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5년 10월16일(금)
장소 : 월악산 일원
반월당(08:00 출발) - (128.6km. 1시간43분) - 문경 청운각(09:43 도착. 관람 20분. 10:03 출발) - (1.3km. 5분) - 문경 진안리성지(10:08 도착. 관람 15분. 10:23 출발) - (11.4km. 12분) - 괴산 연풍리성지(10:35 도착. 관람 25분. 11:00 출발) - (도보 100m. 5분) - 풍락헌(11:05 도착. 관람 15분. 11:20 출발) - (도보 400m. 10분) - 연풍향교(11:30 도착. 관람 10분. 11:40 출발) - (5.2km. 10분) - 원풍리마애불좌상(11:50 도착. 관람 20분. 12:10 출발) - (5.6km. 5분) - 느티나무휴게소(12:15 도착. 점심 50분. 1:05 출발) - (10.0km. 16분) - 중원리미륵리사지(1:21 도착. 관람 50분. 2:11분 출발) - (5.3km. 10분) - 사자빈신사지 입구(2:21 도착) - (도보 400m. 10분) - 사자빈신사지(2:31 도착. 관람 15분. 2:46 출발) - (도보 400m. 10분) - 사자빈신사지 입구(2:56 도착) - (1.1km. 4분) - 덕주사정류소(3:00도착) - (도보 1km. 20분) - 덕주사(3:20 도착 . 관람 40분. 4:00 출발) - (도보 1km. 20분) -덕주사정류소(4:20도착) - (159.1km. 2시간5분) - 반월당(6:25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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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청운각
청운각은 1928년 1000여㎡의 땅에 지어진 초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7년 4월부터 1940년 3월까지 3년 동안 문경 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 교사로 있던 시절에 살던 하숙집이다.
청운각의 유래는----박정희 대통령께사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그래 4월 이곳 문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시어 1940년 2년 9개월간 거처하셨던 곳이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교편을 잡으셨던 무렵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이르렀으며, 한민족 말살정책은 교육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역사는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을 때다. 그러나 민족정신이 남달리 강한 박정희교사는 여러 제자들을 밤에 놀러오게 한 다음 "우리는 한민족(조선사람)이다. 우리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하시면서 단군 후손의 뿌리를 일러주셨으며, 문화민족임을 강조하셨고,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일장기에 태극선을 그리시여 민족혼을 일깨워 주시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엄청난 수난을 겪다가 급기야 집단폭행 등 대충돌로 천직으로 알았던 교직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눈물과 공포에 쌓여 있는 우리 제자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선생으로는 그놈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총칼을 차고와서 이겨주마...."하시던 그모습이 지금도 쟁쟁하다.이와같은 결과로 만주로 피신케 된 동기가 되었고 군생활이 시작되는 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가난속에 어렵게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배고픔도 면하고 대접도 받을 수 있는 그 때의 그 좋은 교사직을 연연치 않고 조선인으로서는 극히 위험한 행동을 연속적으로 하셨던 것이다. 몇몇 제자들도 일본인 교사로부터 매도 많이 맞았던 그 현장이 바로 이곳 청운각인 것이다. 그후 군시절이나 대통령 재임시에 10여차례 못잊어 찾아 오시다가 1978년 11월 24일 마지막 다녀가시고는 파란 많은 생애를 국민의 비통속에 그 많은 치적을 남기신채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셨다. 사심없고 굳은 의지와 철학을 가진 민족주의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곳 청운각은 교사에서 군인으로 그로인한 후일의 대통령으로서...숙명적 가난을 물리치고 국력 신장의 기틀을 마련하시고 비운의 생을 마치게 된 근원적인 장소이기에....우리들은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흘러갈 것이다. 수천년 수만년 우리의 역사속에 "우리의 스승인 박정희 대통령은 사심없이 오직 구국위민의 일념으로 일하셨다"고 기록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곳 청운각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이곳에 씌여있다. 이곳은 1976년 문경초등학교 동창회장이었떤 김종호가 매입하여 보수한 후 문경초등학교에 기부체납하였으며 현재는 문경시가 관리를 맡고 있다. 대지1,079, 총면적 78.7의 초가집으로, 박정희 육영수의 영정과 교사재직 당시 찍은 사진, 책상, 가방 등의 유품이 있다. .(지역정보포털 자료)
박정희대통령께서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하시던 해(1937년) 1학년 입학식 기념사진
대지 1079㎡, 총면적 78.7㎡의 초가집인 청운각에는 박 전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의 영정과 교사 재직 당시 찍은 사진, 책상, 가방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박정희대통령 기념식수(1978년 11월 24일)
1978년 경상도 보존 초가옥 1호로 지정됐고 그동안 몇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1995년 (재)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가 기부해 현재 문경시가 소유하고 있다. 문경시는 2012년 사업비 13억원을 들여 분향소와 관리사, 화장실을 전통한옥으로 건립하고 공원과 주차장을 조성한다. 공원에는 박 대통령의 공적과 일상생활이 담긴 영상 스크린을 설치해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주민에게 쉼터로 제공할 계획이다.
