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한국명수필선> 5호 발간에 즈음하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시대와 사회가 변하는 만큼 문학도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삶의 현실이, 그 현실 속에 몸과 마음을 던져 놓고 있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바뀌는데 그 삶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도 드러내는 문학이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명 비평가인 옴베르토 에코는 “과학 기술에는 냉혹한 법칙이 있다. 부자들이 단독으로 사용할 때는 제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손을 대면 자동으로 멈춘다”라고 말했다. 정보화 혁명의 열매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21세기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다. 정보의 바다를 능숙하게 항해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수집해 이를 유익하게 이용하는 사람만이 돈도 벌고 출세도 한다.
정보는 곧 지식이다. 지식을 능란하게 골라 쓰지 못하는 사람은 정보화기대의 주역이 될 수 없다. 수필의 운명도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수필 창작에 대한 새로운 정보, 고급문학으로 새롭게 변신한 수필의 이론에 대해 알지 못하고서는 문학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수필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구태의연한 ‘잡기’를 쓰는 방식으로, 또는 ‘여기’를 적는 식으로 글을 써서야 어떻게 작가로 불릴 수 있을 것인가. 새롭게 다가오는 시대정신이나 대중의 욕구에 교통하면서 변화된 수필 장르의 이론 모형을 수용해서 고급문학으로서의 정체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동참하려는 노력은 오늘의 수필가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독자와 작가가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은 작가의 치열한 자기반성과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자기 존재 목적을 상실한 문학은 반드시 그보다 힘이 센 타 장르에 흡수되거나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함으로써 전통과 정체성을 잃고 만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은 정체성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급문학으로서 당대인들의 예술 철학적 욕구를 반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수필의 격을 높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90년대 이후 수필은 양적으로 팽창 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외연을 넓히는 이러한 양적 성장은 수필의 발전을 위해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전 국민이 예술가가 되면 국민적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표되는 수필들이 전부 문학성이 뛰어나서 독자를 감동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옥석을 가리는 <명수필선집>의 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작업은 작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3년부터 1년에 한 권씩 4권을 이미 발간한 바 있고, 이번에 내는 수필선집은 다섯 번째가 된다. 독자들에게 양질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차원에서도 이 책의 발간은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수필이 대중화되는 추세에 따라 수필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은 좋으나 격이 낮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수필의 격이 낮아지는 요인은 전적으로 수필가에게 있다. 수필은 신변을 수필적 소재로 하여 쓰되, 반드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수필가의 개성적 시각이 없는 흔해빠진 일상사가 나열된 수필이 아직도 문학수필이란 이름으로 발표되고 있는 현실은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의 시법을 기준으로 볼 때, 수필은 지식의 나열이나 사상의 조술에 진의가 있는 것도 아니요, 글로 씌어진 지식의 축적은 더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또한 단순한 생활의 기록이거나 신변의 잡사를 보고하는 것도 아니다. 알베레스가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진 것"이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에는 의미를 재구성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술성이란 의미의 각색이다. 작가의 인식이 녹아 있는 메시지의 미적 조형성이 결국 수필의 격을 결정짓는 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관찰로는 수필이 일상성을 못 벗어난다는 의미다. 문학성은 제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개성을 참신하게 탄력적으로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작가의 지적 치열성도 요구된다. 의미를 논리적으로 정돈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객관적 지식이 배제된 감성이 주된 역할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보면 좋은 수필을 쓰는 사람은 거의 계속 좋은 수필을 쓴다. 작수필유법불가무법역불가(作隨筆有法不可無法亦不可), '수필은 쓰는 법이 있다고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법이 없다고 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는 수필의 구성적 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갖춰진 결과로 여겨진다.
정보화 시대, 고급독자들 앞에 수필가로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기 위해 105인의 수필가들이 <한국명수필선집> 기획에 동참했을 것으로 믿는다. 이번 수필선집에 참여하게 된 수필가들은 나름대로 본격수필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하면서 좋은 수필의 창작을 위해 문장도를 실천해 온 분들이라 여겨진다. 수필가 3천여 명 시대를 앞두고 100여 명 수필가의 작품을 모은 것은 사실 많은 편은 아니다. 좋은 작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작품이 많이 발표되면 될 수록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면 관계로 더 많은 수필가들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 21세기 사회는 맛있는 수필만 읽혀지고, 이런 명수필을 쓰는 작가만이 살아남게 되어있다. 문학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런 명수필선 발간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전국적으로 참신한 작가들이 총망라되어 수록된 작품들이 신선한다. 이 책이 한국 현대 수필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해주길 바란다.
2007년 9월
엮은이들을 대표하여
권대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