게 하는 인격이라서 이것은 자원이 아니고는 지을 수가 없다. 물질 같은 것들은 강제적으로 뺏을 수도 있고 바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격은 강제적으로 뺏을 수 없다. 이것은 자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인격체의 건축, 이것은 자원하는 건축이다. 그리고 그 인격체 자체가 하나님의 건축이 될 때 비로소 그것이 영광스러워지게 된다. 건축에 쓰여지지 않는 인격은 소용이 없는 인격이 되고 만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 하더라도 집을 짓는데 사용되지 않는 나무는 쓸데없는 나무고 가치가 없는 나무다.
인격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인격을 필요로 하신다. 이 인격이 그분의 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의 궁전하고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바로의 궁전은 물질로 짓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지을 수 있고 뺏어다가 지을 수도 있다.
지금 구라파에 가보면 과거 식민지 시대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왔으면 저렇게 돈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금방 든다. 베드로 성당에 가보면 돈이 얼마나 많으면 과연 이런 집을 지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파리 시내를 가보면 전부가 궁전이나 마찬가지다. 전부 대리석으로 지어놓은 집이다. 그 좋은 집이 모두 아파트라고 한다. 그 시대에 길바닥에다가 전부 돌을 깔아놓았다.
대구역 지하도에 가면 돌 깔아 놓은 것처럼 마차가 다니도록 길바닥에 돌을 깔아 놓았다. 얼마나 돈이 많았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것들이 프랑스에서 나오는 것이겠는가? 전부 식민지에서 가져 온 것이다. 물질이라서 강제로 빼앗아올 수 있는 것이다. 미개한 나라에 가서 다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인격은 가져올 수 없다. 인격은 빼앗아올 수도 없고 가져올 수도 없다. 자원해서 드리지 않는 것은 건축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과 바로의 궁전은 전적으로 재료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교회가 이 땅에서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인격의 건축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건축은 어느 시간이 가면 물질 자체가 부패하여지고 없어진다는 것보다 그 성질 자체가 강제적인 것이다.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이 뺏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강대국이 와서 뺏어 가버리고 말 수도 있다.
미국 워싱턴에 가보면 그 나라가 얼마나 부자인지 표가 난다. 집 지어 놓은 것을 보면 금방 표가 난다. 구라파 전체의 역사에서 마지막 열매가 맺힌 곳이 미국 워싱턴인데 완전히 대리석으로 지어놓은 집들을 보면 어느 구석 하나도 그냥 지나간 데가 없고 전부 조각을 다 했다.
조각을 다 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는가? 일일이 손으로 한 것인데 어느 구석도 그냥 지나간 데가 없다. 다 뭔가를 새겨 놓았다. 뭘 만들어도 다 만들어 놓았다. 돈이 얼마나 많았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것은 다 모두 뺏어온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누구한테 또 뺏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건축은 절대로 뺏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3) 재료들은 인격의 여러 방면을 표현함
여기에 모든 재료들이 나오는데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오늘로 말하면 여러 방면에서 얻은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인격의 여러 면들이다. 여러 방면에서 체험한 그리스도, 이것으로 교회가 건축되어 진다. 여러 방면에서 체험한 그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면으로 표현되어야 할 분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체험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어느 한 사람은 어느 한 방면에서만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또 다른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방면에서, 교육하는 사람은 교육하는 방면에서, 군인은 군인의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니까 각자 가지고 온 방면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게는 그 여러 방면에서 체험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는 개인이 아니다. 단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많이 모일수록 더 좋다. 왜냐하면 더 많은 방면의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식상해서, 현실 교회에 너무 지치고 실족해서 그런 교회들을 부정하고 우리 집에서 식구들끼리 본다거나 우리 식구만 갖는 교회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자기 혼자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실족을 하고 부패하고 문제가 있다 해도 그것들은 교회가 아니다. 참 교회는 개인은 아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너희들 가운데 있다고 했다. 그럼 두 세 사람만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인가? 물론 교회가 되기는 되지만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하다. 왜냐하면 방면이 두세 방면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모이면 세 방면밖에 안 된다. 백 사람이 모이면 백 방면이 된다. 천 사람이 모이면 천 방면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모여진다.