문경진안리성지
진안리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 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 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다.
12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포교 활동을 한 위대한 사목자의 선종지다.‘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 관문인 주흘관, 제2 관문인 조곡관, 제3 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 보는 과객(科客)은 물론,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최방제(崔方濟, 일명 과출이, 1820?~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한 뒤 한국 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조선 귀국을 시도한 1842년 6월부터 계산해 볼 때, 그 다섯 번째 시도로 7년 6개월 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7,000리를 걸어 다니거나 또는 말을 타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다.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의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문경 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와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문경읍내 교우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선종하기 전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최 신부의 시신을 푸르티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하였다.
▒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
같은 시기의 선교사들의 서한에도 구체적인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대의 증언 자료를 가지고 선종 지역을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문경이었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경 지역 내에서도 문경 새재의 주막이 있던 진안리와 문경 읍내 약국 이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설에는 최 신부가 문경에서 발병하였으나 말을 타고 배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촌까지 버티며 가서 결국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관련된 논란은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2007년 12월에 펴낸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에 상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연풍성지(延豊聖地)
연풍성지(延豊聖地.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홍문2길 14)
천주교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正祖) 15년(1791) 신해교난(辛亥敎難)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며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秋順玉),
이윤일(李尹一), 金병숙, 金말당, 金마루 등이 순조(純祖) 1년(180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형당한 자리에 1974년부터 천주교회에서
성역화한 곳이다.
성지 내에는 연풍향청 건물과 높이 8.5m의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순조 13년(1813) 연풍현
병방골(兵房골)에서 태어난 교인으로 고종 3년(1866) 충남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한 한국천주교 103聖人의 한사람인 루까
황석두(黃錫斗)의 입상과 묘가 있고, 왼쪽에는 순교현양비(殉敎顯揚碑)를 세웠으며 문 앞에는 처형석(處刑石)을 유물로 전시하고 있다.
성지에
있는 연풍향청은 향청이후 헌병주재소, 경찰지서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었으나 천주교회에서 구입하여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고 있다.(출처:괴산군청)
괴산 연풍향청(槐山 延豊鄕廳.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44 (삼풍리))
향청은 본래 조선초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유향소(留鄕所)였으나, 성종 20년(1489)에 향청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다. 주된 역할은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면장(面長), 풍헌(風憲), 약정(約正) 등을 추천하며
조세, 요역의 부과분배 등의 자문에 응했다. 향청의 수장을 좌수(座首) 또는 좌장이라 하고 그아래에 좌별감(左別監), 우별감(右別監),
창감(倉監), 방감(房監) 등을 두었다.
연풍향청은 1910년 경술국치후에는 천안헌병대충주관구연풍분견소(天安憲兵隊忠州管區延豊分遣所),
괴산경찰서연풍주재소(槐山警察署延豊駐在所), 괴산경찰서연풍지서(槐山警察署延豊支署) 등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1963년 3월 부터는 천주교(天主敎)
연풍공소(延豊公所)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1995년 보수전까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통칸으로 된 팔작지붕 초익공식의 목조기와집이었으나 1995년 보수시 부식된
기둥을 교체하고 창호, 초석 등을 수리하였으며, 고증에 따라 온돌방 2개소를 원형보수하고 홑처마를 겹처마로 바꾸었다. (출처:괴산군청)
괴산 연풍 풍락헌(槐山 延豊 豊樂軒)
괴산 연풍 풍락헌(槐山 延豊 豊樂軒.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53 (삼풍리))
동헌은 옛 관청인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을 가리킨다. 연풍동헌은 원래 현종 4년(1663) 현감 성희위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영조 42년(1766)에 이전 건물이 낡아 당시 현감 이덕부가 남쪽에 새로 지어 풍락헌이라 이름 지은 건물이다. 1920년부터 당시 연풍보통학교 건물로 사용했으며 1972년 현 위치로 옮겨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새 날개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출처 :문화재청)
연풍동헌은 조선 인조(仁祖) 6년(1628)에 장풍현(長豊縣)이 연풍현(延豊縣)으로 이름이 바뀐 후 현종(顯宗) 4년(1663)에 현감
성희위(成熙胃)가 조령아래 지금의 연풍면 삼풍리에 동헌을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건물이 퇴락하여 영조 42년(1766) 현감 이덕부(李德溥)가 동헌의 남쪽에 새로 동헌을 짓고 ‘풍락헌(豊樂軒)’이라
이름하니 성사익(成士翼)이 옛 동헌에 ‘이은재(吏隱齋)’라는 현판을 써서 적었다고 전하는 바, 지금의 연풍동헌은 1766년에 지은
풍락헌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15칸의 2익공 5량집으로 팔작지붕 겹처마의 목조기와집이다.
