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하나
―수컷이라는 것들
오승근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정류장의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을 쏘고 있는 열쇠 하나
보도블록 틈새를 벌리며, 그 사이에 끼어 있다
꽉 끼워 맞추던 시절 있어
채이는 동안에도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
닳아 낡아빠진 듯한 이목구비를 가지고도
아직도 하늘과 별, 달과도 눈빛 맞추고 있구나
화려하게 열었던 한세상을 더듬고 있구나
누군가에게 밟히는 느낌만으로 구멍 맞추며
내 마음대로 세상의 문을 여닫던 지난날
세상을 아주 잠가버리고 싶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던 시절 있었다
잡고 있던 누군가의 마지막 손을 놓쳤을 때
다 닳아 헐거워진 세상을 겉돌기 시작했었다
수컷이라는 것들 다 그러지 않았던가
품속에서 당당하게 한자리 차지한 채
한 시절 제대로 힘깨나 쓰던 날,
누구든 요구할 때마다 쉽게 열어 주지 않았던가
열쇠를 주워 이물질을 닦아본다
많이 닳았다고는 해도 제 구실은 할 듯싶어
가로수의 사타구니에 끼워 넣어보자
더욱 강렬하게 푸른빛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기다리고 있던 막차가 지나갔다
풍장놀이
노을이 물든 강둑을 따라
거나하게 취해 돌아오고 있는 아버지
휘청거리는 걸음 위로 상쇠가 쓰는 상모인 양
바람에 나풀거리는 하얀 갈대꽃을 보았다
당신이 고래고래 돌아올 때마다
격렬하게 펼쳐지는 풍장놀이를 구경하고자
동네 사람들 춤꾼들처럼 모여 들기 시작한다
마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들고
상쇠가 되어 악보를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
넌더리가 난 식구들 아무도
패거리가 되어 맞장구 쳐주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상쇠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북이 된 어머니 둥둥거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날을 저리도 동동거렸던가
찢어질 대로 찢어진 소리에
물새들마저 울고 간 적 여러 번 있다
풍장놀이에 익숙한 동네사람들 여럿
놀이에 끼어들 생각마저 잊은 채
높고 낮은 음계에 따라 어깨만 들먹들먹
참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가지 들고 맞장구치기 시작하는 누나
풍장놀이에 치를 떨며 살아오던 누나는
책가방마저 팽개치고 집을 뛰쳐나간 뒤
몇 년 만에 신들린 사람처럼 돌아왔다
한번 시작된 풍장놀이는 한바탕 끝나야
잠잠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겁에 질린 채 뒷전에서 지켜보고만 있다
아버지가 한 옥타브를 더 높이자
뒤질세라 한 코드를 더 높게 잡는 어머니
그렇게 풍장놀이가 절정에 이를 때면
참았던 설움이 복받쳐 오르면서
나는 징이 된다
고요한 강가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징소리
완전한 풍장놀이패가 결성되어
그렇게 한바탕 어우러지고 있었던가
산 그림자 어둑어둑 마당에 내릴 때서야
상쇠가 지쳐 마루에 쓰러지고
격렬했던 풍장놀이는 막을 내린다
찢어진 북소리 홀로 애달프다 하는 마당엔
별빛이 쏟아져 놀이패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풍장놀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버지의 풍장을 치른 다음 날부터였다
오승근
충남 공주 출생. 2009년 『유심』으로 등단.
―『시에』2010년 여름호
첫댓글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풀어낸 마을 한 가족의 풍장놀이...울컥 서러운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풍장놀이란거 자체가 서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