많을수록 더 풍성하게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실체가 된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교회는 얼마나 넓은 곳이고 풍성한 곳인지, 나하고 다른 사람들이 왜 필요한가를 알 수 있다. 나와 전혀 다르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체험된 그리스도가 또 필요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하고 똑같은 사람만 있으면 한 방면만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금만 있든지 은만 있든지 놋만 있든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 가지만 가지고는 이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재료가 있어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표현하는 실체인 교회도 여러 방면에서 체험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게 되고 많은 이웃이 필요하게 된다.
4) 성막의 재료들은 세상에서 얻음
이런 여러 방면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는 사실상 애굽에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것들이다. 자기들이 광야에 나와서 얻은 것들이 아니고, 애굽에서 얻어서 나온 것들이다. 알고 보면 애굽에서 취한 것들이다. 애굽에서 취한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건축의 재료가 될 수 있는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면 좋겠지만 하늘에서 바로 내려온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성막을 짓지 못했다. 심지어는 만나가 매일같이 내려왔지만 그 만나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떡을 만들어 드릴 수가 없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은 것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 거하실 집이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그의 집이 될 수가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은 그 실체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집이 될 수는 없다. 이 재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출애굽 때 애굽 사람들이 내놓은 것들이다. 애굽에서 취하고 애굽에서 얻은 것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수 있는 재료들을 어디서 얻는 것인가? 우리는 사실상은 세상에 살면서 얻는다.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표현할 것들을 얻는가? 다 속된 것이고 세상 것들인데 어떻게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가? 사실은 세상에는 하나님을 표현할 것들이 많다. 그런데 그것이 왜 속된 것이 되었는가? 하나님을 표현할 목표와 방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물질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할 때도 금과 은과 놋과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갔다. 이것이 어느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서,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거룩한 것이 되기도 하고 속된 것이 되기도 한다. 방향이 없어서 바로에게 밖에는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돈 벌면 뭐 하는가? 돈 벌면 갈 데가 어디인가? 돈을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돈을 벌면 갈 데라고는 바로의 국고성 밖에는 없다.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갈 데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데 사용되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데가 있지만 세상 백성은 갈 데가 없다. 돈을 모으면 바로의 국고성을 위해서 갈 수밖에 없다. 세금 많이 내야 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도 혼자 착복하면 욕 얻어먹고 쇠고랑 찬다. 바로의 국고성을 위해서 내놓아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환영을 받는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표현할 것들이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쓰일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문제도 생각을 달리해야 될 것이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이 생각을 해야 된다. 만일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위해서 밖에는 쓸 데가 없다. 하나님께 쓰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뭐에 쓰는가? 반드시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모아서 결국은 세상을 위해서 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여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고 내 소유도 그렇다. 그렇다고 먹을 것까지 다 굶으면서 내놓으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 먹을 것은 다 먹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 쓰이지 않으면 다른 데 쓰인다. 하나님께 헌금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들은 돈을 안 쓰는가?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쓴다. 그냥 창고에 집어넣어 놓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또 돈을 창고에 집어넣어 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어차피 써야 빛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써도 쓰긴 써야 된다.
정 쓸데가 없는 사람들은 선거에다가 쓰는 것이다. 한 보름 동안에 몇 십억 씩 날려 버린다. 쓸데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라도 써야 아무개가 국회의원 나왔더라 하고, 명함 찍을 때 국회의원 출마자라고 쓸 것 아니겠는가? 그 몇 십억이라도 안 날리면 누가 자기 명함에다가 국회의원 출마자라고 써 주겠는가? 아무도 안 써줄 것 아닌가? 돈이 남으면 무엇을 하는가? 그런 짓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 쓰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사용되고 만다. 자신의 부귀와 바로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지게 된다. 이것은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금도 금이 쓰여 질 곳에 쓰여지지 못하고, 은도 은이 쓰여 질데 쓰여지지 못하고, 놋도 놋이 쓰여질 곳에 쓰여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부귀는 그러면 존귀한 것인가? 존귀하지 않다. 금을 가지고 부귀를 표현하면 금이 탄식한다. 나는 이따위 것을 위해서 내가 쓰여지는 것이 억울하다고 금이 탄식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도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서 금을 쓴다. 그러면 금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영광이 아닌데 이 없어진 영광을 위해서 내가 쓰여지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쓰여지면 어떤 것도 물질 가운데 적합한 것이 없다.
