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 발표 (과거의 반탁 여부 무관, 모스크바 결의안에 찬성한다는 선언서에 서명한다면 임시정부를 구성할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겠음)
이승만을 의장, 김구를 총리, 김규식을 부의장으로 선출한 ‘남조선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이 1946년 2월 14일 출범한 이유는 그로부터 대략 한 달 후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도록 미군정 당국에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3월 20일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처음부터 난항의 연속이었다. 임시정부를 구성할 단체의 협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정당 및 사회단체의 경계를 두고 논란이 시작됐다. 미국은 남한의 대표를 ‘민주의원’으로 일원화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은 반대했다. 민주의원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으니,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개별적으로 협의 대상으로 삼자며 맞섰다. 소련은 한 발 더 나갔다. 정당과 사회단체 중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신탁통치를 반대한 세력 즉 이승만과 김구 등 민주의원으로 대표되는 우익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판이었다. 미국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더라도 협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 5일 소련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지금까지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했더라도, 앞으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면 즉 신탁통치에 찬성한다면 협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4월 18일 이 제안에 기초한 ‘미소공동위원회 5호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후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포함한 우익단체들의 지지 서명을 적극 권장했다. 그럼에도 주저하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4월 27일 ‘5호 성명에 서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표시가 아니다’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어찌하는 게 좋은 건지 헷갈리던 민주의원들은 ‘남선순회’ (南鮮巡廻, 지방순회) 중인 이승만에게 의견을 구했다. 4월 28일 해운대로 찾아온 민주의원 백남훈과 윤치영 비서에게 이승만은 하지의 담화를 지원하는 선언서를 5월 초 언론에 공개토록 했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제6권: 513-514). 이승만의 선언서는 결정적이었다. 민주의원으로 대표되는 우익 정당 및 단체들이 대거 서명에 참여했다. 그러자 소련이 발끈했다. 반탁을 주장했던 단체와 세력이 대거 참여한 것도 불만인데, 이에 더해 미군정이 이들의 참여 의사를 찬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소련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밝혔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련은 1945년 5월 6일 미소공위를 결렬시켰다. 그러나, 가동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미소공위가 좌초한 까닭에는 당시 불거져 나온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논란 또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된 사실을 핵심만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이승만은 미소공위 시작 이틀 전인 3월 18일 건강상의 이유로 민주의원 의장직 사표를 던졌다. 민주의원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휴가를 주기로 하고 부의장 김규식이 의장직을 대행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이 의장직을 회피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철저한 반소주의자였던 이승만이 미소공위의 앞날에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민주의원 의장으로 있던 이승만 대신 김규식이 의장대리 직을 맡도록 하였다”는 해석이다 (이철순, 2011, “우사 김규식의 삶과 정치활동” 『한국인물사연구』 16호, p. 236). 이와 같은 해석은 미소공위를 앞둔 미국 정부가 국무-육군-해군으로 구성된 3부 조정위원회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를 열어 1946년 1월 28일 작성해 맥아더를 통해 하지에게 2월 중순 전달한 ‘한국에 대한 정치정책’ (Political Policy for Korea, SWNCC 176/18) 문건에 등장하는 내용을 배경으로 한다 (손세일, 2015, 6권: 494-495; FRUS 1946, vol. VIII, p. 625). 이 문건은 한국의 지도자 그룹이 “좌우익 극단주의가 아닌...지도자들이 확실한 다수가 되도록 각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하지가 이 훈령을 전달받은 시점인 1946년 2월 중순 미군정은 이미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강경한 우익의 결집을 ‘민주의원’이라는 모습으로 마무리할 때였다. 그러므로 하지는 본국의 훈령을 실천할 방법이 없었다 (손세일, 2015, 6권: 495). 현지의 군정 사령관 하지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무부의 입장이 어느 정도나 확실한 지침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신탁통치’ 대신 ‘단독정부’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는 방법을 모색했다. 북한에서는 이미 소련 군정 주도로 단독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8일 출범한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 수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946년 4월 7일 동아일보는 샌프란시스코발 AP 통신을 인용하며 “미군정 당국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본국 정부에 제의했다”고 1면에 크게 보도했다. 기사는 이 정보에 대해 미 국무 당국이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위원이 제의한 바가 아니고, 미 군정당국이 제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함께 보도했다 (큰 사진 캡션 참조). 사실, 단독정부 구상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이보다 2주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해외자료총서 6집』에 수록된 소련 측 문서 ‘남한정세보고서’에는 1946년 3월 22일 남한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 군정 지도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민주당 지도자 김성수는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남조선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위원 다수는 이 주장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러시아연방국방성 중앙문서보관서 문서군 172, 목록 614831, 문서철 12). 단독정부 구상을 하지와 이승만이 미리 교감하면서 김성수와 언론에 흘렸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동아일보의 보도 2주 전 이미 한민당 당수 김성수의 입을 통해 단독정부에 관한 아이디어가 흘러나왔고, 남한 공산당은 이 사실을 소련 군정에 보고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단정 문제는 이미 좌우익 모두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식과 공론화가 진행되던 문제였다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49), 2021 4 19, 통일뉴스). 동아일보 보도 1주일 후인 4월 15일 이승만은 ‘남선순회’에 나섰다. 하지의 요청에 따른 결정이었다 (손세일, 2015, 6권: 507). 하지는 이승만이 지방을 돌며 우익의 입장을 활성화시켜주길 바랬다.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구름같이 모여드는 인파 앞에서 미소공위가 성공해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한반도는 공산화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이어갔다. 대성공이었다. 이승만의 ‘남선순회’ 도중인 5월 6일 미소공위는 마침내 결렬되었다. 신탁통치를 통한 통일정부 보다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상이 가시적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직접 언급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항하는 우파의 자율적 정부가 남한에 수립되어야 한다는 이승만의 생각이 공식화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