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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들), 그리고 현실이라는 가상
- 서호준, 엔터 더 드래곤, 파란, 2023.
임지훈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박태원이 21세기에 살았더라면, 그래도 천변을 걸었을까? 아니면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 속의 세계를 걸었을까?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탐문하기 위해 걸었던 구보의 걸음은, 몇 번의 클릭과 자동이동으로 대체되진 않았을까?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파란, 2023)은 게임 속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화를 다루는 시집이다. 그 무대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임을 알 수 있는 건 판타지 세계관에 등장하는 아이템이나 종족, 습속 따위가 시어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어떤 부상도 순식간에 치유해주는 물약인 ‘포션’에서부터 세계를 떠받치고 지탱하는 ‘세계수’, 숲속에서 자연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뾰족귀 ‘엘프’족, 유동성이 있는 끈적거리는 부정형의 부식석 몸체를 가진 몬스터 ‘슬라임’, 몬스터들이 인간에게 빼앗은 보물을 축적해둔 서식처 ‘던전’, 만물의 근원이자 인간이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할 때 운용하는 ‘마나’와 같은 개념들에 이르기까지. 서호준은 현실과 분리된 환상의 공간으로서의 게임 속 세계관의 단어들을 시어로 운용하여 독특한 시적 공간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 말은 엔터 더 드래곤이 문보영의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과 같이 특정한 게임 속 세계를 시집 전체의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다소 의미가 다르다. 문보영의 시집은 동명의 게임을 한 시집의 공간적 배경으로 사용함으로써 세계 전체를 하나의 알레고리이자 특수한 시적 인과가 작동하기 위한 시적인 근거로 사용한다. 예컨대 배틀그라운드 속 화자들이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한 구역이 금지된다는 게임의 특수한 룰 때문이고, 이것은 곧 현실의 양태에 대한 특수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시집은 다르다. 판타지 게임의 세계관을 시적 배경으로 자주 활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세계관은 특정한 게임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게임’의 세계관으로서 차용된다.
인간을 보고 인간을 말하기…… 캠핑카가 마나를 다 먹었다. 디벡 할리스는 시간을 앞질러 달려서 문제야. 사채를 쓰고 또 온갖 울음소리가 들리는 에어팟을 끼고 집단 망명 신청서를 작성함. 어차피 우리는 같은 종족이야 미래야…… 울타리에 자라던 버섯을 뜯어 먹고 트롤의 똥 위에서 방망이를 타고 파워 섹스를 하고. 자유? 이게 자유? 죽어도 되살아나잖아 같은 몰골 같은 이름으로, 모든 기억을 떠안고, 그리하여 우리는 무시무시한 가명을 쓰기로 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훼손하느라 이야기가 바뀐 줄도 몰랐다.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야 누가 뭘 하든……
- 「그러나 태초마을에서」, 전문.
예를 들어 <포켓몬스터> 게임의 시작점인 ‘태초마을’을 시적 소재로 활용하는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의 경우, ‘태초마을’이라는 시어는 여정의 시작을 가리키는 용어이면서 “죽어도 되살아나”는 재시작의 지점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게임의 용례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활용된다. 특수한 게임의 상황을 시적 무대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한히 보편화함으로서 시적 세계의 한 부분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세계관은 특수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 세계관의 특수성은 보다 면밀하게 말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그 세계관이 특수한 것은 ‘가상’이기 때문일까? 일차원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이와 같이 게임 속 세계를 시적 무대로 활용할 때, 그 세계는 특유의 가상성으로 말미암아 독특한 시적 인과를 창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간직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의 세계관이 갖는 특수성이란 ‘가상’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의 산출물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듯 보인다. 그건 이 세계가 「처음이니까 봐줘야 한다」나 「하나 남은 포션」, 「이 몸 등장?!」 등의 시편에서와 같이 가상의 세계를 차용할 뿐만 아니라 「팔각정」이나 「목차에 두고 온 것」, 「사운드 맨」에서와 같이 현실 또한 시적 무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집 전체의 비중을 놓고 생각해볼 때, 배경으로서의 ‘가상’은 배경으로서의 ‘현실’과 위상학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지위를 갖고 존재한다.
