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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과 그 대책 : 박 조준 목사 5: 1-13
고린도는 항구로서 무역의 중심지였고 물질적으로도 윤택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 사람들은 자연히 육신적인 쾌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교의 우상 숭배가 몸에 밴 사람들이다 보니까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순결이라는 것의 의미조차도 모를 정도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옛날 신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은 공창과도 같은 생활과 신을 섬기는 것을 병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하는 대로, 원하는 곳에서 마음껏 성적인 쾌락을 탐닉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여기에 물들지 않으려고 해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말하자면 사방이 이교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신자들은 기독교에 들어온 지 얼마 오래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몇 세대씩이나 이런 생활로 계속 내려왔기 때문에 이교 생활이 몸에 밴 처지여서 이 성적인 방종을 갑자기 단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순수성을 유지하려면 이 낡아빠진 이교적인 생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자를 것은 잘라야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계모와 불의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것은 이교인들의 빈축을 사는 일이고 율법에도 명백히 금지된 일이었습니다(레위기 18:8). 이 죄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고린도 교인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이 사태에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안이한 태도는 언제나 위험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십계명 중에 일곱째 계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4절과 신명기 5장 18절에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취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취하는 행동도 같은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고 육신만 관계한다면 그것은 아내에게까지라도 간음죄가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마음이고, 그 다음이 육체입니다. 이 순서는 정당한 부부 관계에서나 범죄의 경우에나 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 계명에 대한 교훈을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신 가운데 여섯째 복과 관련시켜서 “마음이 깨끗해야 할 것을 가르친 교훈”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퍽 의미 깊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계명 중 일곱째는 한마디로 말해서 “깨끗하게 살아라” 하는 말씀의 집약이기도 합니다.
본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짝을 지어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서로가 의지하고 상대방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하며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사는 생활이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신부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이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가정을 깨끗하게 잘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끗할 때만 그 가정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우리의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 단위입니다. 가정은 말하자면 사회의 질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문란하게 되고 파괴되면 그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왕성하던 로마가 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문화를 주름잡던 헬라의 영화도 간음 때문에 망해 버렸습니다. 찬란하던 폼페이 도성도 간음 때문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진리는 마치 바다 가운데 거대한 암초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 암초 위에 부도덕한 개인, 부정한 가정, 성적으로 타락해 버린 사회가 길 잃은 배처럼 와서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서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옛날의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만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거나 외국에나 있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나라에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산은 세계 10대항에 속하는 국제 항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 가지 도덕적인 타락성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어느 신용금고를 경영하고 계시는 장로님 말씀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한 번 나올 때 2천만원 내지 2천 5백만원 정도를 가지고 나올 수 있는데 이렇게 네 다섯번하여 1억원 이상의 돈을 한국 금융기관에 예치해 놓는답니다. 그리고 매달 나오는 이자는 부산에 있는 현지처가 찾아가도록 해서, 한국에 오면 호텔에 들지 않고 마련해 준 현지처의 아파트에 묵으면서 일을 보다가 일본으로 가는 경우가 눈에 띄게 많다고 합니다. 부산뿐이겠습니까?
서울도 고급 아파트 지역에는 큰 회사 사장이나 회장이 작은 집을 얻어 놓고 드나드는 경우가 많아서 작은 부인이 몸은 호화롭게 지낼 수가 있으나 마음이 버젓하지 못하고 불안한 가운데 지내는데, 이웃이 (내용은 모르고) 교회에 인도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간음에 대한 설교를 하면 반응이 좋지 않게 나타내기 때문에 그런 설교는 퍽 조심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큰 일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간음이 죄라는 말을 눈치 봐 가면서 조심스럽게 할 정도가 되었으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많은 부인이 기분 나쁘면 헌금이 줄어 교회 예산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지, 아니면 불쌍한 영혼이 아예 떠나가 버리면 망하게 될 것이 가슴 아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두 가지 강력한 욕구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식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산하여 자기의 대를 잇게 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욕구를 부패시켜서 결국 위험스런 욕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도덕적인 재난으로부터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간음치 말라”는 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을 분명히 들으셔야 합니다. 이 계명을 우리는 존중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계명은 성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이 계명은 새로운 삶에 이르는 징표입니다.
그런데 성적 문제에 대한 대답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이는 “성은 무조건 억제하라”고 합니다. 극기를 강조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대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폭탄을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폭탄을 땅 속 깊은 곳에 파묻어 버리면 됩니다. 강물이 흐르는데 넘치지 않게 하려면 튼튼한 댐을 만들어 흐르는 물을 막아 버리면 됩니다. 이 방법이 어떤 경우에는 효과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둑에 쌓인 강물은 그 둑이 터질 때까지 굉장한 압력을 가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둑을 터뜨리고 맙니다.
