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639년 아랍 군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오늘날 ‘올드 카이로’(Old Cairo) 부근(Fustat)을 수도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콥트 카이로’는 ‘올드 카이로’의 일부로 아부 세르가 성당(Abu Serga), 공중교회(Hanging Church), 성 조지 성당, 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 바빌론 성채, 콥트 박물관 등 많은 콥트 교회의 성당들과 수도원, 유적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콥트 카이로’로 불려진다.
1.올드 카이로(콥트 카이로) 2.고고학 발물관 3.기자 피라미드 올드 카이로와 고고학 박물관 왼쪽으로 흐르는 것은 나일강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나일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나일강에서 대피라미드까지는 약 8km거리이다.
1.바빌론 성채 2.공중교회 3.콥트 박물관 4.아부 사르가(성가정 피난 성당) 5.성 바르바라 성당 6.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 7.성 조지 수도원 8.성 조지 수도원(그리스 정교회) 9. 성 조시 10.동정 마리아 & 결혼 식장 홀 11.그리스 멜키트 묘지 12.콥트 교회 묘지 13.그리스 정교회 묘지 1호선 Mari Girgis 역
기원전 6세기 초 페르시아인들이 나일 강에 성채와 수로를 지으면서 이들이 정착한 이곳을 바빌론이라고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23-30) 이후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바빌론 성채는 이때 지어진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헤로데 임금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님으로 태어나신 분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에게 그 아기를 찾거든 자신도 가서 경배할 테니 알려 달라고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간다(마태 2,1-12 참조).
동방 박사들이 돌아간 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명령한다.
마태 2,13-15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파피루스(성경을 필사했던 종이) 위에 성가정이 피난하는 모습을 그린 성화.
아기 예수를 목욕시키기 위해 성모님과 성 요셉이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이 정겹다. 천사가 물 뜨는것을 돕고 있다.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다. 헤로데가 죽자 주님의 천사가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한다.
마태 2,19-21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아기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세상의 임금으로부터 피신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종살이로부터 탈출해 나왔던 바로 그 땅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집트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 성가정의 피난 여정을 따라 수도원과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이집트는 그리스도 문화가 꽃피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가정이 시련 속에서 꽃피워 열매 맺은 결실이 바로 ‘콥트 교회’이다.
이사 19,1
이집트에 대한 신탁. 보라,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로 가신다. 이집트의 우상들은 그분 앞에서 벌벌 떨고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은 속에서 녹아내린다. 이사 19,19 그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님을 위한 제단 하나가 세워지고, 그 국경에는 주님을 위한 기념 기둥 하나가 세워질 것이다. 이사 19,25
곧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내 소유 이스라엘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성가정이 헤로데 임금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오면서 바빌론 성채가 있는 이곳 올드 카이로에 잠시 머무른다. 전승에 의하여 성가정이 3주 정도 머물렀던 이곳에 ‘성가정 피난 성당’이 지어졌다. 오른쪽에 1호선 기차역이 있고, 왼쪽 계단을 통해서 지하로 내려가면 성가정 피난 성당으로 가는 길
성가정 피난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오늘날 콥트 교회에 속한 성가정 피난 성당은 ‘아부 세르가’(Abu Serga 또는 Abu Sarga)라고 부르는데 5세기에 지어진 이집트에 있는 콥트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 규모는 17m x 27m, 높이 15m이다. 이슬람이 통치하던 초기에는 타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올드 카이로 지역에 많은 성당들이 건축되었다.성가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추격해 오는 병사들을 피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나일 강을 따라 상·하 이집트에 있는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3-4년 동안 이집트에서 머물렀다.성가정의 이집트에서의 여정은 알렉산드리아의 23대 총대주교(384-412)인 테오필로가 전하고 있다. 콥트 교회에서는 성가정이 방문한 장소들에 성당과 수도원들을 지어 성가정의 은총과 수난을 기억해 오고 있다.
성가정이 피난 한 장소에 수도원들이 지어졌다.
2. 아부 세르가 성당(성가정 피난 성당)
이집트는 전승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 온 복음사가 성 마르코에 의해 41-43년 경에 그리스도교가 전교되었다. 교회사 열권을 남겨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팔레스티나 카이사리아의 주교를 지낸 에우세비우스(Eusebius, 260/264경~340경)는 ‘성 마르코는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41-54년 재위)가 통치하는 첫 해 또는 세 번째 해에 이집트에 왔다’고 진술하고 있다.당시 로마 황제의 잔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은 곧 대중들 깊숙이 스며들었다.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끝이 나고 4세기가 끝나갈 무렵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의 국교가 되었다.
그러나 541년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 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교회는 콥트 교회로 태어나게 된다.콥트 교회의 ‘예수님 피난 성당’은 두 명의 순교 성인, 성 세르지우스와 바쿠스(St. Sergius and Bachus)에게 봉헌하였다. 예수님을 충실하게 믿던 로마의 군인이었던 이들은 로마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심한 고문을 받고 막시미누스(Maximinus) 황제 때인 296년에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시리아에 묻혔고 일부 성유물은 아부 세르가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시나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있는 성 세르지우스와 성 바쿠스, 13세기 그리스 정교회 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