그간 격조했으니 지구편을 시작하겠다. 지구편에 등장하는 것은 위례 지구와 미니 블랙홀이다. 위례 지구에서 골프를 치고 미니 블랙홀로 들어가 가벼운 점심을 먹는다는 이야기.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은 지구편이다. 기어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관찰 결과 눈물은 마르고야 만다. 관찰도 끝나고야 만다. 자신감이 없었다면 이 일을 그만뒀을 것이다.
나는 세면도구를 챙겨 지구편에 등장한다. 단서는 없다. 지구편에서 나긋나긋 말하는 법을 배우고 미니 블랙홀로 들어가 남은 점심을 해치울 작정이다. 그러다 멈추었는데 점심과 입 사이 거리가 멀었다. 멀어 보였다. 정오에는 엄마 생각이 났는데 엄마가 꾸며 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지구편에서 끝내야 한다는 거다. 무엇이 나오든 이 자리에서 다 끝낼 것이다.
- 「지구편」, 전문.
시적 무대로서의 ‘가상’과 ‘현실’이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말은 사실 보다 세밀하게 세공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철학적 의미에서의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라는 층위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가상’을 현실의 모조품으로 바라보는 시각 속에서이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현실’과 ‘가상’의 표지로 작동해야 하는 시어들은 각각의 특수한 위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구분될 수 없이 뒤섞인다. 이것을 ‘블루마블’과 같이 특수한 게임의 상황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특수한 현실에 대한 장난스러운 알레고리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도 정답에는 가닿지 못할 것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중요한 건 지구 편에서 끝내야 한다는 거다. 무엇이 나오든 이 자리에서 다 끝낼 것이다”라는 진술이 아닐까 싶다. 그 말처럼, 서호준의 시적 화자는 ‘가상’과 ‘현실’의 대비 속에서 어느 한쪽에 인간 존재의 실존적 거처로서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구편」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엔터 더 드래곤에 등장하는 모든 화자가 공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지식이란 바로 이 ‘앎’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위상학적인 고려를 통해 성립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가 ‘현실’로 감각하는 일체 또한 가상의 한 판본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그러한 가상에 붙인 이름이 ‘현실’이라는 것일 뿐임을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가상’의 세계 속 ‘나’의 모습이 ‘현실’의 세계 속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리라 손쉽게 가정한다. 하지만 서호준의 시적 화자에게 있어 그러한 ‘나’의 모습이란 현실의 연장에 불과할 뿐이어서, 마치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따위를 지갑에 넣고 관리하듯 각각의 가상 속 ‘나’의 캐릭터는 “엑셀 파일에 관리”(「방치형 마을」)되어 한데 모아져 있다.
1.
자고 또 잤다. 누가 깨웠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턱수염들이 날아다녔던 것 같다. 나를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 사형장까지 걸어가면 될까? 복도는 밤새 밝았던 양 맥아리가 없다. 두 줄로 조깅하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을 셀 때 쓰는 단위와 시체를 셀 때 쓰는 단위가 다르고 상태가 뒤바뀌는 순간을 포착하기는 너무 사람답지 않은 일이라 할까나. 오카나와 들렘송은 그러나 기침 더미를 뒤지다가 진실에 가까워진다.
2.
오늘은 세탁기가 잘 돌아가지 않았고 그곳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오늘은 자고 또 잤으며 누가 깨울 때마다 신경질을 냈던 것 같다. 꿈에서 그랬듯이. 하품이 존나 나오고 입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간 것 같다. 확실하지 않아도 그래 확실하지 않아도 실수로 잠드는 편이 나으니까 나는 되도록 다양한 음식을 먹고 누웠다. 누워서 하는 생각은 모조리 진실이며 그것은 잊어야만 한다. 그런데 ― 한편으로 나 역시 내가 죽이고픈 사람 목록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잠이 잘 오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잊기 위해 지루한 게임을 참으며 하품을 이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하품 마흔두 번, 긴 하품 다섯 번.
- 「하품이 존나 나오고」, 전문.
