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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보이소서
33: 7-16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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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 아이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이 아이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애를 키우다 보니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게는 나름대로 꿈도 있고 해야 할 공부도 있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이 아이에게 묶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해도 할 일을 다 못합니다. 그래서 짜증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얘야, 너는 네 자신에 대해 너무 기대가 커서 큰일이다. 마음을 좀더 편안히 가져라. 모든 일에는 때와 기한이 있는 것이다. 지금 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존재가 누구냐?” “그야 아기지요!” “그렇다면 너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나는 지금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일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그 일을 즐겨야만 한다.” 이렇게 권면 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지은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비단 이 어머니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바쁘다, 바뻐. 너무도 바쁘다!’라는 말입니다. 바쁨에 대한 호소를 날마다 들으며 살아갑니다. 이 바쁘다고 하는 사람에게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시간을 더 주면 바쁜 것이 사라질까요? 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면 그것이 해결 될까요? 아닙니다! 시간을 더 준다거나 더 바쁘게 뛴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것이 내 삶 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인가 삶의 우선순위를 세우고, 그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간 활용의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
옛날에는 무조건 일을 많이 하면 최고라 생각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업적주의’라고 합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해낸 일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능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능률주의 사고’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 개념 속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작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얻어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24시간 벽돌을 찍어내는 것, 그것은 귀중한 일입니다. 업적주의에서는 최고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써서 연구를 하여 벽돌 찍는 기계를 만들어내면 그 효과는 훨씬 더 커집니다. 이것이 능률주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능률주의가 산업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고의 틀’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과연 ‘능률이 제일이냐?’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능률도 좋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헛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내가 부산을 향해 달려가는데 시속 백 킬미터로도 좋고 이백 킬로미터도 좋지만, 달려가는 방향을 북쪽으로 돌린다면 아무리 빨리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 바른 가치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 인생은 허무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고 능률적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어떠한 가치를 소유하고 있고 그 가치관에 맞는 삶을 살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로 서야 그는 행복할 수 있고, 가치관에 맞는 시간을 보내야만 후회가 없다고 많은 경영학 교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미래를 시작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실한 노력과, 가장 귀한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에 맞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힘입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40일 가 있는 동안, 이 백성은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 하고 그 앞에 제사를 지내고 뛰놉니다. 이 망령된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내가 이 백성을 진멸하리라”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중보자 모세가 생명을 걸고 기도한 덕에 진노는 잠시 유보 됩니다. 그렇지만 매우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고, 백성은 죄 중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떨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 긴장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33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너희들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가나안에 가라고 하신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입니다. 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 함이니라 하시니.” ‘너희는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너희가 그렇게도 사모하는 그곳으로 올라가라. 말리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끼리 가서 잘 살아라. 나는 동행하지 않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남편에 대해서 너무 험하게 말씀하시길래 듣기에 민망하여 한마디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말씀 하십니까? 좀 더 부드럽게 하시지 않고서” 했더니 그분의 대답이, “저 양반이 지금은 저래도, 옛날에는 속 꽤나 썩인 인간입니다. 주제에 여자는 좋아해서 한평생 나 몰라라 하더니만 돈 못벌고 몸 약해져서 할 수 없어 기어 들어 왔습니다. 내가 인생이 불쌍해서 밥도 주고 옷도 주지만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헤어질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구요? 아이구 징그러워라!” 그 소리를 듣고 ‘다 구박 받는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지금 이렇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으며 우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빨리 도착해서 즐거운 삶을 누리고 재미 있게 살고 싶다’ 하는 소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때는 그것이 아닙니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역량이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백 번 들어가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은 상관 없습니다. 그저 빨리 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일도 못 기다리고 우상을 숭배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나안 가고 싶으면 가라! 보내 준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4절입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너희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셔서 생각해보니, 가나안에 빨리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한다는 그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나안에 늦게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말씀이고 힘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바에야 가나안 땅에 아무리 빨리 간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나안에 빨리 가는 것에만 목적을 둔 사람이 많습니다. 사업이 형통해지기를 바라고, 몸이 건강해 지기를 바라고, 명예를 바라서 안달이 났습니다. ‘내 소원 빨리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며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걸핏하면 돌아가서 우상숭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듯이 예수를 믿긴 하지만 어떤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어떤 때 보면 아니고, 걸핏하면 돌아가서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 가는 것이 소원이냐? 그럼 가라!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이제 우리의 소원을 새롭게 정비합시다. 가나안에 가는 것이 소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소원입니까? 비록 내가 광야에 머물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가치관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세가 한 일이 있습니다. 