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 대로 론
이동민
최초로 수필이라는 말을 사용한 남송의 홍매(1`1223-1202)는 그의 책 ‘용재수필’의 서문을 이렇게 썼다.
“내가 늙고 게으른 탓에 독서를 많이 못하지만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기록해둔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에는 앞, 뒤 순서가 없다. 이러한 글들을 모은 것을 수필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고려의 이제현이 역옹패설에 이렇게 말했다.
“지정(至正) 임인년 여름에 비는 줄곧 달포를 이어서 내렸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장마철을 보내는 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지루하고 마음이 답답하기 말할 수 없었다. 심심풀이로, 벼루를 들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았다. 친구들과 오가면서 보낸 편지를 서로 붙여 뒷면에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었다. 글의 마지막에 역옹패설이라고 썼다.
櫟(상수리 역으로 상수리 나무이다.)자에는 樂(즐길 낙)자가 붙어 있는 것은 본래 소리로 나타낸 것이지만, 상수리 나무가 재목감이 못 되어서 오래 동안 베어지지 않으므로, 생명을 늙도록 부지하는 것이 즐겁다는 뜻이다. 그래서 낙자를 붙였다.
나는 벼슬아치로 일하다가 스스로 물러나서 옹졸함을 지켰다. 호도 역옹이라고 했다. 나도 상수리 나무처럼 재목감이 되지 못하여 수명을 오래 누릴까 해서 지은 호이다.
패(稗-벼논의 피라는 뜻이다.)자에 낮고 미천하다는 비(卑)자를 붙인 것도 역시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뜻으로 살펴보면 돌피(稗)는 곡식 중에 지극히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어서 글 읽을 줄을 알았으나 장성하면서 그 배움을 버렸다. 지금은 늙었는데도 도리어 잡문(雜文) 쓰기를 좋아하니 모자라는 것이 마치 돌피(稗)와 같다. 그러므로 내가 심심하여 기록한 것을 패설이라고 했다.”
두 분의 글은 수필은 심심풀이 삼아 쓴 글이므로 가치가 없는 글이며, 또 벼논의 피와 같은 글이다. 라고 했다. 공통적인 것은 ‘심심풀이로 쓴 글’이므로, 두서도 없고, 가치도 없는 글이라고 한 것이다. 거창한 해석을 붙여보자면 그들의 말에는 호이징거가 말한 ‘놀이’의 개념이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붓가는 대로’라는 말에는 ‘심심해서’, ‘놀이삼아’라는 뜻이 강하다. 그러나 용매수필이나, 역옹패설이 저자가 말하듯이 무가치한 글들이 아니라고 평한다. 저자의 경륜이 묻어 있는 수준 높은 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놀이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놀이라고 하면 심심풀이, 오락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홍매나 이제현이 언급한 글을 놀이와 연계시키면 놀이는 훌륭한 수필이론이 될 수 있다.
놀이를 좀 깊이 생각해보면 우연, 순간, 모순, 생성, 자유의 가치가 들어있다. 이런데도 인간들이 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너무 인과론적, 기계론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이 인과론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만 존숭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면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놀이도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느끼고 판단을 할 때는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감성과 취향이 기초가 됨으로 미적 판단은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 수필을 읽고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도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다.
근대사회는 노동의 신성함을 말하고, 유용성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근대사회의 가치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피로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돌파구를 찾다보니 놀이도 인간생활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호이징거는 아예 놀이에서 우리의 문화가 태어났다고까지 말했다. ‘붓가는 대로’는 놀이의 성격이 아주 강하다. 비오는 날에 방에 박혀 있으려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지루하고 답답하여 심심풀이로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는 역옹 선생의 말은 바로 놀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수필에는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놀이라면 주제가 아니라, 놀이를 진행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놀이를 수행하는 동안에 쾌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놀이에는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함으로 즐거움을 맛보려는 성격이 있다. 여기에 언어 유희적인 여러 요소들이 작용한다. 놀이의 원형에는 상상력과 연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필쓰기에서 상상력은 바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이는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라고 말한다. 이성으로 만들어 낸 가치는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해석하여 만들어졌으므로 대상이 변화를 한다고 하여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 돌을 다듬어서 비석으로 세웠다 하더라도 이성의 눈으로 보면 여전히 돌일 뿐이다. 그러나 감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르다. 돌이 비석으로 다듬어지면 바라보는 눈은 원래의 돌과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므로, 대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한다. 감성은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 이성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이성충동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욕구가 작용하고, 감성충동은 자연을 통해서 우연으로 바꾸려고 한다. 수필은 대상을 감성적으로 바라보고 쓴 글이다. 대상이 변하면, 감성도 끊임없이 변한다. 바로 감성에 의하여 쓰여진 글이다. 따라서 놀이의 개념과 아주 닮았다.
다시 한 번 수필쓰기를 생각해보면 이성적인 논리성으로 글을 전개하여 독자에게 자신의 주장을 의미(주제)로 수용해달라고 요구하면 재미가 없다.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감성이 작용하는 놀이의 방법으로 글을 쓰면, 놀이의 속성이 수필에 나타난다. 윷놀이를 예로 들어보자. 윷놀이의 승패는 참과 거짓 , 악과 선의 척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윷놀이는 우연, 모순, 자유가 있다. 그래서 놀이로서 가치 평가를 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놀이를 수행하는 과정에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됨으로, 무질서한 것은 아니다. 놀이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에는 장난치다. 비본질적이다. 경쟁이다. 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놀이에는 조롱, 농담 등도 포함됨으로 진지하지 않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진지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놀이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논리적 사유와 개념적 인식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부터 틈새가 나타났다. 용매수필과 역옹패설이 바로 그 틈새를 나타낸 글이다. 이로서 감성적 인식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로서 예술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지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이론이 나타났다.
이제 다시 수필을 생각해보자. 수필은 ‘붓가는 대로’라는 이론이 수 백년, 아니 거의 천 년이 가깝도록 이어져 왔다. 근래에 와서 ‘붓가는 대로’ 론은 강한 저항을 받으면서, 거의 폐기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나도 ‘붓가는 대로’에는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왔고, 지금도 펼친다. 그러나 내가 반대하는 것을 규칙도 없이 무질서하게 하는 수필쓰기이지 완전히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놀이에서 규칙을 없애버리면 놀이가 되지 않는다. 수필쓰기에서 수필쓰기 규칙을 없애버리면 수필이 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우리 수필의 뿌리를 서양의 수필, 특히 에세이에서 찾지 말고, 우리의 고전수필에서 찾자는 주장을 펼쳐왔다. 해학성(농담, 아이러니 등)과, 심심풀이로서 글을 썼다는 고전수필의 놀이성을 가져오자는 것을 말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간적인 본능을 갖고 있다. 인간적인 본능은 침묵이 아니다. 인간적인 본능은 언어적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의사소통만이 전부가 아니다. 언어를 통하여 나의 내면을 드러내고,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 우리는 나의 존재를 이성적인 방법으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인 방법, 놀이의 방법, 수필쓰기 등을 언어에 의지하여 드러낸다. 반드시 진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말이 많아졌다는 충고를 종종 듣는다. 노인이 하는 말은 쓰잘데기 없는 잡소리라는 것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노인일수록 수필쓰기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