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강릉(江陵)
6. 구정면(邱井面)<3>
<3> 그 밖의 학산(鶴山)의 자랑거리
정의윤 가옥 / 조순박사 생가 / 칠성산 법왕사(法王寺)
학산오독떼기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농요(農謠)인데 매우 향토색이 짙은 가락이 특징으로, 그 내용은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벼베기소리, 타작소리 등이며, 학산2리 마을회관 앞에는 오독떼기 전수관이 있어 전승(傳承)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 부근에는 학산의 자랑이며 우리나라 경제학의 권위이신 전 국무총리 조순(趙淳)박사님의 생가(生家)도 학바위 아래 있고, 학동(學童)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뭉구니(文群里,文根里) 골도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의윤 가옥은 만성(晩惺) 정주교(鄭冑敎)님이 살던 고택으로, 정의윤님은 정주교님의 장남(長男)이다.
정주교님은 해방 후 미군정(美軍政) 시절 입법의원(立法議員)을 지냈던 영동지방의 정치가이자 거유(巨儒)로 강릉 유림을 대표하는 강릉유도회 회장(儒道會會長), 강릉 예총회장(藝總會長)을 역임하셨으며 강릉 화신백화점을 경영하는 등 사업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셨던 분이셨다.
학산 서쪽 칠성사 골짜기에 법왕사(法王寺)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였다는 고찰로, 임진왜란 이후 불교탄압이 심해지자 폐허가 되었는데 지방 유림이었던 정주교님의 조부(祖父) 진사 정은(鄭殷)이 절터에 독서재(讀書齋)를 짓고 유생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개화의 물결을 타고 유생이 적어지자 비어있게 되었는데 마을의 부녀자들이 칠성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며 칠성암(七星庵)이라는 암자(庵子)가 되었다.
이곳 임야(林野)는 정주교님의 사유지였는데 1946년, 당시 이곳 주지이던 청우(聽雨) 스님에게 임야 36정보를 시주(施主)하여 현재의 이름인 법왕사(法王寺)로 바꾸었는데 한국전쟁(6.25) 때 모두 불타고 전쟁 후 중건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조선 시대의 가옥형태가 잘 간직되어있는 조철현(曺喆鉉) 고택, 서지(鼠地)골에 있는 창녕조씨 종가댁도 고택(古宅)의 예스러움은 물론 종갓집 음식도 맛볼 수 있는 한정식집으로 소문이 났다. 재미있는 것은 강원도 가옥들의 특징 중 하나로 집마다 뜨럭이 있는 것이다.
뜨럭은 일명 흙마루로 강원도 지방은 눈이 많이 내리니 처마 안쪽으로 마당보다 높은 턱을 만들어 놓는다. 대체로 턱(뜨럭)의 높이가 1m도 넘어서 뜨럭 밑에 댓돌(섬돌)을 놓는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뜨럭 높이보다 더 쌓여서 언젠가 아침에 문을 여니 눈에 막혀서 문이 열리지 않던 기억도 있다.
2000년대 초까지 강릉은 커피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안목항(현 강릉항) 주변에 커피 거리가 생기면서 커피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다가 학산 설래(仙來) 마을에 테라로사(Terarosa)라는 원두커피 공장과 커피 관련 종합사옥이 들어서면서 이곳 학산이 우리나라 커피의 원조(元祖) 격이 되었다. 일명 커피 매니아(Mania/狂)들의 성지(聖地)인 셈이다.
이곳에는 커피 박물관(Coffee Museum), 세계 각국의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는 식당(Restaurant), 커피샵(Hand Drip Coffee Shop), 아트샵(Art Shop) 등이 골고루 갖추어 있고 규모도 엄청나다.
테라로사 앞 어단천(於丹川)을 건너면 옥봉(玉峰)마을이 있고 그 옆으로 금광평(金光坪) 벌판이 펼쳐지는데 불모지이던 이 벌판은 한국전쟁(6.25) 이후 정부에서 피란민들을 비롯한 외지인들을 불러들여 개척대(開拓隊)를 조직하여 개척을 시작하였고, 곧이어 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도 시작되었다.
칠성산 골짜기의 물을 막는 공사가 제3공구(第三工區)로 칠성(七星)저수지가 되었고, 만덕봉 골짜기의 물을 막는 제2공구(第二工區)는 동막(東幕)저수지가 되었는데 내가 어렸던 시절 외지인들이 모여들어 불모지 금광평(金光坪)이 북적거렸던 기억이 새로운데 학산3리이다.