왕의 금관을 생각해보면 신라 금관이 많이 나와 있다. 제일 좋은 것이라서 금으로 관을 했을 것이다. 그것을 늘 쓰고 있었는지 이따금 한 번씩 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라 금관을 보면 무게가 상당히 나가 보였다. 그것을 목 위에 얹고 어떻게 있었는가 모르겠다. 목에 걸고서 어떻게 있었는지 누가 붙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광을 표현하려고 금으로 만들었는데 그 금은 영원하지만 왕권은 영원하지 못한다.
금이 생각할 때는 억울하지 않겠는가? ‘나는 영원한데 왜 내가 영원하지 못한 저런 것을 위해서 쓰여 져야 되는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의 금관은 지금까지 있는데 그 때 임금은 다 죽어버리고 없다. 금관이 생각할 때 영원하지 않은 왕을 위해 쓰여져서 자기 이름만 더럽혔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자신만 남겨놓고 다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영원한 영광을 표현할 때 사용되어야 금이 ‘바로 이거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우리 인생 자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물질까지라도 전부 허망한데 쓰여지고 만다. 신라 금관과 신라 임금을 비교해 보면 신라 임금은 벌써 언제 죽어버렸는지 모르고 언제 그 영화가 사라졌는지 모른다. 금관만 지금 무덤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모든 것이 유용하고 적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 그 말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도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리를 이르는 것이다. 금도 그렇지 않겠는가? 썩어질 왕에게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죽은 임금의 흔적으로서 남아있는 것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다면 지금도 그 금은 역력히 살아있는 금이 될 것이다. 왕의 금관이 되어 있는 금은 죽은 금이다. 가치가 없는 죽은 금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굉장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은 죽었는데 그 예술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쓰고 있던 사람이 중요해야 된다.
금으로 만든 왕관은 반드시 불에 녹여져서 성막에 쓰이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 녹여져서 누가 나를 불 속에 집어넣어 녹여서 성막을 건축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데 좀 써줄 수 없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9~11).”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물질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을 우리가 참으로 안다면 우리 인생이 허망한데 쓰여진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진 것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금도 속으로 스스로 탄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는데, 인생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면류관에 쓰여 진다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나는 이 면류관이 되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거처는 그 백성들이 여러 많은 방면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로 건축된다. 신성을 체험한 사람은 금을 내놓을 것이고, 구속을 체험한 사람은 은을 내놓을 것이고, 심판을 체험한 사람은 놋을 내놓을 것이고, 인격을 체험한 사람은 조각목을 내놓을 것이다. 전부 이렇게 각 방면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를 내놓음으로서 건축의 재료가 된다.
그리스도 체험의 풍성은 바로 교회의 풍성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교회는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왜 풍성하지 못한가? 그리스도 체험은 없고, 안다는 것은 교리와 전통과 지식밖에 없어서 풍성할 것이 없다. 책에다가 찍어 놓으면 되는 것이고 외우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풍성이 되겠는가? 사도신경을 주일마다 외우고 있지만 그것을 암송한다고 풍성해지겠는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한다고 그것이 무슨 풍성이 되겠는가? 또 한쪽에서는 좀 풍성해 보이기는 보이는데 무엇인가 하면 어떤 은사들에 대한 간증이다. ‘병을 고쳤습니다, 돈을 벌었습니다. 만사형통 했습니다.’ 하는 이런 간증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의 간증이 아니다. 그 간증 속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가 없다. 오순절 계통에 가면 거기엔 무엇인가 간증이 있기는 있는데, 그 간증이 모두 은사에 대한 간증이다. 인격의 간증이 아니다. 그래서 도저히 풍성할 수가 없다.
