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 대부분 운전자들은 자신이 평균보다 운전을 더 잘한다고 믿고, 대부분 교수들은 자신이 평균보다 더 좋은 강의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창업자들은 자신만은 성공할 거라고 믿는다.
- 결국 인간의 뇌는 자신의 성공 확률을 언제나 과대평가한다는 말이다.
- 반대로 우울증 환자들은 이 세상에서 한없이 작은 객관적 성공 확률을 그대로 알기에, 아무 선택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를 넘어 세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과연 알렉산더가 세계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 확률은 미미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그의 조언자라면 그 무모한 정복전쟁을 권했을까?
그것은 한 젊은이의 무모한 도전의 결과였다.
대왕이 성공 확률을 냉철하게 계산해보았다면, 아 그는 결코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할 수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박정희씨나 전두환씨가 쿠테타를 일으켜 기존의 정부를 전복하고, 새 정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이병철씨나 정주영씨가 작은 가게를 열어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확률은?
어쩌면 당신에게서도 찾을 수 있겠다.
당신이 태어날 수 있었던 확률은?
당신이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고, 오늘의 이 모습이 될 수 있었던 확률은?
오늘도 수많은 수험생들이 100대 1도 넘는 공무원 시험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데, 그들이 합격할 수 있는 확률은?
당신이 냉철한 분석가라면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도전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당신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울증 환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바로 보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당신들은 착시에 빠져 있다.
당신이 산 복권 로또는 객관적 확률에도 불구하고 평균보다 더 높은 당첨률을 가질 것이라 착시한다.
당신이 벌이는 사업은 평균보다 더 성공할 수 있으리라 착시한다.
하하하하하 착시를 계속 하는 한 당신은 우울증 환자는 아니다.)
- 세상은 험악하고 위험하다. 위험하고 험악한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희망하고, 미래를 계획하려는 뇌는 위험 불감증과 성공 확률 과대평가라는 착시들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그리고 인간의 이런 ‘확률적 착시’ 없이는 문명도, 발명도, 혁신도 모두 불가능했을 것이다.
- 그런데 잠깐! 뇌의 확률적 착시와 별개로 만약 미래가 모두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
(지금 저자는 아주 무서운 얘기를 하고 있다.
당신은 과거를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난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확정적이다.
빅뱅우주론에 따라 일단 빅뱅이 있었다고 하자.
그러면 빅뱅이라는 첫 사건이 출현한 이래 137억년이 지나 오늘의 우주가 만들어졌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최근 뉴스에 따르면 구글의 자회사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유럽 바둑 챔피언이자 중국 프로 바둑기사인 판후이(2단)와 다섯 차례 대국을 벌여 모두 이겼다고 한다.
그리고 오는 3월 9일에는 바둑계의 인간 최고수인 이세돌 9단과 역시 5번기로 맞붙는다고 한다.
10여년째 세계 바둑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이세돌 9단은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이 놀라울 정도로 강하며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최소한 이번 대국에서는 이길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번 대국에서만은’ 이길 것이라 자신한다는 것이다.
다음 대국은 몰라도 말이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10의 700승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19줄 곱하기 19줄이니 첫 번째 돌을 놓을 자리는 361개고, 그 후 두 번째 돌을 놓을 자리는 365개, 이후 364 363 .... 3 2 1 까지니 말이다.
지금까지 관측된 우주의 별의 개수는 1000억 곱하기 1000억개 정도, 그러니 10의 22승 정도다.
그러니 바둑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갖는가를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고, 결국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두뇌는 두 손 들게 될 것이 틀림없다.
19줄 곱하기 19줄에서 이처럼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긴다면,
최초의 빅뱅 이후의 경우의 수와 그 이후의 경우의 수...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숫자를 동원해도 오늘 당신이 이 글을 쓰는 현재가 등장했을 확률을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의 논의는 지금에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 중 지금여기는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오직 하나의 선택만 해 왔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결과다.
다른 경우의 수는 가능성으로 그쳤다.
시간은 모든 경우의 수를 배제하고, 오늘 이 순간만을 향해 직진했다.
그렇다면 말이다.
미래는 어떨까?
지금부터 137억년 후의 미래까지 펼쳐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빅뱅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경우의 수, 아 또 얼마만한 경우의 수가 펼쳐질까..
좌뇌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일 것이다.
거의 무한대의 경우의 수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137억년이 또 흐른 시점에서 오늘을 돌이켜보면 어떤가.
