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을 재구성하라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스무 살 때 쓴 시 <낙동강>의 한 부분이다. 이 시가 그리고 있는 대로라면 우리 아버지는 강에서 목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거나 뱃사공이어야 한다. 또한 아버지에게 그물 한 장을 물려받은 시 속의 ‘나’는 이 시를 쓴 안도현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그물을 물려주기는커녕 그 당시 경기도 여주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농부였고, 낡은 목선을 소유했거나 수리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요샛말로 뻥을 친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이 시를 쓰는 동안 내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강은 물이 깊은 낙동강이 아니었다. 나는 낙동강의 지류의 하나인 예천의 내성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냇가에 시의 화자를 세워두었을 뿐이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수심이 얕아 배를 띄울 수 없는 냇물이다. 시의 제목 역시 뻥이라면 뻥이다
나는 낙동강이라는 제재를 붙들고 ‘할아버지-아버지-나’로 이어지는 삼대의 면면한 핏줄을 노래하고 싶었고, 그물 한 장을 물려받는 것으로 마음속의 메시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관계를 상징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인 그물을 어떻게든 이 시에다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아니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어부로 둔갑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시로 말했으니 사기를 친 것인가? 나는 시인으로서 진실하지 않은 뻥쟁이인가?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을 화자라고 한다. 화자는 때로 ‘서정적 자아’ ‘시적 자아’ ‘시적 주체’ ‘서정적 주인공’ ‘페르소나’(persona)와 같은 용어로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어떻게 부르든 시인과 화자를 따로 구별하는 것은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일수록 시인과 화자를 의식적으로 구별하는 공부가 꼭 필요하다. 시를 쓰는 시인은 화자를 통해 말해야지 스스로 시 속에 뛰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시가 시인의 사적인 발언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과 화자를 동일하게 여기지 말고 구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라는 형식이 하나의 허구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학교과서는 ‘소설은 허구’라는 명제를 강조하면서도 ‘시는 허구’라는 말을 기술하는 데 인색하다. 모든 시가 허구가 아니라면 시가 예술로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 신변잡기 같은 사사로운 글을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는 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바탕 위에 만들어지는 것일 뿐, 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소한 체험은 작품 속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시적 허구라고 부른다.
오규원의 말대로 “시 속의 ‘나’는 현실 속의 ‘나’가 아니다. 시 속의 ‘나’는 허구 속의 존재이며, 어디까지나 창조적 공간인 작품 속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나’는 객관화된 ‘나’이며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어떤 국면 속의 형식화된 인간으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일상의 경험을 시로 표현할 때는 일상 속의 ‘나’가 아닌, 구체적 경험 속의 ‘나’를 그리는 시인의 형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시인은 현실 속의 ‘나’를 죽이고 구체적 경험 속의 또 다른 ‘나’를 살려 형상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형기는 또 “사실의 세계가 신의 창작물이듯 허구의 세계는 인간의 창작물”이라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바꾸면, 신은 ‘사실’을 만들고 인간은 ‘진실’을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사실보다 진실에 복무하는 자라는 말이다.
어떠한 진실을 그리기 위해 시인은 사실을 일그러뜨리거나 첨삭할 수 있다. 사실과 상상, 혹은 실제와 가공 사이로 난 그 조붓한 길이 바로 시적 허구다. 이 시적 허구를 인정하지 않고 사실 속에 갇혀 있으면 시인은 숨을 내쉴 수도 없고, 상상의 나라에 가지 못한다. 물론 진실을 노래할 기력도 사라진다. 그의 시는 제자리걸음을 하느라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게 된다.(그날 있었던 사실만 쓰려는 아이는 일기에 쓸 게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쩔쩔매게 마련이다.)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당신은 연출가가 되어야 한다. 화자를 시의 무대 위로 내보내 놓고 화자의 뒤에 숨어 배후 조종자가 되어야 한다. 배우(화자)의 연기가 서툴거든 호되게 꾸짖어라. 그래도 배우가 영 탐탁지 않으면 당신이 배우의 가면을 쓰고 아주 잠깐 배우와 똑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가보라. 관객(독자)의 눈에는 당신이 무대에 등장한 줄도 모르고 가면 쓴 배우만 보일 뿐이니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몇 해 전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시를 발표한 후에 독자들한테 전화를 몇 차례 받았다. 그 바닷가가 도대체 어디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느 바닷가를 지나다가 우체국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이 시의 배경이 그곳이 아니냐고 물어오는 분도 있었다. 정보통신부에서도 연락이 와서 그 바닷가 우체국의 위치를 알려주면 시비를 하나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아아, 나는 그분들을 모두 실망시키고 말았다. 나는 가끔 변산반도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데, 그 바닷가 언덕에 있는 몇몇 낡은 집들에 매혹되어 오래오래 그 집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게 죄였다. 그 언덕 위의 낡은 집 문앞에 빨간 우체통을 세워두고, 우체국장을 출근시키고, 우표를 팔고, 우체부의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고,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간판을 거는 상상을 한 죄!
