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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설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웃동네 수원의 화성(華城) 성곽길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금은 폐교되고 없지만 수원 파장동에 있었던 대학에 적을 두었던 터라, 장안문, 팔달문, 서장대 등 화성 군데군데를 쥐파먹듯 둘러보기는 했지만, 약 6km에 달하는 성곽 한 바퀴를 온전히 돌아보지는 못했었다. 그 시절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 사이 1997년에는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많은 곳이 정비되고 새롭게 단장되기도 했을 것이다.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한 것이다.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1793년에 지은 '성화주략(城華籌略)'을 지침서로 하여,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했다고 한다.
시내버스에 이어 광역버스로 환승하여, 화성의 창룡문까지 500여 미터 거리의 수원시 우만동 정류장에서 내렸다. 월드컵로 위에 놓인 창룡육교를 건너니, 완만한 경사지 위에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이 눈에 들어온다.
성문 밖을 둘러싼 옹성(甕城)과 좌우 바깥쪽으로 돌출된 치성(雉城)에 둘러싸인 창룡문 안으로 들어섰다. 창(蒼)은 푸른색을 의미하여,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성문 안쪽에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는 누런 빛 잔디밭 공터가 넓게 펼쳐져 있다. 한국 전쟁 때 파괴되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다는 문루 위로 올라섰다. 좌우 성곽에는 붉은색 깃대에 푸른색 깃발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성곽에 안긴 성안 마을과 멀리 팔달산 위의 서장대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가운 손님 마냥 얼굴에 내려쬐는 따스한 겨울 햇볕이 더없이 좋다. 너른 잔디밭 위 창공에는 긴 연줄 끝에 매달린 연의 무리가 긴 꼬리를 흔들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연무대 아래 활쏘기 체험장에서는 궁수가 된 사람들이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동북노대, '소라각'이라고도 불리는 동북공심돈 등을 지나며,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순시(巡視)'라는 한자가 적힌 푸른 깃발만 나부낄뿐 병사들은 간 데 없고, 산책을 나온 시민들의 여유로운 발걸음만 성곽길을 채우고 있다.
좌우 5칸 전후 4칸 동장대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라고도 불린다. 그 뒤 성곽 밖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불랑기'라 불리던 휴대용 화포가 눈길을 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을 닮아 '각건대(角巾臺)'로도 불리던 동북포루를 지나고, 화성의 암문 5곳 중 하나인 북암문에서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성곽 아래에는 한 소녀와 용의 전설을 품은 용연(龍淵)이 자리하는데, 그 수면에는 용두바위 위 성곽에 세워진 동북각루(별칭: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가 온전히 내려 앉아 있다.
용연을 휘돌아, 화성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수원천 위에 놓인 남수문과 북수문 중 북수문인 화홍문은 7개의 무지개 모양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징검다리 아래쪽 물 위에 어린 화홍문(華虹門)의 자태가 아름답다.
일곱 개의 무지개 처럼 둥근 아치형 수문 중 물이 흐르지 않는 가장자리 쪽 수문 아래를 지나 성 안쪽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수문에서 교각 아래 계단식 축대로 규수집 여인의 치마폭처럼 너른 물줄기가 하얗게 부서지며 쏟아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은 가히 화성의 백미 중의 백미라 해도 될성싶다.