금광평은 개척이 되면서 논밭은 물론, 과수원이 많이 들어섰는데 학산 본동은 과수원은 없고 자두(꽤)가 많아 ‘자두의 마을’로 불릴 정도였고 금광평의 과수원에서는 주로 사과, 배, 복숭아, 포도 등이 생산되었는데 마을마다 강릉의 특산인 감나무가 많았다. 현재 칠성저수지 밑 금광평 마을에는 영동고속도로 남강릉 IC가 있고 고속철도 KTX도 강릉역(江陵驛)을 기점으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동해시(東海市)까지 이어지며, 금광리 마을 아랫녘에는 열차 기지창(基地廠)도 있다.
구정면 금광리(金光里)는 남쪽으로 망덕봉(望德峰, 781m)이 우뚝 막아서 있고 삼덕사(三德寺) 골짜기에서 발원한 개천은 동막저수지(東幕貯水池)로 모였다가 마을 앞을 흘러내리는데 금광천(金光川)이다. 금광리는 놀랍게도 천주교의 성지로 알려졌는데 구한말(舊韓末) 대원군에 의해 자행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인들은 오지인 이곳 금광리로 피신하여 정착했고 힘을 모아 성당을 연 것이 1887년이라고 하며 지금은 춘천교구 노암동 성당의 금광리 공소(公所)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금광리 공소는 영동지역 최초의 천주교 모태(母胎)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망덕봉(望德峰) / 천주교 금광리 공소(公所) / 용금정(湧金井)
공소(公所)는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주일마다 신부님들이 돌아가며 찾아와 미사를 드리는 곳이다. 바로 이웃인 학산3리에 살았던 나는 어린 시절 교리문답을 적은 작은 종잇조각을 들고 열심히 외워서 누구였는지 앞에 나가 줄줄 외어서 통과하면 옥수숫가루를 한 됫박 주어서 들고 오던 생각이 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곳 금광리 공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광초등학교 뒤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벌판 소나무 숲속에 용금정(湧金井)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연못에서 금덩어리를 건져 올렸다고 하는 영험한 연못인데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연못가에서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가물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또 옆에 있는 작은 샘물은 약효가 있어서 위장병에도 효험이 있고 머리를 감으면 검고 윤기가 난다고 알려졌었다. 그런데 2002년 태풍 루사 때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여 지금은 마을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덕현리는 구정면의 가장 남쪽으로 금광리와 맞닿아 있고 덕현리를 지나면 강동면 언별리로 이어지는 산골 마을로, 마을 가운데 덕고개가 있어 덕현리(德峴里)라 하고 골짜기에 몇 집씩 있는 산골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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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학산3리)에서는 봄에는 화전놀이를 가고 한여름에는 마을이 단체로 해수욕을 가는 것도 연례행사였는데 주로 3~40리 거리인 안인 해수욕장까지 걸어서 갔다.
청년들은 밤에 솥단지나 채알(遮日-텐트), 땔감과 반찬 등 먹거리를 멜빵으로 짊어지고 먼저 떠나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이른 새벽에 떠나서 나중에 왔다.
남정네들은 우리집 마당에 모여 매캐한 모깃불을 냄새를 맡으며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이슥해지고 달빛이 제법 훤해졌다 싶으면 짐들을 지고 길을 나섰다.
웅기중기 으스름 달빛 속으로 스며들 듯 나아가다 보면 금광리(金光里) 아래 들녘을 지나 금광천(金光川)을 건너면 덕현리(德峴里) 산등성이가 나타나는데 덕현리 마을 가운데를 소리를 죽이며 지나노라면 더위를 피하여 마당에 나와 평상(平床)에 누웠던 마을 사람들은 어둠 속을 소리 없이 지나가는 우리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였다.
마을을 지나 다시 어둑어둑한 산길을 지나고 쭉 내려가면 상시둥(上詩洞)이 된다.
이때쯤이면 밤이 으슥하여 마을 앞을 지나도 사람 자취는 안보이고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매캐한 모깃불 냄새만이 떠돌았다. 희뿌연 달밤,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가다 보면 이따금 들리는 소쩍새 울음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풀숲 옆을 지날 때면 쑥국새가 우는 소리도 들렸는데 우리의 발자국소리에 울음을 멈추었다가는 한참 지나오면 쑥국~ 쑥국~ 신음 같은 소리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옛날 가난에 허덕이다 시어머니가 무서워 쑥국도 못 얻어먹고 굶어 죽어 새가 되어 밤에 슬피 운다는 쑥국새....
우리 마을에서 해수욕 다니던 이 길이 지금 강릉 바우길 7번 풍호(風湖) 연가(戀歌) 길이고 같은 코스가 다시 해파랑길 37번 코스이기도 한데 17km 정도로 상당히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