어디가 풍성한가? 인격의 체험이 있는 곳만 계속해서 풍성하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더욱 진해지고 더욱 풍성해진다. 어제도 누가 와서 어째서 이 교회는 그렇게 간증이 계속 되는지 다른 교회와는 좀 다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것은 조금 다른 것이 아니고 차원이 다른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다. 교리적인 세계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은사의 세계도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이것은 인격의 체험 속에서만 가능하다. 인격이 자꾸 성숙하기 때문에 옛날의 간증하고 지금의 간증이 달라진다. 자꾸 달라진다.
5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나오던 간증하고 5년 후에 우리 교회에서 나오는 간증은 서로 다르다. 왜? 성장해서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하던 말과 어른이 하는 말이 달라지듯이 한 살 때 하는 말 다르고 두 살 때 하는 말이 다르고 세 살 때 하는 말이 다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풍성도 매일같이 새로워지고 달라지게 된다. 인격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들이 하려고 해도 안 된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 간증하면 80세 먹은 노인도 나와서 하는 얘기가 맨 처음 예수 믿을 때 그때 일을 간증한다. 그것 밖에는 간증할 게 없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은 그동안 기도를 많이 했더니 무슨 일이 이렇게 잘 되었다든지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들뿐이다.
이것은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재료가 될 수가 없다. 혹시 교회를 건축해 놓은 다음에 그런 것이 있으면 그 위에다가 기름을 칠하는 것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교회 건축의 재료는 될 수가 없다. 교회는 체험된 그리스도로만 건축된다. 교리나 제도나 의식이나 이런 것은 건축의 재료가 될 수 없다.
5) 건축자를 예비하심
그리고 일꾼들을 예비했다는 말이 10절 이하에 나와 있다. 이 일꾼들은 이 재료들을 다루고 그것을 엮을 사람들이다. 그래야 건축이 된다. 재료만 무성하게 있어도 건축이 안 된다. 재료들은 스스로 건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자가 있어야 그것이 건축이 된다. 건축자가 없으면 건축될 수가 없다.
재료들을 다룬다는 말은 양육한다는 말이 되고, 재료들을 엮는다는 말은 연합한다는 말이 된다. 다루고 연합시키는 것이다. 건축할 때 보면 재료들을 깎고 자르고 다듬고 굽고 하는데, 그것들을 모두 연결시켜서 집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건축자다. 이런 건축자들을 예비한 것을 볼 수 있다.
생명 안으로 양육을 해야 자라나게 된다. 교리로는 자랄 수가 없다. 1단계 교리 교육을 받고 2단계 교리 교육을 받는, 단계적인 교리 교육을 받는 데가 있다. 그것은 자기 지식이 자라는 것이고 지식에 지식이 더해진 것이지, 결코 생명이 양육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생명 안으로 양육하는 양육자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건축자다.
그리고 연합하려면 어떻게 하면 연합이 되는가? 그것은 한 운명 안으로 불러야 연합이 된다. 이 운명 안으로 부르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연합이 될 수가 없다. 생명 안에서 양육하고 운명 안으로 불러야 건축이 된다.
여기서 마음이 지혜로운 자란 말이 나왔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곧 성막과 그 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이다. 마음에 지혜로운 자, 이 지혜로운 자가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 지혜가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지혜이다.