화홍문 문루에 올라 앉아 탁 트인 주변을 한동안 조망해 보았다. 동북포루를 지나고, 장안문으로 시원스레 이어진 성곽길에 푸른 깃발이 흑색으로 변해 봄바람처럼 포근히 살랑대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이 북동적대와 북서적대의 호위를 받으며 우뚝 자리하고 있다. 북동, 북서 적대에 붙여 세운 치성에는 포신 215cm, 구경 10cm, 중량 1.8톤, 사정거리 700미터의 홍이포가 각각 한 기씩 놓여 있다. 성곽에서 내려와서 성 안쪽과 바깥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장안문을 찬찬히 올려다 보았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3년 봄 어느 날, 한 학년 선배가 주선한 단체 소개팅에서 H여고 학생과 짝이 되었었다. 북문 근처의 다방을 나서서 서장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던 그날의 기억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어렴풋하다. H합섬에서 설립한 직업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을 하던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장안문을 지나서 화서문으로 향했다. 장안문에서 화서공원까지 성곽 안쪽 600여 미터에 걸쳐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맛집과 카페가 몰려 있는 행리단길이 이어져 있다. 화서문이 가까워 지자 점집골목 입구에 '**장군', '*용암' 등 점집들 간판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화성의 서북쪽 화서문 바로 옆, 성벽이 남쪽으로 꺾이는 곳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단층의 누각을 올린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우뚝 서있다. 그 유려하고 누구나 넘볼 수 없을 듯 견고한 자태는 수원특례시의 로고로 채택된 연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화성은 역시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에 비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축조 이후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으로 성곽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축성 직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1970년대 말까지 축성 당시 모습대로 온전히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성곽은 둘레 5,744m, 면적 130ha로 문루 4개, 수문 2개, 공심돈 3개, 장대 2개, 노대 2개, 포(鋪)루 5개, 포(砲)루 5개, 각루 4개, 암문 5개, 봉돈 1개, 적대 4개, 치성 10개, 은구 2개 등 총 49개의 성곽 시설물이 복구 보전되고 있다.(공심돈과 암문 각 개, 적대와 은구 각 2개는 소멸)
화서문을 지나자 깃발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성곽은 용솟음치듯 서북각루, 서1치, 서포루 등을 지나며, 팔달산 위의 서장대로 오른다. 성곽 안쪽 산비탈에 둥치가 꺾여 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노송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금년에는 산행을 하면서 유독 여러 산에서 습설과 강풍에 줄기가 두동강이 나거나 가지가 꺾인 고목들을 숱하게 보았었데, 이곳의 저 노송들도 자연재해의 횡포를 피해갈 수가 없었나 보다.
팔달산 정상부로 올라선 성곽은 서노대(西弩臺)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군사 지휘소 서장대를 내놓는다. 서장대 처마와 내부에는 정조가 1795년에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친견한 후, 직접 쓴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 글씨와 감회를 읊은 시가 걸려 있다. 성곽 안팎을 한눈에 모두 내려다 보며, 멀리까지 시야가 트여 장쾌한 파노라마를 펼치는 서장대 주위를 한동안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서암문을 거쳐 남문인 팔달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탈길이 나오기 직전 성곽 안쪽에 1992년에 건조된 몸통 앞뒤에 화홍문이 새겨진 거대한 동종인 '효원의 종'과 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소원을 빌며 타종을 하는 체험은 어느 때부터인가 중지된 듯 보인다. 성곽 밖에 관광안내소가 자리한 서포루 부근을 지나자, 성곽 안쪽에 3.1운동기념탑이 자리한다.
함께 산책을 나온듯 보이는 노 신사 네댓 분의 부탁으로 기념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어 드렸다. 이분들은 예천이 고향인 어릴 적 친구들로 금년에 모두 71세를 맞이했다고 한다.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시 <곡강시(曲江)>에서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고 노래했지만, 해맑은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이 분들을 그 누가 고희(古稀)를 넘긴 노인이라고 볼까. 나이답지 않게 청년처럼 활기찬 모습에 존경과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원 화성(華城) 성곽길(2)
남포대에서 남문으로 이어진 성곽길은 가파르기 그지없다. 그 중간쯤 기슭에 난파 홍영후(1898-1941)의 <고향의 봄> 노래비가 서있다. 도미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하여 한때 옥고를 치른 후 친일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가 남긴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낮에 나온 반달, 봄처녀, 퐁당퐁당, 개구리 등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간직한 불후의 명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도 궁벽하고 외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난 난파, 그의 시비를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소인 이곳 이웃 고을에서 만나 기억할 수 있으니,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른 비탈로 내리닿는 성곽 아래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자리하고 있다. 남문 너머로서 대학 시절 주일마다 신우회 교우들과 수원제일교회를 향해 거쳐갔던 시장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흰색 깃발은 어느새 남쪽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다. 항아리 모양의 옹성에 둘러싸인 팔달문 둘레로 차량이 돌아 지나고, 버스정류장엔 주변 시장에서 장을 보러 다녀사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문화재로 지정된 까달인지 팔달문 주변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이다. 많은 인파로 붐비는 팔달문 동남쪽 팔달문시장과 남문시장 부근은 설 대목을 맞아 생기가 넘쳐 보인다.
