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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과 역사적 의의 1. 불타는 베트남 1965 한국군 베트남전 파병 문제 대두 월남과 월맹의 내전에 미국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자 예상과는 달리 뜻밖에 자유진영 국가의 호응없이 미국만의 고독한 전쟁으로 이끌어 갔다.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점점 확전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1965년에 들어서자 국지전에서 남북 베트남 전역이 북폭과 함께 불타오르는 전역화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명분은 한국전쟁에 개입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유 월남공화국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와 평화를 위해 공산화 방지를 내세웠다. 미국은 우리나라 전투 병력이 참전할 것을 희망했지만 우리나라는 1964년 7월 15일 월남정부의 요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1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했다. 실제로는 미국의 요청에 의한 파병이었다. 우리나라는 차선책으로 한발 물러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확실한 전쟁판에 말려들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 했다. 한편 월남공화국의 내정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빈번하게 쿠데타가 발생하고 있어 월남 국민의 마음이 이미 월맹의 호찌민을 추앙하고 있는 기현상 때문이었다. 적국의 지도자를 추앙한다면 그 전쟁의 향방이 매우 불안할 것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월남의 부정부패는 극도에 달해 수습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왔다. 당시 채명신 소장은 제5사단장을 마치고 5.16 군정에 관여 후 원대 복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의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에 대한 정세 분석의 책임자였다. 채명신은 월남전 국군 파병 문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차츰 자기에게 다가오는 어떤 예감이 있었다. 그 예감은 한국군 전투부대가 종국에 가서는 베트남전에 투입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북한공산군의 6.25남침 때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이 직접 전쟁에 개입해 패망 직전에 있던 우리나라를 구해 주었다는 사실. 둘째,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미 제2사단과 제7사단 병력은 물론 공군과 해군력으로 한국방어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미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미국이 한국군 전투부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이 왔을 때 우리가 거부한다면 한국방어를 위한 미군 2개 사단을 월남전에 투입하는 경우 한국방어에는 결정적인 방어 공백이 생긴다는 점이 채명신을 압박하는 정세의 흐름이었다. 한편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더 중요한 문제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한국군 자체에 관한 문제였다. 1965년 당시 한국군은 3류급 군사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개인화기는 2차대전에서 쓰던 단발 M1소총과 카빈소총이었다. 당시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 국가의 개인 화기는 모두 자동화기로 바뀌어 있었다. 더구나 북한 인민군까지 AK자동소총으로 장비하기 시작했다. 공용화기는 더 낡았고 트럭을 비롯한 기동장비도 폐차 직전의 고물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가 재정으로는 무엇 하나 해결할 길이 없었다. 만일 우리 국군 전투부대가 월남에 파병한다면 미국으로부터 장비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 요구를 강력하게 독촉하기 시작했고 일부 반론이 제기되자 한국방어의 미군 사단의 전환 배치를 언론에 흘렸다. 박정희 대통령 전투 사단 파병 결심 채명신 소장은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에 은밀히 기획단을 구성해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이무렵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장군이 채명신을 불렀다. 김용배 장군은 6.25전쟁 시 채명신의 직속상관이었고 상호 믿음이 두터운 사이였다. "채 장군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네. 함께 가야겠네" 급변하는 내외정세에 따라 언젠가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총장을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다. 박 대통령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총장의 보고가 끝나고 총장과 채명신이 나갈 채비를 하고 일어서자 박 대통령이 총장을 먼저 보내고 채명신만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채 장군 월남에 전투부대를 보내면 한국군 잘 싸우겠지?. " 낙관을 할 수 없습니다. 게릴라전이니까요" 한국군 파병에 대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이 이자리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격의 없이 파병문제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이자리에서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에 대해 박 대통령이나 채 소장이나 결론은 같았다. 결국, 미국의 6.25 참전에 대한 보은, 한국방어에 대한 미국의 보장, 한국군 현대화에 기여, 한국 경제발전의 기회 포착 등의 이유로 어려운 결정이 내려졌다. 박 대통령과 채 소장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각별한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었다. 육사 후보생대대 중대장 박정희 대위와 육사 5기 후보생, 임관 후 백골병단이 적지에서 귀환시 환대한 대령 박정희 제9사단 참모장 과 중령 채명신. 이어서 5.16 거사시 동지 관계인 박정희 소장과 채명신 준장. 뒤이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채명신 감찰위원장 등 이런 인연으로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5.16 거사 성공 후 채명신 소장은 혁명공약 준수를 내세우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 직을 사퇴했다. 