각각은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나’의 다른 판본조차 되지 못하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잊기 위해 지루한 게임을 참으며 하품을 이어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은 하품 마흔두 번, 긴 하품 다섯 번”이라는 진술처럼, 단지 ‘나’가 경험하는 권태를 견디기 위한 시간에 불과하다. 이 속에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모호하다. ‘나’는 ‘현실’의 권태를 견디기 위해 게임을 하지만, 게임 속 권태를 견딜 수 없을 때엔 현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 아니, ‘현실’이라는 ‘가상’으로 들어온다고 표현하는 쪽이 훨씬 더 적절할 것이다. ‘나’가 어떤 견딤을 위해 게임이라는 ‘가상’을 선택한 것이며, ‘현실’ 또한 권태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카나와 들렘송’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기침 더미 속에서 발견한 진실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가상’이 겹쳐지고 겹쳐져, 심지어는 ‘현실’조차 하나의 ‘가상’으로 분류되어 그 위에 겹쳐질 때, 우리는 여기에서 무수히 겹쳐진 종이더미에서 솟아나온 티끌과 같은 것일지라도, 전체를 관통할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혹은, ‘현실’조차 ‘가상’의 한 종류임을 간파할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상’으로부터 우리가 처한 고착상태의 돌파구가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엔터 더 드래곤이라는 시집이 다루는 진실이란 ‘세계는 존재한다’라거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실존의 증거가 아니라 「하품이 존나 나오고」에서와 같이 끝없는 권태의 양상이다. ‘현실’에 올곧은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나 ‘가상’으로부터 어떤 돌파구를 찾는 것 모두 현실에 대한 부정을 통해 산출되는 ‘현실’도피의 한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다 본원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둘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 심적 경제의 산물에 가깝다.
그러니 ‘공포’는 ‘가상’에 의해 ‘현실’의 지위가 위협받거나, ‘현실’로부터 비현실적인 것으로서의 ‘가상’이 출몰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공포는 ‘현실’ 또한 ‘가상’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자유? 이게 자유? 죽어도 되살아나잖아 같은 몰골 같은 이름으로, 모든 기억을 떠안고”라는 「그러나 태초마을에서」의 시적 진술이 진짜로 공포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진술이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나’가 불현 듯 게임 속의 세계라는 가상에 던져졌기 때문도 아니고, 그로인해 ‘나’의 ‘현실’의 지위가 위협받게 되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의심치 않는 세계 속에서도, 죽어도 되살아나는 언데드Undead와 같은 몰골로 끊임없이 살아가야 할 때, 사실은 이미 그런 모습으로 충분히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을 감각할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가상들이 같은 하나의 룰을 공유하고 있는 계열체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 진짜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이다. 구태여 ‘가상’ 속에서 죽음을 임의적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죽음조차 나를 이 세계에서 바깥으로 꺼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충분히 죽은 삶이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은 삶에서 달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의 화자가 느끼는 권태란, 단지 ‘현실’ 속에서 목적을 잃어버린 인간의 양태에 대한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의미의 것으로, ‘가상’이 ‘현실’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현실’이 가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현실’은 더 이상 확고한 정박점으로써 ‘가상’으로의 여행을 거쳐 귀환해야 할 장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집에서 시적 화자가 종종 드러내는 뿌리 뽑힌 인간과도 같은 파토스에는 이와 같은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이 시적 화자는 자신의 뿌리 또한 ‘가상’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이 게임의 세계를 시적 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상성의 지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가상성을 경유하여 펼쳐지는 지독할 만큼의 현실 인식이다. 그건 21세기적인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적인 것도 아니며, 사이버스페이스적인 것도 아니고, 게임적인 것도 아니다. ‘가상’은 없다는 것도, ‘현실’은 없다는 것도 아닌, ‘현실’은 ‘가상’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통찰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내내 그런 의문에 시달렸다. 만약 박태원이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그래도 여전히 천변을 걸었을까? 이상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구태여 미쯔비시 백화점의 옥상으로 올라 자신의 날개뼈를 쭉 펼쳐내었을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아니지 않을까. 그 모든 걸음은 몇 번의 클릭과 자동이동으로 대체되지 않았을까. 견딜 수 없는 권태를 견디기 위해 가상에서 가상으로 무한히 자신을 옮겨가며,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권태에 시달리면서. 서호준의 엔터 더 드래곤이 길어 올리는 리얼리즘적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공저, 지구 밖의 사랑(넥서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