-<안도현/ 시와 연애하는 법 중에서>-
낡은 집 / 이은봉
겨우 겨우 가슴으로 모시고 다니는 집, 전쟁통에 허겁지겁 정신없이 지은 집 너무 낡았네
걸핏하면 굴뚝 밑 무너지는 집, 함부로 방고래 막히는 집 아궁이 가득 불덩이 처먹고도 방구들 뜨뜻하질 않네
사람들 아랫목 이불 속 손 넣어보곤 아이, 차가워라 마음까지 얼어붙곤 하네
청솔가지 타는 냄새 매캐한 집, 도둑고양이들 우르르 몰려다니는 집 고방 밑까지 우수수 무너지고 있네
전쟁통에 지은 집, 다들 그러하네 이 집 수리하느라고 병원엘 다니는 내게 현일 스님은 그만 다 버리라고 하네
……버리면 어쩌지 이 낡은 집, 그래도 그 동안 나를 키워준 집
―「낡은 집」전문
이 시에서 집은 일단 말 그대로의 집, 곧 주거공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집으로, 주거공간으로 읽어도 충분히 일정한 시적 형상, 즉 시적 풍경을 펼쳐 보여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일단 낡은 집으로 읽히도록 장치를 한 셈이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며 키를 열고 들어가면 이 시에서의 집이 이내 시인의 시원찮은 몸, 아픈 육체를 가리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가 내포하는 의미망은 그뿐만이 아니다. 좀더 눈을 밝혀 읽으면 여기서의 집은 시인의 몸뿐만 아니라 시인의 계집, 즉 시인의 아내의 아픈 몸을 가리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힐 수 있도록 몇몇 심미적 장치를 숨겨 두려고 했다.
시인이든 시인의 아내든 나로서는 집을 몸으로 읽었을 경우 신통치 않은 몸을 지켜내기 위해 시인이 이런저런 애를 쓰는 풍경이 떠오르도록 몇몇 징후들을 장치해 두었다. "이 집 수리하느라고 병원엘 다니는 내게" 등이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나는 이 몸이 역사적 산물임을, 6·25 전쟁의 산물임을 암시하려고 했다. 전쟁통에 대를 잇기 위해 우발적으로 만들어진 몸, 곧 "전쟁통에 허겁지겁 정신없이 지은 집", 즉 그렇게 해서 태어난 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겉으로는 단일한 풍경처럼 보이도록 했지만 속으로는 두 개 이상의 풍경(체험)을 중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방법적 자각이 방법적 자각 자체만으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역설적 정의를 떠나서라도 나로서는 이러한 방법적 고려를 통해 우리 시의 내포를 확장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전망과 함께 하는 시대가 만드는 양심에 충실하려는 의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미안한 일 / 김사인(1956~ )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저녁의 감촉 / 이선이(1967~)
노인이 공원에 앉아 호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손을 더 깊이 넣어 무언가를 찾습니다
꺼내는가 싶더니 다시 넣어
만지작 만지작합니다
바람이 숲을 뒤적거리자 새가 날아갑니다
새가 떨구고 간 깃털을 땅거미에 곱게 싸서
바람은 숲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어줍니다
바람과 숲을 버무려 노인은 새를 만듭니다
호주머니가 해지고
저녁은 부드럽게 날아갑니다
환장하겠소 / 정 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아엎었다
유채꽃밭을 갈아엎었다
울화를 갈아엎었다
나는 트랙터와 한 몸이었다
벚나무는 쯧쯧 혀를 찼고 바람은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벚꽃길을 걷고 나지막이 배경이 되어주는 꽃밭에서 사진 찍기에 몰두했다 벌들이 마지막 저항처럼 집요하게 윙윙댔다 갈아엎은 것은 유채꽃만은 아니었다 질긴 바랭이풀도 놀란 땅강아지도 죄 없는 꽃다지도 함께 스러졌다
어떤 계획은 그렇게 희생을 강요했다
이제 유채밭은 오래도록 향기 짙은 풀밭으로 거듭나겠지
적극적으로 밭이 넓어졌다
엄마는 광천변에 나물로 먹으려 유채 씨를 뿌렸고 난 엄마의 영정 앞에 유채꽃을 꽂았다 유채꽃에서는 똥 냄새가 났다 나는 애써 똥 냄새를 참았다
꽃향기도 배반을 하는구나!
한 해 농사를 제 손으로 뒤집는 것은
거부의 강력한 몸짓이다
꽃밭 속에선 똥 냄새가 들끓었다
나는 꽃보다는 그 똥 향기에 주목했다
이토록 예쁜 꽃이 어쩌다가 고약하게
참 겉보기와는 다르게,
휑한 통증이 몰려왔다
무작정
나는 봄 밖의 손님이다
제부도 /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