그러므로 생명 안으로 양육하고 운명 안으로 연합시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와서 이러 이러한 재료들을 모두 가지고 집을 만들라 하는 것이다. 성막과 그 기구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성막 자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말씀이 돌비에 새겨지고 돌비가 증거판이 되어서 증거판이 증거궤 안에 들어가고 증거궤가 있어서 증거막이 생긴다. 이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이 집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누가 필요한가? 내 몸을 누가 건축하는가? 내 생명이 내 몸을 건축한다. 내 생명만이 내 몸을 건축할 수 있다. 이 손가락 길이는 딱 이만큼하게, 이 손가락 길이는 딱 이만큼 하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 손가락이 길고 밑에 손가락이 짧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옆의 손가락이 더 긴 사람도 있다. 그것은 다 그 생명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기 생명이 자기에게 적합하도록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공연히 손가락만 길수도 없고 공연히 손가락만 짧을 수도 없다. 전부 생명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이 건축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기술로 건축한 것이 아니다. 인격만이 그 인격의 집인 그리스도를 건축할 수 있지 기술로 건축한 것이 아니다. 생명 안으로 양육하고 운명 안으로 연합하는 것은 한 생명의 일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를 잘 할까, 어떻게 교회를 건축할까 하여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특별히 목회자 같은 사람들은 교회를 잘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 목회 세미나, 성공 세미나 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미어터지게 온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 아무도 안 듣는다. 기술만 배우려고 생각하지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를 건축할 수가 있다. 성육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완전한 지혜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실 수 있는가? 이것은 완전한 지혜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이다. 어떻게 내 생명이 내 몸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막을 건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회를 건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셨다. 어떤 기술로 이루신 것이 아니고, 죽고 다시 살게 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 지혜를 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했다. 그 십자가가 결국 우리에게 지혜를 주어서 그 지혜로 집을 건축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높은 신분을 가지 사람이고, 하나는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다. 브살렐은 유다 지파 사람이고, 오홀리압은 단 지파 사람이다. 유다 지파는 왕의 지파이고, 단 지파는 저주받은 지파로 아주 낮은 지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사람이 선정되었는가? 이 두 사람 속에는 이스라엘 전 지파가 다 포함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밑에서부터 위에까지, 그런데 그리스도를 두고 이 사실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는 높고도 낮으신 분이고 낮고도 높으신 분이다.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할 때 참 신기하게 창조했다. 그 목적으로 보면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었고, 그 재료로 보면 가장 낮은 것으로 지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가장 낮고 가장 높은 게 사람이다.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데까지, 그것은 만유를 포함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데까지 만유를 다 포함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장 높고 흙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장 낮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을 제하고 나면 인생은 만물 중에서 가장 낮은 것이다. 고귀하고 이런 것이 아니다. IQ가 높아서 인생은 다른 동물하고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동물에 비해서 가장 낮은 존재이다. 흙으로 지은 존재이다. 육신적으로 볼 때도 사람이 제일 연약한 것 같다. 사람만큼 연약한 것이 없다.
동물들을 보면 정말 강하다. 약을 안 써도 병도 안 걸리고 아무 것이나 먹어도 잘 살고 배를 갈라놓아도 꿰매 놓으면 나아 버린다. 사람이 그렇게 되겠는가? 옛날에 우리 집의 개 키울 때 자궁 외 임신이 되어서 썩어 버렸다. 불거져 나와서 수술을 해보니까 그 안에 새끼가 들었는데 썩어서 새카맸다. 사람이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당장에 패혈증이 걸려서 죽는다. 그런데 그것을 달고 그냥 돌아 다녔다. 째서 수술을 하고 나니 열도 안 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람이 자랑할 게 없다.
우리가 높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 위해 있다는 그것이 높은 것이다. 낮은 것은 우리가 흙이라는 것 때문에 낮다. 우리가 항상 이 낮은 나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를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 이 축복 위에 무슨 축복을 더 달라고 하겠는가? 흙이 밭이 되는 축복, 흙이 나무를 키워낼 수 있는 축복, 그보다 더 큰 축복을 흙이 달라고 하면 그것은 욕심이고 탐심이다.
그리스도는 높고도 낮으신 분이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건축의 대표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한 자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면 어렵고, 하나님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정교한 일을 한다. 하나님의 집은 매우 정교한 집이다. 아주 정밀한 집이다. 우리 생명체만큼 정교한 집은 없다. 아무리 정밀한 기계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정교한 것은 없다. 사람의 몸이나 동물의 몸 같은 생명체 보다 더 정밀한 집은 없다.
개집이나 사람 집은 동물의 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인격의 집이다. 동물의 집 보다는 인간의 집을 지을 때 훨씬 정교하다. 개집 짓는 것은 대강 지으면 된다. 도망치지만 않게 지어놓으면 된다. 사람이 살 집을 그렇게 지어놓으면 추워서 살지 못한다. 사람이 살 집은 더 정교하게 지어야 된다. 그래서 건축사가 나오고 건축자가 나오고 하는 것이다. 개집 짓는 데는 건축사가 필요 없다. 아무나 지으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인격의 집이다. 이것은 아주 정교한 집이다. 아주 정밀하고도 정교한 집이다. 인격만큼 정밀하고 정교한 것은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격을 말할 때 사람의 위치, 흙의 위치 그것을 인격이라고 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날 때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다.
