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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폭격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배가 고파 사탕수수를 벗겨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일제시대 전 가족이 이름조차 생소한 태평양 작은 섬에 노무자로 동원돼 7년동안의 악몽을 견뎌야 했다는 김재병(79·김제시 신풍동)·원병(74·김제 죽산면)·일병씨(69·김제 죽산면) 형제는 올 3·1절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다.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의 남양군도 강제징용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 남양군도 강제징용 피해자 중 현재 생존한 사람은 50여명에 불과하고, 여기에 귀국 후 줄곧 고향을 지켜온 이들 삼형제가 포함돼 있다.
1939년 이들 형제의 아버지 김봉철씨(작고)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고달픈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일제가 '장기 이주자에게는 농지를 준다'며 노무자를 징발한 남양군도 농업이민에 지원, 6남매의 손을 붙들고 '티니안'섬에 이주했다. 그리고 서태평양 사이판 인근의 이 작은 열대섬에서 막내 일병씨가 태어났다.
그러나 김씨 가족은 열대섬에서의 사탕수수 재배와 비행장 강제노역에도 불구, 농사 지을 땅도 없는 고향에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여덟살 때 남양군도로 이주, 사탕수수 농장에서 7년을 보냈다는 김재병씨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노인들까지 사탕수수밭과 퇴비장에서 일했고 비행장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다"면서 "농업이민을 빙자한 일제의 강제동원이자 노동력 수탈이었다"고 말했다. 일제가 농업이민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현지에서는 막사처럼 똑같은 형태로 지어진 집을 배정받아 입주했고 각종 생필품 보급은 배급제를 통해 이뤄졌다는 게 그가 힘겹게 꺼낸 기억의 단편이다.
원병씨는 "아버지와 형님들이 사탕수수밭에서 혹사당했고, 밤에는 미군 폭격을 피해 곳곳에 만들어놓은 은신처로 옮겨다녀야 했다"면서 "해방이 되던 해 겨울철에 미군 군함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옷보따리를 빼고는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어 고향에 와서도 고생이 심했다"고 말했다. 사탕수수 농장서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무일푼 빈손에 당장 갈 곳이 없어 친척이 있는 고향 김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공습이 끝나면 곳곳에 시체가 쌓이던 전쟁터에서 가족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천운이었다"면서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정부가 이제라도 남양군도 징용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힌 만큼,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보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씨 형제들은 정부가 지난 2006년부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실태를 조사하면서 피해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태어난 일병씨는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피해신고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