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진밖에 하나님의 성막을 옮겨 세우고 이름을 바꾸어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전은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가운데, 그들 마음의 한가운데, 그들 삶의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셔야 된다고 하는 의미요, 또한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중에 당신의 장막을 치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이 우상숭배하고 범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진중에 있는 성막을 옮겨서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에 세우고 회막이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회막이란 무엇입니까? 만남의 장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을 만나야만 살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넣어 이름을 회막이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한 의도는 이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은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속에 있다. 그러므로 각성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깊이 각성하고 이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상숭배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매달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만나야만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요, 가장 중요한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회막이라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를 합니다. 이제 그 뒤를 따라가서 벌어지는 현상이 7절 하반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자기가 회막으로 나아갑니다. 그 뒤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모세를 따라 가서, 회막에 나가 기도하게 되고 따라갈 수 없는 자는, 8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은 자기 장막에서 모세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회막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경배하며 집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회막에 나아가서 한 일이 무엇이고 무슨 내용의 기도였는가 우리가 충분히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지금까지 간절히 소원하던 가나안에 빨리가는 것! 이것은 헛된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생활! 주님이 동행해 주시는 생활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떠나지 마시옵소서! 나의 잘못된 가치, 그리고 나의 잘못된 목표, 나의 필요없는 서두름을 용서 받기 원합니다. 이제는 조용히 하나님과의 동행에 최고 가치를 두고 고요히 주님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여 나가다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때에 어떠한 결과가 나왔는가는 9절에 나와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구름 기둥이 회막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한 다음,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인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나서 없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는데, 이제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를 하나님이 맞아주신다고 하는 표로, 구름이 회막 위에 머무르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 징조를 보고 모세가 용기를 얻어 기도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 길을 알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16절 말씀에서, ‘우리를 구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다음 1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하나님, 당신이 가지시 않는 바에야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함께 동행하시지 아니하면 저는 아무데도 못갑니다’ 이렇게 매달립니다. 이때에 모세는 하나님을 친히 목도하는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어두운 과거는 이제 뒤로 물러가고 새로운 미래가 전개됩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 본문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예언이다’ 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뒤로 하고, 성장 자체를 가나안으로 추구하고 있다. 거룩함과 성결, 그리고 삶의 변화는 뒤로 하고 성공의 철학에 물들어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 오늘 교회의 현실이 아니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찌 교회만을 향한 말씀입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말세를 사는 우리를 향한 경고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가나안을 향하여 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항햐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가라! 내 말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내용을 시편106편 15절에서는 이렇게 재해석 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것을 이루려고 네가 그렇게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이루어준다. 그러나 네 영혼은 창백하게 말라 비틀어져 가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여집사님 한분이 제게 전화를 하셔서, “목사님, 우리 애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속상해 죽겠는데 기도 좀 해주세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집히는 데가 있어서 “그런데 집사님은 아이를 위해 기도 많이 하십니까?” 물었더니, “사실은 못해요. 기도를 하려고 해도 시간이 안나요.” “왜 시간이 안납니까?” “제가 직장에 나가거든요.” “아니, 남편이 열심히 일하시는데 뭐하러 직장에 나갑니까?” 했더니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우리 애 좋은 과외 공부 좀 시키려구요” 이렇게 대답을 하셔요. 그래서 “벌어 들인 돈은 과외비로 다 씁니까?” 했더니 “웬 걸요, 우리 애가 사고쳐서 거기 다 들어가고 맙니다.” 이 말을 듣고 “맞아요, 집사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집사님의 경우! 다른 사람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돈 버는 일보다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돈 벌어서 과외 시킨다고 애가 잘 된다는 법도 없고, 고마와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언제나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몇푼 번다고 하면서 집 비우고 또 힘들다 찡그리지 말고 집에서 살림하면 남편도 좋아하고, 몸도 건강해 질 것입니다. 자식의 영혼이 파리하게 죽어가는데 아이 과외 시킨다고 난리쳐서 되겠습니까? 바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직장은 좋은 것이지만 나중에 해도 됩니다. 지금은 돈 몇푼 때문에 나가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귀한 것입니까? 빨리 돈 모아서 더 큰 집 장만하고, 남은 여생 여행이나 다니면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 소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뒤로 하고 쓸데 없는 일에만 바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그래, 네가 좋아하는 것 실컷 해라, 그렇지만 나는 너와 동행하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면 인생 서글퍼지는 것입니다. 바쁘게 산 것에 대한 정당성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영혼은 삐쩍 말라있는데 다른 일이 바쁘다고 뛰어다니는 것입니까? 이러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5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너희는 단장을 제거하라, 근신하라, 그런 말입니다. ‘내가 정말 잘못 살았구나, 헛된 것을 위하여 바빴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관은 뒤로 하고 내 맘대로 살았구나!’ 탄식 하라는 것입니다. 탄식하고 근신하면 여호와께서 생각해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분주한 생활을 내려 놓고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회막으로 나오라. 나와서 기도하라. 새벽기도도 나오고 중보기도도 하고, 시간 없다는 말은 하지 말고 은혜에 동참하라. 그리고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의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치 있고 후회없는 삶을 살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십시요,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가치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길은 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그렇게 살기 위해 매달려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긍휼이 회복되고 영광의 구름이 회막에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 사건이 우리 교회 위에,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생활 속에 꼭 재현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