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Ⅰ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 8월달, 서부연합의 정례모임은 참 멋졌습니다.
꽉 차고 넉넉하고 마음이 넘치는 분위기였습니다.
단골 중국집 大觀園 제일 큰방 라운드테이블의 여덟 개 좌석이 모두 주인을 찾았습니다.
오세문 정경석 김영구 최홍규 배동한 내남정 채관병 방기한, 그밖에 누군가 더 있어도 좋겠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에 올 사람 다 왔구나 하는 만족감과 흐뭇함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더욱이 오늘 이런 넉넉한 자리를 예측이나 한 듯 오세문 회장이 신선주 水井坊을 대짜(750ml)로 준비해왔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못 나왔던 채관병이 노모 간병을 비롯한 저간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내남정이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한데 이어 그동안 미뤄두었던 온갖 야그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허지만 그 야그들을 이곳에 옮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우려되는 점이 많은지라, 다만 그 야그들의 맛이 즐겁고 재미있었다는 점만을 전하는 바입니다.
오늘 모임은 편안하면서도 넉넉하고 가슴 벅찬 뒷맛의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들 모두 이 나이에 이렇게 훌륭한 음식과 술을 즐기며 친구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준비되어 있다는 이 현실이 짜릿한 고마움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 서부맨들의 인연에 연결되어 있는 공덕의 고리가 무엇이길래 그럴 수 있을까요.
단순한 생각입니다만, 인생에서 인연의 작용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마도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인연은 단순한 시작이거나 결과일 뿐이지만, 그 인연으로 인한 만남의 기회는 무수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에 빠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연세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낸 것처럼, 여행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처럼, 길을 몰라 길을 묻는 것처럼...인연의 시작은 단순하지요.
우리가 연세대 경제학과 66학번이라는 인연은 단순한 시작이면서 아울러 없어지지 않는 결과입니다.
서부맨들을 비롯하여 우리 66동기들은 그 인연을 만남의 공덕으로 연결고리를 만들고 정(情)을 쌓아 고리를 단단하게 다듬어서 돈독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는 모든 출발과 동기는 만남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친구 여러분, 이번 모임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몸 관리 잘 하시어 다음 모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모임을 위해 호스트를 맡아 애써주신 김영구와 대짜 水井坊을 준비해 주시고 2차까지 이끌어준 오 회장에게 따듯하고 찐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 친구Ⅱ
지난 주말(12일)에 내 평생 가장 많이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66동기 김남수와 더불어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니게 된 인연으로 셋의 우정이 질기게 엉겨 붙어 자라났고, 세월 따라 노년기에 접어들면서는 주로 화곡동 남부시장 은혜순대집에서 돼지머리고기를 안주 삼아 한 달에 한번 또는 두세 번 막걸리를 마시며 모자람 없는 자유를 즐겼습니다.
그때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습니다.
어쩌다 기회가 되어 배동한이 자리를 같이한 적도 있었고, 때때로 그가 일산으로 찾아올 때는 양종기와 어울리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양종기가 사고를 당해 칩거해 있을 때, 병문안 한다는 핑계로 찾아갔다가 양종기가 안내한 식당에서 대취해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조문차 장례식장 빈소에 들어서 멀쩡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앞에 분향하고 큰절을 하고 일어서는데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현실감에 나도 모르게 작별인사말이 나왔습니다.
“애썼네.”
조문을 마치고 식사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술상이 차려졌는데, 상복 차림의 두 살 위 호호할머니 경자 누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막걸리 갖다 줄까?”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끄떡이면서 모든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자식이 떠나가면서 내가 마실 막걸리는 챙겨놨구먼...’
이것이 평생 영등포일대에서 살다 떠난 내 친구와의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그와 나의 인연은 끝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