순대로 늦은 점심을 들며 허기를 달랠까 하여, 수원천 위에 놓인 지동교를 건너서 지동시장 순대골목으로 들어섰다. 칸막이도 없이 툭 터인 공간에 예닐곱 개 순대집이 대여섯 평 넓이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단층 식당가로 들어섰다. 일순 식당 아주머니들이 서로 자기 식당으로 오라며 손짓과 더불어 합창을 하듯 호객?하는데, 초입의 '남문순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은 대부분 예순이 넘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고 가족으로 보이는 손님들도 눈에 띈다.
옆 테이블에서 소주를 반주 삼아 순대볶음을 들고 계시던 노 부부 두쌍, 그 중 한 여인이 대뜸 "인상이 좋아요"라는 말을 던진다. 안성에 사는 노 부부가 수원 정자동에 사는 노 부부를 찾아와서 함께 어우러져 정담을 나누던 중이란다. 정자동 노 신사는 "내가 더 잘 생겼지 않아!"라며 거든다. 고래희라는 칠십이 넘어서면, 무슨 말을 한들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일본의 '고독한 미식가' 프로그램의 노 신사처럼 우리도 점차 혼밥이 일상화되고 있다지만, 혼자서 맛집을 찾아가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여유를 부릴 용기?는 좀체 생기지 않는다. 혼밥이 어색한 세대인 인생 후배에게 쑥스러움을 덜어주는 인생 선배의 배려와도 같은 친절로 느껴져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끓이고 있는 순대국에 앞서 순대와 간 한 접시, 깍두기와 김치가 각각 담긴 작은 단지 둘, 새우젓이 담긴 종지 하나를 먼저 내온다. 뒤이어 나온 순대와 돼지 부속물이 듬뿍 담긴 팔팔 끓인 순대국, 그 비주얼과 맛이 먼 세월의 간격을 뛰어 넘어 아른거리는 옛 기억을 소환한다. 먼저 일어서며 손인사를 하는 노 부부들에게 인사를 보내고, 미션이라도 클리어해야 하는 양, 식탁 위의 음식을 말끔히 비우고 터질 듯 부른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원천 위 성곽을 따라 동남각루로 치고 올라, 멀리 보이는 창룡문을 향해 동3치, 동2포루 등 성곽 시설물을 스쳐 지난다. 성 밖 높은 언덕에 우뚝 자이한 수원제일교회가 유럽 어느 중세도시의 성체처럼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다. 근처에 성밖으로 난 출구가 없어, 학창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교회를 둘러볼까 하는 생각을 단념했다.
성곽을 온전히 한 바퀴 돌아 창룡문으로 돌아왔다. 오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창룡문 성안 너른 잔디밭을 유유자적 거닐며, 봄날처럼 포근한 겨울의 오후를 만끽하고 있다. 높은 빌딩이라곤 보이지 않는 성안 탁 트인 하늘에는 길게 푼 연줄 끝에서 갖가지 모양의 연이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다. 저 연들처럼 내게도 나의 영혼이 자유로이 노닐 수 있는 하늘 한쪽이 허락되면 좋겠다. 25-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