흙처럼 단순한 것이 없지만 또 흙처럼 정교한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격처럼 단순한 것이 없지만 또 사람의 인격처럼 정교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정교한 일을 해야 된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을 다른 것을 만드는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되고, 조직이나 제도나 방법이나 기술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를 하나의 경영으로 생각해서 교회경영학이 상당히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뭘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격을 어떻게 경영으로 건축하겠는가? 사람의 인격으로 집을 지어야 되는데 어떻게 그것이 경영학으로 가능하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마음이 충만해야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정교한 일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와 총명을 얻고 마음에 원하는 자를 다 불러 모으라고 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렀지만 두 사람이 집을 다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혜와 총명을 얻고 하나님께 마음에 원하는 자 모두를 다 불러서 집을 짓도록 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출36:2)” 라고 되어 있다.
누구나 다 건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대표자이지만 그 다음에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지혜와 총명과 지식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지혜를 부여한 사람은 누구든지 건축을 할 수 있다. 자기 몸을 알고 자기 집을 짓는 법이다.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하나님 집을 짓게 된다.
토끼는 어디에 가게 놓아두면 땅굴을 판다. 자기 몸을 알아서 땅굴을 파는 것이다. 까치는 자기 몸을 알아서 나뭇가지에다가 자기 집을 짓는다. 우리가 아무리 까치집을 잘 지어준다고 해도 까치 스스로가 자기 몸을 알고 짓는 것만 같을 수가 없다. 시골에서는 금년에 바람이 많을 것인가 적을 것인가를 보려면 까치가 집 짓는 것을 보면 안다고 한다. 높은 가지에다가 집을 지으면 바람이 없는 해이고, 낮은 쪽에다가 집을 지으면 바람이 많은 해라고 한다. 자기가 다 알고 짓는다고 한다.
사람이 어찌 그런 것을 다 알고 하겠는가? 짐승들은 그런 것을 다 알고 한다. 바람 많은 해에는 낮은 쪽에 짓고 바람이 없는 해에는 높은 쪽에 집을 짓는다. 사실 높은 쪽에 집을 지을수록 좋다. 그래야 해충도 안 오고 뱀도 안 오고 하지만 바람이 많은 해에는 어쩔 수 없이 낮은 데 집을 짓는다. 자기 몸을 알기 때문에 자기 집을 잘 지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집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다. 그 분의 마음이 없이는 그분의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가 아닌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들을 불러서 일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집은 사람이 짓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건축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지어서 하나님이 안식하도록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집을 짓지 않으면 하나님은 거처를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창조되었다. 형상이라는 말은 집이라는 의미와 마찬가지다. 우리 형상을 따라 지었다는 말은 집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디모데 전서에 나와 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딤전3:15)”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6) 재료들이 넘침
마지막에 보면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이 넘쳤다고 되어 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36:7).”고 했다.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와서 다음에는 가져오지 말라고 중지시켰다고 한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가져오면 모세는 그것을 건축자들에게 주어서 건축자들이 그것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건축자에게 주어서 짓는다는 원리이다.
이것은 애굽에서 취한 것이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단지 하나의 보물에 불과했다. 자기들의 장신구나 치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구속 이후에 그것은 보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우리 모든 것은 전부 대속해야 될 필요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처음 난 자는 대속해야 될 것이고, 나귀는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고, 대속하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천연적인 모든 것은 대속해야 하나님께 쓰임이 될 수 있다. 같은 금이지만 나에게 있을 때는 장신구에 불과하다. 귀걸이나 코걸이 같은 걸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구속 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꿔졌을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재료가 된다.
내 모든 것은 구속받아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축에 쓰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인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고 표현하는 그런 보물이 된다는 것이다. 금이 임금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 되다가, 그것이 구속을 받으면, 구속 받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도구로 바꿔진다.
