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生死)에서 뛰쳐나오는 출신활로(出身活路)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강립종종명자(强立種種名字)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강립종종명자(强立種種名字)하야 혹심(惑心) 혹불(惑佛) 혹중생(惑衆生)이라 하나니, 불가수명이생해(不可守名而生解)하고 당체편시(當體便是)니, 동념즉괴(動念卽乖)니라.
굳이 갖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衆生)이라 하지만, 그 이름에 얽매여 분별(分別)을 낼 것이 아니나니, 다 그대로 옳은 것이지만,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어그러지는 도다.
삼처전심(三處傳心)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다]
세존(世尊)이 삼처전심자(三處傳心者)는 위선지(爲禪旨)요 일대교설자(一代所說者)는 위교문(爲敎門)이라, 고(故)로 왈(曰)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니라.
세존(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宣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로다.
득지어심(得之於心) [마음에서 얻다]
시고(是故)로 약인(若人)이 실지어구(失之於口) 즉염화미소(則拈花微笑)가 개시교적(皆是敎迹)이요, 득지어심(得之於心)이 즉세간(則世間) 서언세어(序言細語)가 게시교외(皆是敎外) 별전선지(別傳禪旨)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방긋 웃는 것이 모두 교(敎)의 자취가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世上)의 온갖 잡담(雜談)이라도 모두 교(敎) 밖에 따로 전(傳)한 선지(宣旨)가 될 것이로다.
오유일언(吾有一言) [내가 한 마디 할까 하노라]
오유일언(吾有一言)하니 절려망연(絶慮忘緣)하고, 올연무사좌(兀然無事坐)하니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로다.
내가 한 마디 말을 할까 하나니, 생각을 끊고, 반연(攀緣)을 쉬고, 일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불차일미지적(拂此一味之迹) [부처님의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야 하리라]
불설무애지법(佛說無碍之法)은 방귀일미(方歸一味)라 불차일미지적(拂此一味之迹)하야사 방현조사소시일심(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고(故)로 운정전백수자화(云庭前柏樹子話)는 용장소미유저(龍藏所未有底)라 하니라.
부처님께서 걸림없는 법(法)을 설(設)하신 것은 바로 한 맛에 들어감이라.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버려야 바야흐로 조사(祖師)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나게 되나니, 그러한 까닭으로 “뜰 앞에 잣나무니라”고 한 화두(話頭)는 용궁(龍宮)의 장경(藏經)에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로다.
돈오점수양문시종(頓悟漸修兩門始終) [돈오돈수 두문이 시작과 끝이로다]
고(故)로 학자(學者)는 선이여실언교(先以如實言敎)로 돈오점수(頓悟漸修) 양문(兩門)이 시자행지시종(是自行之始終)이로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서 빨리 깨치고 오래 닦는 두 문(兩門)이 공부(工夫)의 시작(始作)과 끝 임을 자세(字細)히 알아야 하는 도다.
출신활로(出身活路) [뛰쳐나오는 살길이로다]
연후(然後)에 방하교의(放下敎義)하고 단장자심(但將自心) 현전일년(現前一念)하야 참상선지(參詳禪旨) 즉필유소득(則必有所得)하리니, 소위출신활로(所謂出身活路)로다.
그런 뒤에 교(敎)의 뜻을 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 참선(參禪)하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나니, 그것이야 말로 뛰쳐나오는 살 길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