박정희 의장은 정계진출을 권했지만 채명신은 '평생 군인이고 싶다' 고 사양한 후 육군본부로 원대복귀했다. 전투 사단 파병 준비 착수 이 무렵 언론은 일제히 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국회는 물론 군부를 비롯 학계 종교계 모든 분야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가운데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극렬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여당은 6.25전쟁시 미국이 우리를 도왔고 지금도 미군 2개 사단이 한국방어의 중요부분을 맡고 있으므로 공동 전선을 펴야 한다고 했고 야당은 미국의 청부전쟁(請負戰爭)에 용병(傭兵)이 될 수 없다며 맞섰다. 대다수 국민 또한 두 갈레로 찬성과 반대가 갈라져 열을 올리며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만은 육, 해, 공, 해병대 모두 한결같이 베트남전 참전을 원하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국군 현대화 때문이었다. 장비면에서 3류급 군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비 노후화는 말할 것도 없고 유지 또한 막막 하였다. 겨우 미국의 군사원조에 기대고 있었지만 모든 보급품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였다. 최 전선의 연대장이 전방 GOP대대에 정찰을 위해 찝차로 떠나려 해도 폐차 직전이라 고장나기 일수였고 설혹 수리가 되었다 해도 휘발유가 모자라 주춤하게 되는 경우가 흔했다. 실탄이 모자라 사격훈련도 제한을 받았다. 한편, 국군의 직업군인 대부분은 전투경험을 갖기를 원했다. 당시 북한군은 DMZ 등에서 도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우위의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전투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한 국가,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군과 공동 전선을 펴가며 미국의 군사지원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삼류군대를 벗어나기 위한 기회가 왔으므로 적극 이 기회를 이용해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 국군장교들의 거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채명신 소장은 베트남전 국군 파병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의 흐름에 대해 촉각을 세웠다. 그 가운데서 육, 해,공, 해병대의 동향을 주시했다. 그 결과 예상보다 훨씬 베트남전 참전 찬성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파악한 후 파병 준비작업에 정식으로 착수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채 소장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참모총장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김용배 총장실로 향했다. "보고사항이 있습니다" "그래, 어디 들어보지" "베트남전에 전투부대 파병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 "지금 상황으로 국민의 여론과 정계의 동향에서 찬성 쪽이 우세합니다. 야당이 반대하지만 제가 앞장서서 돌파해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군의 동향입니다. 육, 해, 공, 해병대 공히 압도적으로 참전 의견이 우세합니다." "전쟁터에 간다는데도?" "그렇습니다. 국군 현대화가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전투경험 축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허, 그거 바람직한 흐름인데?. 좋아, 내가 오늘 중으로 각하에게 보고 하겠네" 그날 오후, 대통령의 승인이 내려왔다. 채 소장은 연구목적으로 착수하고 있던 파병 준비 작업을 실제 파병을 위한 준비 기획단으로 발족시켰다. 파병 준비작업은 전략가로 유명한 작전참모부 차장 이병형 소장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소장은 채 소장보다 선배인 육사 4기생이다. 제1사단장을 역임한 후 채 소장 아래 작전참모부 차장직을 맡고 있었다.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당시 미군이 요청한 전투부대는 보병 1개 사단이었다. 그래서 파병 부대로 군단 예비로 있는 강원도 홍천의 수도보병사단을 잠정 결정하였다. 다음으로 대대장급 이상 고급지휘관에 대한 선발 기준을 정했다. 모든 고급지휘관은 우선 6.25전쟁 참전 경험과 무공훈장을 받은 전투 유공자를 자격 기준으로 정했다. 다음으로 현대전 경험과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고려해 미국 군사학교 졸업자, 이어서 당해 지휘관을 이수한 경력자를 기준으로 추가했다. 즉 대대장의 경우는 이미 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대대장 경력자라야 그 기준에 포함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기준으로 기본적인 파병계획은 완성되었다. 국군 전투 사단 파병안 국회 통과 그동안 국회에서 '베트남전 파병 결사반대' 를 외치고 있던 야당 진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국군의 동향에서 영향을 받았다. 국군이 '스스로 싸우로 간다' 는데 반대의 명분이 줄어든 결과였다. 채 소장이 국회에서 부리핑 말미에 국회의원에게 설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당 위원님께서 지적하신 국군 파병을 '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용병' 이라는 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경비가 미국으로부터 지원되므로 경제 논리대로 본다면 '미국의 용병'이 맞습니다. 저는 그 비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의원님, 지금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의 군대의 개인화기는 자동 소총으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북한군까지 AK자동소총입니다. 우리는 세계2차대전 때 쓰던 낡은 M1소총입니다. 정부에 여러번 소총 교체를 요청했지만 예산이 없어 불가능하다는 답변입니다. 제나라 군대의 소총 하나 사지 못하는 빈 털털이 나라에서 네 돈 내 돈 따질 때입니까?. 의원님 여러분, 명분상 반대는 하시되 눈감아 주십시요." 이때 뒷줄에 앉아 있던 야당 중진 의원 두 분이 야당 반대 대열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나는 당론과 관계없이 국군 파병에 동의합니다." "나도 동의합니다" 모든 의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야당을 이끌고 있던 예비역 육군중장 김홍일 의원과 박순천 의원이었다. 이후, 1965년 8월 13일 마침내 '국군 전투부대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 문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채명신 소장에 의해 기획 완성된 베트남전 국군 파병 세부안이 그대로 승인 되었다. 