우리 인생은 똑같이 그냥 그대로 있다. 구속을 통해서 내 인생의 방향이 바꿔지게 된다. 애굽에 있던 사람이나 광야에 나온 사람은 같은 사람이었지만, 구속이라는 그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 그것이 건축 재료가 되었다. 모세에게 드려서 모세는 건축자에게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를 드리면, 내 모든 것을 드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짓는 재료가 된다.
구속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는 일이었다.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삼았다는 말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 왜? 내가 구속했고 내가 대신 값을 주고 사서 내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의 건축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구속이 되어야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가 있다.
재료들이 넘쳤다. 구속과 헌신 안에 우리의 넘침이 있다. 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넘침이 없다. 그런데 내가 구속 받은 사람 안에서는, 대속 받은 사람 안에서는 나를 대체해주는 어떤 것으로 인해서는 가치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될 때 내 인생은 넘치게 된다.
내가 타고난 나대로는 항상 부족하다. 한강 물이 물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항상 부족하다. 내가 구속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이 나를 대속하심 속에 들어오면 내가 넘치게 된다. 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내 것일 때는 넘치고 하나님의 것일 때는 가난해야 되지 않는가?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것일 때는 내가 넘치고, 내 것일 때는 가난하다. 참 이상하다. 자기 것일 때는 끝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일 때는 넘친다.
이 재료들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을 때는 아마 자기들끼리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에도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다. 만일에 이웃집에 있는 금을 탐내는 마음이 없다면 네 이웃에 있는 것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남의 집에 있는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거기서 분명히 도둑질하는 사람도 생기고 남의 것을 탐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 말이 나왔을 것 아닌가? 그 말은 항상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막을 건축하자고 내놓아 보니 넘치더라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니 넘치더라는 것이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쓰려고 하면 항상 모자란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생긴다.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왜 다른 사람은 나를 무시하는가? 전부 그렇게 된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쓰임이 되려고 하면 왜 나를 무시하는가 하는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전혀 없다. 왜 나를 안도와 주는가 할 필요도 없다. 그럴 이유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참 신기한 일이다. 혹시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족한 것이 있거든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쓰여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넘치게 된다. 바로 즉시 넘치게 된다.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다. 다 나를 돕는 사람이다. 나를 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 나를 돕는 사람이다. 욕을 하고 가는 사람도 나를 돕는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를 욕하고 가는 사람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 신기한 일이다.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이 아주 가깝게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멀리서 찾고 있는 것 같다. 멀리서 인생을 잘 살려면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 하고 잠을 못 자고 궁리하고 있고 연구하고 있다. 너무 가까운데 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기 눈썹을 모른다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사람인 것 같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버리면 내 인생은 풍성하고 넘치게 되고 자유자가 된다. 내 것이라고 생각 될 때에는 어쩐지 모든 것이 나를 속박하고 나를 얽어매고 나를 누르고 핍박하는 것 같은데 내 것이 아닌 줄 알고 나면 아무도 핍박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얽어매는 사람도 없다. 정말 자유한 사람인데 자기 혼자 부자유했던 것이다.
자기 혼자 얽매여서 누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이, 누가 나를 얽매는 것 같이 누구 때문에 안 되고, 이리 가도 안 되고 저리 가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만 것이 다 막혀서 사방이 막혀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면 막힌 데가 없다. 이리가도 쓰임이 되고 저리가도 쓰임이 되고, 이래도 쓰임이 되고 저래도 쓰임이 된다.
재료들이 넘쳐서 이제는 그만 가져와도 되겠다고 했다. 이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은 절대로 모자란 일이 아니고 풍성한 일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위해서 쓰여 질 때 풍성한 인생이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을 진토에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는 귀한 재료로 사용하시고 당신의 형상이 되고 당신의 집이 되고 당신의 거처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그런 존재가 되도록 작정하시고 지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풍성한 인생을 우리가 알게 되고 이 광활한 세계 자유로운 세계 넘치는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열어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마련하신 길이 얼마나 좋은 길이고 얼마나 참된 길이며 얼마나 풍성한 길인가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