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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1-31
끝이 시작보다 낫고 / 김봉수 목사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도 중요하지만 죽는 날이 더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태어났지만 마지막에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떠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의 별 관심없이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작은 요란하게 시작했는데 마지막은 흐지부지 끝내는 경우가 우리들에게 참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남쪽 유다의 왕이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그 시작과 끝과 관계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어 17년을 다스렸으니까 그의 삶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오늘 열왕기 기자는 르호보암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남긴 잠언이나 전도서를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잠언을 보면 솔로몬이 <내 아들아>라는 말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전도서에는 솔로몬이 몇 가지 나은 것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도서 7장을 보면 몇 가지 나은 것을 말씀해 주는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하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르호보암이 그의 아버지가 남긴 글 중에 이 부분을 좀 더 명심해서 읽었더라면 오늘 열왕기 기자의 이런 평가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르호보암에 대해서 역대하를 보면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대하11장은 르호보암이 그래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장면들이 몇 가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하12:1을 보면 르호보암이 그 끝이 시작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같이 봅니다.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르호보암의 시작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나라가 견고해지기 전에 세력이 강해지기 전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르호보암이 살았다는 것을 12장 1절이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하11:17을 보면 <그러므로 삼년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던 시작, 하나님을 경외하던 그 시작은 괜찮은 시작,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시작은 좋았는데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이곳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일단 시작이 좋은 분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무튼 좋은 시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처럼 우리들 가운데 이미 좋지 못한 지점에 와 있는 사람도 있을 지 모릅니다.
어쩌면 거의 인생의 끝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르호보암처럼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르호보암으로 하여금 끝이 시작보다 나빠지도록 만들었던 이유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그 대하12;1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여기서 우리는 <견고하고, 강하매>라는 이 두 단어를 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큰 약점입니다.
차라리 약할 때는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차라리 없을 때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어지니까, 조금 강해지니까 하나님 앞에 교만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교회에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초신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그렇게 주님이 좋습니다.
성도들도 좋고 목사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까지 이어져야 하는데, 조금 신앙의 연조만 붙으면 끝이 안 좋아집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배워나가고 신앙이 제대로 성장해 가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과 겸손함은 정비례합니다.
신앙이 바로 성장하면 할수록 겸손함이 더욱 더 해갑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바울이라는 신앙의 위인을 만납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교만함이 극에 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라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 낮아지고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바울은 <성도 중에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을 하고, 또 나이가 많아진 어느 날에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점점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더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가는 상태에 있습니까?
르호보암이 견고해지고 강하게 됨에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는 좋지 못한 끝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시작이 참 좋았는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교만해 있지는 않은 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가 차라리 가난할 때에는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점점 부강해지면서 신앙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영아, 유치부부터 중,고,청 수련회가 마쳤는데, 요즈음은 그렇게 성경학교나 수련회가 인기를 끌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부유하지 않던 시절에는 수련회는 정말 인기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교역자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들이 사정 사정을 해야 겨우 참석해주는 것들을 봅니다.
수련회 보다 더 재미있게 지낼 일들이 주위에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견고해지고 강해지는 것,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전에 예비군들을 관리하는 방위로 군 생활을 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돈 봉투를 주면서 훈련을 빼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합니다.
집에는 병든 어머니가 계셨고 가난함으로 때로는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앙인으로 돈 봉투를 참 잘 거부했습니다.
그런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물질이 더 풍성해진 때에 그런 신앙인의 모습을 보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목사님들 사이에서도 급행료를 얼마만 주면 비자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르호보암이 견고해지고 강해지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인으로 아름다움 시작이 견고해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교만해지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순수하게 봉사하고 충성하던 모습이 어느덧 교만함으로 그 끝이 변하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라고 쉽게 부를 수 있던 찬송이, 이제는 경제적으로 견고해졌기 때문에 입술로 밖에는 부를 수 없는 찬송이 되었다면 여러분들도 끝이 지금 좋지 않은 상태는 아닐까요?
감기만 걸려도 주님 앞에 엎드리고 맡기던 그 신앙이 웬만한 병이 들어도 주님 앞에 엎드리기보다는 다른 길을 찾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끝이 지금 좋지 않는 상태는 아닐런지요?
르호보암의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역대기 기자는 안타깝게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던 때를 돌아보십시오.
혹시 지금은 너무나 많이 교만해져 있지 않은 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약하고 힘이 없던 때,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던 때를 돌아보십시오.
그런데 지금은 많이 교만해져 있지는 않은지요?
시작보다 끝이 좋아져야 합니다.
시작은 미미한 것 같아도 끝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르호보암이 견고해지고 강하여지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린 것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듣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 르호보암이 그 끝이 좋지 않게 된 원인을 보게 됩니다.
본문 21절과 31절에 반복되어서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열왕기 기자는 르호보암에 대해 소개하는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이 내용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밀곰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암몬 사람 나아마를 아내로 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르호보암이 그 모친의 영향을 받은 것을 열왕기 기자는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유다 나라에 온갖 우상숭배가 퍼진 이유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좋았지만 끝이 좋아지지 않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에 참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신앙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늘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까워진 어떤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고 그 끝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앙의 좋은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 특별히 바울 서신들을 읽어 가다보면 바울 사도가 자기의 사역에 좋은 동반자들을 소개하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바울의 사역의 동반자들 중에 귀에 익은 몇몇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좋은 동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 디모데 같은 사람, 혹은 실라와 같은 사람도 바울에게 있어서나 그 상대에게 있어서 좋은 신앙의 동반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그 아합 왕은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만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같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시고 계십니까?
혹시 늘 불평만 하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그런 사람과 같이 자주 만나고 동행하면 여러분은 서서히 좋지 못한 끝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결혼을 할 때에 믿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강조합니까?
잘못한 결혼은 우리의 신앙을 아주 많이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에 있어서 좋은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 24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좋지 못한 것을 본받아 행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형제국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본받아 행했다는 것입니다.
동반자를 잘못 만나면 그 끝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의 동반자를 잘못 만나면 그 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더 볼 수 있는 것은 애굽 왕 시삭이 쳐들어 온 일입니다. 시작은 좋았으나 잘못된 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르호보암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 물질을 빼앗아 가도록 하십니다.
26절을 보면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은지라.>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르호보암이 그 뒤에 취한 행동입니다.
금방패를 빼앗기니까 르호보암이 그 대신 놋방패를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 상식으로는 르호보암이 금방패를 비롯하여 보물들을 빼앗기고 난 뒤에 좋은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런데 금방패를 빼앗기니까 놋방패를 만듭니다.
참 어리석지만 이것이 어쩌면 우리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시작은 좋았지만 잘못된 길로 방향이 갈 때에 하나님께서 르호보암 처럼 물질을 잃도록 하시기도 하시고,육체의 약함을 주시기도 하시고, 혹은 여러 가지 싸인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르호보암 처럼 금방패 대신 놋 방패를 만드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금방패를 빼앗겼으면 하나님을 의존할만한데, 대신에 놋으로라도 방패를 만들어서 자기를 막습니다.
전에 어느 목사님이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니까 택시 기사도하고 학원강사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금방패를 빼앗긴 후에 놋방패를 가지고 버티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그러면 그 끝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나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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