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시간 속을 유영한다. 어렴풋이 서늘한 기운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늘어진 의식을 건져 올린다. 아릿한 통증이 묵직하게 몸을 누르고 있다. 가까스로 얼굴을 들어본다. 차가운 길바닥, 저만치 나가떨어진 우산이 실비를 맞으며 활짝 핀 나팔꽃처럼 하늘을 향해 웃고 있다. 살아 있구나! 풀어진 태엽을 감듯 잠시 생각을 되짚으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통행인은 보이지 않는데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다. 가방과 우산을 엉거주춤 집어 들고 되돌아오는 길에 욱신거리는 얼굴 위로 흐르는 빗물의 감촉이 괜스레 섧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찰나의 간극이라고 머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몸이 사정없이 무너졌다. 빗물로 미끈거리는 도로에서 내가 신은 통굽 샌들이 스케이트 역할을 했던 게다. 한더위 열기가 소리 없이 내리는 빗물 속으로 흐릿하게 젖어 들던 저녁, 목욕 가방을 챙겨 들고 아파트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허(虛)는 이렇게 찔리는 것이리. 피부가 벗겨진 광대뼈와 턱이 부어오르며 진물이 뒤엉킨, 피가 묻어 나온다. 느닷없이 허를 찔린 후의 가슴속 회한처럼,
그때의 엄마는 어땠을까. 어느 날 하루아침에 운명의 신이 빗금을 싸악 그으며 바꿔 놓았던 엄마의 세상, 돌연 움직이는 것도 세 끼 식사마저도 의지대로 허락되지 않는 몸이 되어 버렸었다.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어도 허기진 살림에 자신은 챙길 새도 없었던 당신이다. 휘어진 삶의 뒤끝에서나마 한 잔의 풍요라도 누려야 할 때인 예순셋 나이에, 겨우 받아넘기는 무른 음식조차 연방 사레가 들렸다. 하루에 한 번 간병인이 선심 쓰듯 하는 바깥나들이도 휠체어에 앉아 햇볕을 쬐는 게 고작이었다. 퇴근해 돌아온 딸을 종일 해바라기 하던 안타까운 세월 3년을 막 넘긴 어느 날, 엄마는 고단한 삶을 놓으셨다. 시간의 촉이 내 허(虛)를 찌르며 또 하나의 빗금을 긋듯 홀연히 떠나셨다.
“훗날, 니가 돈 벌면 엄마 데리고 시장가서 맛난 것 실컷 사 주거라.”
부슬부슬, 늦여름 비가 잘게 흩뿌리던 날이었다. 엄마를 산속에 모셔두고 오는 길에 텅 빈 내 머리 위로 그 옛날 외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수없이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회한이 비처럼 부서져 내리며 발걸음은 연신 허방을 짚어 댔다. 거동이 불편하셨을 때, 가 보고 싶었던 곳은 얼마나 많았을지, 꽃을 유난히 좋아하던 엄마와 가벼운 꽃길 여행 한 번 가지 않고 무엇에 바빠 모녀간의 외식조차 미루기만 했던지. 외할머니의 당부대로 살가운 시장 나들이도, 그리고 또, 그리고……. 어리석은 딸은 스스로 용서되지 않아 아무 데고 머리를 찧고 싶었다.
소담스런 타인의 삶을 보면 엄마의 생은 내 안에서 더욱 그렁그렁하다. 갖은 음식과 좋은 물건들이 즐비한, ‘이렇게 좋은 세상’ 이라 하여도 누리지 못하는 자에겐 먼 이야기일 뿐이다. 병마와 홀로 사투를 벌이며 온몸이 사위어 갔을 당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생각하면 가슴 안으로 칼금이 지나 간다.
시간이란 많은 것을 자라나게 한다. 떫은 것을 무르익게도 한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음’의 속성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허(虛)를 찌르기도 한다. 그날, 비몽사몽 간에 꿈결인 듯 치른 장례식에서 통곡도 눈물도 차마 쏟지 못한 건, 살아 있는 동안 두고두고 내 안으로 흘려야 할 눈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버틴다. 반창고를 갈아붙이며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다독이느라 에어컨 바람에 진득한 시간을 말리는 일주일째다. 아파트 광장의 넘치는 불볕에 바람도 까무러진 창밖의 여름을 화면 속 영상처럼 바라본다. 끝없이 가라앉는 정적, 끈적거리는 권태와 무기력, 고립무원 지대에 홀로 선 적막감에 아릿한 슬픔이 속을 헤집는다. 슬픔의 바이러스에 대적할 처방전이 없어, 덮쳐 오는 우울 에 속수무책인 한낮이다.
시간의 여유는 늘 갈망했던 바가 아니었다. 슬퍼할 짬조차 없다고 동동거릴 땐 언젠가 찾아올 느긋하고 안온하고 정갈한 날들을 꿈꾸었다. 아득한 수평선 같은 그 삶이 빨리 당겨지기를 바랐다. 아둥바둥하지 않으며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 여유로운 걸음을 향유하는 삶, 혹자는 쉽게도 말을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비웠노라고, 다 비웠더니 그렇게 편안하다고, 마음속 불편한 무게를 비워내고 새털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창공을 날아 솔바람에 취하고 투명한 햇살에 깨어나는 삶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데 팽팽하게 잡고 있던 시간의 고삐를 내려놓고 막막히 앉아 뼛속마저 삭아 드는 삶이 ‘허·하·다’는 누군가의 말이, 왠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내게서 느슨해진 시간이란 놈이 또다시 나의 허(虛)를 간파하여 공략하고 있다.
허를 찔리며 산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만 아픈 줄 알았다가 더 깊숙이 도사린 복병이 불쑥 태클을 걸어 허를 찌르는 게 삶이다. 오류 없이 깨달음 없다고 하던가. 저마다 외로운 등짐을 지고 사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좌절과 눈물, 용기와 희망이 엇갈리며 너도나도 허를 찔리면서 얽혀 산다. 얼마만큼의 욕심이 덧칠된 이곳에서 서로 허점을 가리며 삶 앞에 바짝 다가선다. 그런 삶조차 보듬어야 한다. 아프고 아물며 몸으로 써야 하는 시한부 생을 위하여.
하지만 내가 스스로 찔렀던 그 허(虛)만큼 날카로운 가시는 없다.
첫댓글 어머니를 그리는 그 마음 잘 알고 있답니다. 모든 자식들은 부모님이 가시고 난 뒤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린답니다.
좋은 글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온 밤 머물러 있었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