파월 사단은 수도사단이 원안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가 적극 참전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남겨두고 그 대신 해병여단을 편성에 포함 시켰다. 채명신 소장에 의한 계획안에는 파월 수도사단의 지휘관으로 그의 차장으로 있던 이병형 소장으로 건의 되었으나 대통령의 결제 과정에서 채명신 소장으로 바뀌었다. 채명신 소장이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수도사단장으로 임명 된 것이다. 이어서 수도사단을 맹호사단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문제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브라운 미국대사와 대담하는 가운데 한국에서처럼 미군사령관의 작전지휘하에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말이 오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당국자는 물론 주월미군사령부에서도 한국군 맹호사단이 월남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주월미군사령관 휘하에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채명신 소장은 다른 의견이었다. 한국군 사단을 비롯한 모든 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자신이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마음을 정해 놓고 있었다. 다만 작전은 주월미군사령관과 월남군사령관 삼자 협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 기도에 대한 우리 군사력의 한계 때문에 전시작전권이 미군 사령관에 주어졌지만 외국에 파견되면서까지 미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면 '청부전쟁에 말려든 한국군은 용병'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채명신 장군의 전략 콘셉트 채 소장은 이 민감한 작전지휘권 문제에 관련해 자기 혼자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박 대통령의 생각도 달라져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 했다. 며칠 후 박 대통령과 단 둘이 대담하는 기회가 생겨 청와대로 향했다. 박 대통령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 주월한국군사령관 어서 오시오" "각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싸워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꼭 승리하고 돌아와야지" 소파에 앉자마자 채 소장은 급한 김에 어려운 문제를 꺼냈다. "각하 제가 듣기에는 브라운 미국대사에게 주월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사령관에게 위임한다는 의중을 말씀하신게 사실입니까?" "그래, 한국에서처럼 미군과 협조도 잘 될 것이고 미군으부터 직접 지원도 받을 수 있고.., 그게 어째서?"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채명신을 바라보았다. "각하, 안됩니다. 작전지휘권은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왜?. 안된다니...," "주권 국가의 군대로 파견되는데 왜 미군의 지휘를 받습니까?, 지금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든 용병이니 하며 외치고 있잖습니까?, 베트남전에서 월남군도 미군 작전지휘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박 대통령은 흥분한 얼굴빛이었지만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브라운 미국대사에게 말한 것은 그저 나 혼자 생각했던 것이고 관계관의 의견을 들어보니 작전지휘권은 그대로 한국군이 행사하되 미군과 긴밀한 협조하에 싸우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넌지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국방장관에게도 각하가 말씀하시면 나머지는 제가 해결 하겠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채 소장은 결론이 났다고 확신했다. 박 대통령이 한국군 독자 작전지휘권을 결심한 이상 이제 자신이 해결 할 문제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그날 바로 국방장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에 대한 자기 의중을 밝혔다. 그러나 그 문제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난제는 더욱 멀고 먼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채명신 소장이 직접 박 대통령에게 밝힌 한국군 독자적 작전지휘권의 당위성과 명분 가운데 밝히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사실은 그 내용이 가장 실질적인 핵심이었다. 만약 한국군이 미군 지휘하에 작전을 한다면 미군사령부에서는 가장 힘든 곳 어려운 국면에 한국군을 투입할 것이 뻔하리라 생각했다. 매우 어려운 전쟁, 불확실한 전쟁에서, 계속되는 혼전에서 상상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면 국민에게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싸움터에 가는 장수가 부하의 생명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칫 이를 표면에 내세우면 '비겁한 장수'라 할 것이고 미군은 '그럼 너희들은 편하게 싸우고 우리는 사지에서 싸우란 말이냐'고 불만을 털어놓을 것이다. 채 소장이 판단한 베트남전은 미국이 아무리 군비를 쏟아붓는다 해도 결국은 베트콩과 월맹군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첩첩이 난제가 쌓여 있다고 보았다. 당시 채 소장뿐만 아니라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채명신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월남에 군부 쿠데타가 연례행사처럼 일어났고 월남군의 군기문란 부패 상태가 갈수록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채명신 장군의 전략 콘셉트는 가장 적은 희생으로 명분을 세울 수 있는 방법에 지향할 수 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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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 장군님
베트남 전쟁은 우리 파벙 젊은이들
희생에 피의 굴레이지요
우리 전우들 참 많이도 전사에
가슴이 아픔니다
왜 남의 나라에서 득도 없는
전쟁에 국가는 경제발전의 이바지로
나라는 부강의 굴레에 섰지만
그 참혹한 희생의 넋은 슬픔입니다
이젠 엥간한 연세들
남은 歲月 아프지 마시고
그저 건강하시길 바라옵니다
박장군님께서도 강녕하십시오!
전우들의 거룩한 희생으로 3류 국군이 1류 국군으로 도약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세계에 그 용맹성을 떨쳤습니다.
함 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선진화 원동력을 갖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