역시 모든 경우의 수는 가능성으로 그치고, 시간은 단 하나만을 선택했을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미래를 바라보면 무한의 경우의 수가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미래의 그 시점에서 지금여기를 바라본다면 단 하나의 경우의 수만 있다.
저자는 이 무서운 얘기를 하고 있단 말이다.)
-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들이 결국 신, 물리법칙 또는 운명이라 불리는 필연들 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면?
-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고, 현재는 미래로 변한다.
- 고대 그리스․로마, 유대교․기독교의 시간은 지극히 선형적이다. 현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말이다.
- 힌두교에서도 과거는 변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환상(Maya)이란 사실을 진정으로 느낄 때까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세상에 던져져 다시 시작해야 할 뿐이다.
- 과거가 현재를 만들지만 현재의 미래가 바로 그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가 되기에 독립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꼬여 있다. 어차피 미래가 없는 세상.
(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로마, 유대교․기독교의 시간처럼 선형적인 시각이다.
이 시각에 의하면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오늘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또 하나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와 같이 윤회적인 시각이다.
이 시각에 의하면 과거도 미래도 바꿀 수 없다.
당신은 영원한 시간 동안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듯, 환상(Maya) 속에서 돌고 돈다.
기독교에서의 시간은 무섭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는 100여 년 동안 잘 살아야 한다.
자칫하여 예수를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당신은 무한 영겁의 시간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조금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를 알 수 없었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있다.
기독교에 비하면 불교의 시간은 그래도 낫다.
이번 생에 선한 일을 하면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몸을 입게 된다.
이번 생에 조금 악한 일을 하더라도 포기하지 마라.
다음 생에 더 잘하면 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불교는 기독교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
당신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여전히 윤회는 계속 된다.
무기형을 선고 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수인 것처럼.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그칠 수 없는 형벌이다.
엔트로피(Entropy)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에너지는 유용한 에너지에서 무용한 에너지로 변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만물은 질서로부터 무질서로 간다는 것이다.
쓸 수 있는 에너지로부터 쓸 수 없는 에너지로 바뀐다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것은 질서가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반드시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없다는 것이 물리학의 통설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증가도 없고 감소도 없다고 한다.
물리학은 좌뇌의 소산이며, 좌뇌는 시간에 기초한다.
좌뇌는 빅뱅에서 비롯되어 우주가 무한히 팽창한다고 생각한다.
시공이 확대된다고 생각한다.
우뇌는 시간의 주인이며, 공간의 주인이다.
우뇌에서 보면 본래 에너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존재, 의식, 지복의 3위(位)가 처음도 끝도 없는 영원한 춤을 추고 있다.
당신이 아무리 어머니 우뇌를 괴롭히고 더럽히더라도 어머니 우뇌는 그 모든 것을 다 담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당신이 해 온 모든 선하고 악한 일들을 넘어서라.
기독교인들 중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강도에게 예수가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가르침을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구원은 당신이 선한 일을 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구원은 내려온다.
강도는 평생 사회에 악행을 저질러 왔다.
그러나 그 악한 짓은 지금의 강도와 무관하다.
지금의 강도는 스승 예수에게 귀의했다.
과거의 죄는 모두 사함을 받았다.
지금여기는 구원뿐이다.
달마와 양무제의 대화가 생각난다.
서쪽 인도에서 고승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양무제가 국경까지 달마를 마중 나갔다.
인사를 나눈 후 양무제가 뻐기면서 말을 했다.
‘나는 수많은 절을 지었고, 많은 스님들에게 불편이 없도록 편의를 제공했소. 또 불교학교를 세웠고, 많은 보물들을 시주했소. 나는 어떤 공덕이 있소?’
달마가 한숨을 지으며 말을 했다.
‘폐하께서는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지옥에나 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당황한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지옥에 간단 말이오? 나는 스님들이 하라는 것을 다 한 것밖에 없소.’
달마의 말이다.
‘폐하께서 지난 날, 세상이 말하는 선행을 베풀었지만 그것은 지금의 폐하와 무관한 일입니다. 오히려 폐하는 선행을 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 또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과거의 것은 그것이 악업이든 선업이든 당신의 것이 아니다.
지금의 당신과 무관하다.
십자가의 강도는 지난날의 악행을 뉘우치고 겸손해져 있다.
예수가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강도는 가난한 마음을 가졌다.
내세울 것이 없다.
오직 스승께 귀의한 것이다.
양무제는 선행을 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크게 실망할 것이고 격분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스승 달마는 보이지도 않는다.
구원은 당신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