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만 안 왔지 하늘빛은 오늘과 꼭 닮았던 지난주, 나는 경주 드라이브 코스를 기차여행자 취향에 맞게 만들어 느긋하면서도 알차게 누볐다. 신라의 천년고도로만 바라보기 일쑤였던 경주를 철저히 기차여행자 시선으로 다시 보니,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의 존재로 꽤 많은 기차역이 소재하지만, 정차 않고 홀연히 지나치는 폐역이 대부분이란 사실에 이번 여행의 동기를 두게 되었다. 만약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면 10개 넘는 역을 모두 둘러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비 내리기 전까지 반나절 정도였기에 총 여섯 개인 중앙선 소속 역들과 만났다. 이렇게 다음 경주 여행 주제는 자연스레 동해남부선 기차역들로 정해졌고 난 그 코스를 소화할 날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한다. 세상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변모하며 형체 없는 추억의 존재들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보니, 다음 경주 여행에 대한 느낌이 한층 더 다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빠르고 편리한 경부선 KTX를 통해 신경주역에서 시작된 경주 드라이브 코스, 그 첫 번째는 중앙선 아닌 동해남부선 소속 폐역 동방역에서 열었다. 중앙선 간이역과 폐역을 둘러봤다는 서두와 달리, 동해남부선 동방역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이유란 입구 부근 담벼락에 제철 맞은 능소화가 활짝 피었기 때문이다. 그 규모는 사진으로 본 것과 달리 매우 소소한 편이지만 왠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이 상당해 연꽃 핀 안압지와 비할 만큼은 아니지만 찾는 이들이 많다. 역무원이 상주하지 않고 정차하는 열차 없이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동방역은 경주역과 불국사역 사이에 있다는 걸 이번 만남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참고로 하루에 몇 차례 안되지만 열차시간 잘 맞춰 경주~불국사 간을 무궁화호로 이동하는 걸 권한다. 여기저기 빙빙 돌아가는 시내버스보다 눈에 띄게 큰 시간적 효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도 기준 불국사의 입구 불국사역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역시 강조해본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부근에 있는 서경주역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이 만났다 흩어지는 분기역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경주역, 고속철도역인 신경주역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지만, 분기역으로 비롯된 철도의 기능적 중요성은 크다. 오래된 간이역, 폐역 특유의 건축미를 살펴보는 목적이 더 큰 여행이었기에 열차 운행 시간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나, 하늘이 알아서 도왔던지 서경주역에 진입하자마자 무궁화호와 마주쳤다. 이른 아침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부산 부전역까지 8시간 정도의 대장정에 임하던 무궁화호 1621,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여 서경주역엔 3분 정도 머물다 다음 정차역 경주역으로 나아갔다.

청량리~경주 간 380.1km 규모인 중앙선은 서울~부산 간 경부선과 함께 우리나라 양대 종관철도다. 하지만 철도 시설의 현대화 수준은 영동선, 서부 경전선, 경북선, 장항선과 함께 미약한 수준인데, 전 구간에 걸쳐 복선전철화가 되지 않은 점이 그 근거로 작용한다. 중앙선의 경우 영주역 이남부턴 디젤기관차가 객차를 이끌고 달리는 게 오늘의 모습이지만, 조만간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그 변화상의 대표적인 사례는 원주, 안동역 이전일텐데 경주의 중앙선에선 모량역을 통해 신구(新舊) 중앙선이 十자 형태로 교차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 없는 무궁화호가 모량역을 의식하지 않고 빠르게 지나치는데, 앞으론 고가 선로를 이용하게 되므로 그 존재감은 한층 더 희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귀여운 크기의 역에 깃든 아날로그 감성은 이번에 마주친 그 어떤 역들보다 짙고 깊었다. 옛 철도청의 흔적이 여러군데 남아 2000년대 이전으로 시간여행을 은근히 돕는다.

경주와 영천 사이에 위치한 건천읍은 경부고속선 신경주역과 중앙선 건천역을 품고 있다. 이 단락에선 동대구~포항 간 무궁화호가 하루 왕복 네 번 정차하는 중앙선 건천역을 다루는데, 소읍기행 중 마주치는 간이역 느낌이 한적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특유의 낭만으로 표현된다. 위치상으로 건천역은 작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JTBC 예능 프로그램 <캠핑클럽>을 통해 명소화된 화랑의 언덕 관문역으로 여겨도 무리되지 않는데, 거리상 가장 가까울 뿐 실제 연계 대중교통은 전무하다보니 카쉐어링 서비스 이용 가능한 신경주역부터 다가가는 게 현실적이다. 읍 단위 지역에 소재한 기차역이다보니 서경주역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역무원과 마주칠 수 있었다. 중앙선 간이역을 여행 중이라는 내 소갯말에 달짝지근한 역무실 커피로 응답해주셨는데, 여행 시작하며 사먹은 유명 커피 브랜드의 맛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드라이브 스루엔 없는 인간미가 잔뜩 깃들었기 때문일 것 같았다.
주변에 위치한 문화재까지 촘촘하게 둘러본다면 알찬 당일치기 일정도 가능하지만, 나는 기차역들만 둘러본 관계로 반나절만에 경주의 중앙선을 살펴보게 되었다. 아화역은 그 여정의 끝을 맺은 곳인데 역 앞으로 난 시골길이 은근히 인상 깊었다. 한편 불타는 언덕으로 읽히는 아화(阿火)을 통해 여름이 악명 높은 곳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는데, 그걸 의식했기 때문인지 안 그래도 습기로 활약을 푹푹 찌던 느낌이 보다 확실하게 와닿았다. 2008년 1월 1일자로 아화역은 폐역이 되었지만 중앙선, 대구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될 2022년 12월경엔 영업을 다시 재개한다는 계획이 있다. 하지만 새로 지어질 역사의 위치가 지금보다 살짝 북쪽인 심곡리이므로 그 명칭 역시 심곡역으로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