억제와 제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재란 수문이 있어서 물이 운하로 흘러 내려가도록 건설적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제는 물이 흐르는 데다가 둑을 막아서 물이 아예 흐르지 못하도록 막는 명령입니다. 억제는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거의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매우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꼭 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구체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모든 것이 억지로 하다보면 무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을 완전히 개방하라”고 해서 성 해방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해결책입니다. 오늘 이 방법을 좋게 생각해서 그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능에 맡겨라. 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라. 그러면 제 길을 찾을 것이다. 자신을 제재해서 개성을 감추지 말라. 자유를 즐기라. 아무도 너에 대하여 간섭하게 하지 말라. 형편이 닿는 대로 누구와도 데이트 하라. 그리고 새로운 도덕관을 가지고 살라. 옛날 빅토리아 여왕 때의 청교도적인 도덕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주어진 생을 만끽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좋게 생각해서 찬동하고 그대로 사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정말 사람 사는 맛이 있는 것처럼 압니다. 얼마 못 살다가 가고 말면 그만인 세상, 마음대로, 육신이 하자는 대로 즐기며 살아 보자는 생활 철학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탕한 자리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그 결과로 맺어진 열매가 무엇입니까? AIDS라는 무서운 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AIDS는 순전히 부도덕한 성생활에서 생긴 유물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과 피해가 얼마나 큽니까?
사실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병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수술을 할 경우 수혈을 해야 하는데 AIDS 병균이 있는 사람의 피를 수혈할 경우 100% 이 무서운 병에 전염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물론 혈액 은행에서 검사를 한다고 하지만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술시에 수혈을 하는 경우에 얼마나 마음이 불안한지 모릅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미국에서 큰 수술을 했는데, 저의 수술은 수혈과는 상관없는 수술이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 당시 수혈을 했다면 지금쯤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을까?’라고 생각하면 몸서리가 납니다.
죄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큰 피해를 줍니다. 이러한 부도덕한 생활로 인해 오는 가정의 파탄은 또 얼마나 심각합니까? 분별없는 자유와 무책임한 진보들은 우리의 고귀한 자유를 방종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고 음탕하게 되어 버릴 때 인류 사회는 자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격이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기에는 너무나 죄 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미 고대 로마의 시세로는 “법이 없는 자유는 무질서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마와 헬라 그리고 고린도의 멸망의 원인을 보세요.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런 일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했습니다.
성을 완전히 개방한다는 것은 가장 진보적인 것 같으면서도 인간 사회에 대한 가장 원시적인 대답입니다. 인간의 도덕이란 자연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의 윤리는 천성적인 본능에 기초를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도덕관이 자연법에 기초를 갖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기초를 둡니다.
한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여자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도덕이란 개인의 욕구나 쾌락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모두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정당하거나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도덕적인 사람이란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치를 즐기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하다고 해서 그의 사치가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덕이란 지역 사회의 표준에 기초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우리 나라의 경우 열 사람 중 여덟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행위는 될지 몰라도 도의심의 기초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서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확실한 근거 위에 있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이란 합리화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확실한 이유는 그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도덕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적인 양심입니다. 어떤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한 우리의 도덕관은 그 기초로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길, 바로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을 억압하거나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폭탄을 땅에 파묻지도 말고 터뜨리지도 말고 조심스럽게 폭탄을 해체해서 폭발의 가능성이 있는 힘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수로없이 둑만 쌓아도 위험합니다. 메마른 사막에 물을 댈 수 있으며 쓸모 없는 모래땅을 비옥한 농토로 변경시킬 수 있는 관개 시설이 된 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가게 해야만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산 나라들은 서양 문명이라고 하는 큰 문명을 창조하였습니다. 일부일처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가정이란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간음, 음란한 행위는 그 아름다운 그림을 망쳐 놓습니다. 위대한 걸작품을 칼로 갈기갈기 베어 버리는 예술의 파괴자와 같은 행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품는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쓰고 살며 누구에게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석이 아니라면 다 같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시적인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이런 감정이 오래 머물러 있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미운 생각, 미운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음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음란한 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품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알이 부화됩니다. 음욕을 품고 있으면 간음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내 마음, 내 생활을 깨끗하게 가질 수가 있습니까?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우리 삶 속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시멘트 길에는 불이 떨어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휘발유 탱크 위에 불꽃이 떨어지면 폭발하고야 맙니다. 음행에 대한 유혹이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고 있는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불꽃이 물이나 콘크리트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마치 기름 탱크와 같아서 성적인 유혹의 불꽃이 떨어질 때 폭발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꼭 영접 합시다. 그래서 어떤 유혹 속에서도 깨끗하게 살아 약속 있는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