1912년에 개교한 연풍보통학교가 1920년부터 교사(校舍)로 사용하면서 ‘흥영관(興英館)’이란 편액을 붙였으며, 1965년
중수하고 1972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출처 :괴산군청)
괴산 연풍향교(槐山 延豊鄕校)
괴산 연풍향교(槐山 延豊鄕校.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590번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중종 10년(1515)에 지어진 연풍향교는 여러 차례 고쳤으며, 한국전쟁 때 명륜당과 동무·서무가 불에 타 없어졌다. 1978년에 대성전을 고쳤고, 그 다음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과 대성전이 있고 그 외에 고직사가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이고,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는 내삼문을 두어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을 구분하고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槐山 院豊里 磨崖二佛並坐像)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槐山 院豊里 磨崖二佛並坐像.보물 제97호.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2번지)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30m 높이의 암벽 가운데(지상에서 6.5m높이)에 약 6×5.5m 크기의 방형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을 반육각으로 조각하였는데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병좌상으로서는 희귀한 예로 주목되고 있다.
넓적하면서도 힘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의 조각수법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신체 또한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으로 형식화 되었으며, 통견의 법의주름은 무딘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광배에는 화불이 5구씩 조각되었고 채색과 장식의 흔적이 남았다.
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
중원미륵리사지(中原彌勒里寺址.사적 제317호.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58)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이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석불입상(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석등·당간지주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忠州 彌勒里 石造如來立像.보물 제96호)
고려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일련의 커다란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하는 석불입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가 나라의 멸망을 비통하게 여기며 이곳까지 와서 불상을 만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갔으며, 그 여동생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불상의 대담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보아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문화재청 자료)
중원미륵리사지석조보살의상(中原彌勒里寺址石造菩薩倚像.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7호 )
머리에 보관을 쓴것으로 보이며 관식은 어깨까지 내려온다. 목에는 삼도흔 보이며 왼손은 법의자락을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배부분에 댄것으로 보인다. 왼발은 수직으로 내렸으며 오른발은 왼발 종아리 뒤쪽에 대고 있다.
크기: 높이 95cm, 어깨폭 27cm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忠州 彌勒里 五層石塔.보물 제95호)
이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이 석탑이 남아 있다. 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아래 부분이 땅 속에 파묻혀 있어서, 그 구조가 어떤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드러난 부분은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특별하게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塔身)은 1층 지붕돌이 2장일 뿐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을 모서리에 새겼다.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는데,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있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자료)
충주 미륵리사지 사각석등(忠州 彌勒里寺址 四角石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중원 미륵리사지 내에 위치한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화사석·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져 장식성을 보이고 있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문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여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합각부는 약간 돌출시켜 치석함으로써 마루부처럼 보이도록 했다.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 수도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미륵리 사지에 이런 양식의 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측면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이와 같은 화사석 결구 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ㆍ현화사ㆍ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었다.(문화재청 자료)
충주미륵리사지귀부(忠州彌勒里寺址龜趺.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귀부로 원위치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비신은 남아 있지 않으며 비신꽂이 홈이 조성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어서 실제 비신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귀갑문은 표현되지 않았고 거북등 좌측 경사면에 2마리의 새끼거북이 새겨져 있다.
귀갑문은 표현되지 않았고 거북등 좌측 경사면에 2마리의 새끼거북이 새겨져 있다.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堤川 獅子頻迅寺址 四獅子 九層石塔)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堤川 獅子頻迅寺址 四獅子 九層石塔.보물 제94호.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1번지)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출처 : 문화재청)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佛弟子高麗國中州月/ 岳獅子頻迅寺棟梁 奉爲 代代/ 聖王恒居萬歲天下大 平法輪常傳比界他方/ 永消怨敵後愚生婆娑 卽知花藏述生卽悟正/ 覺敬造九層 石塔一坐永充供養/ 大平二年四月 日謹記
불제자 고려국(高麗國) 중주(中州) 월악산(月岳山)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의 동량(棟梁)은 삼가 받듭니다. 대대로 성왕(聖王)께서 항상 만세(萬歲)를 누리시고, 천하가 태평해지고, 법륜(法輪)이 항시 전해져서, 이 세상 다른 지방에서 영원히 원적(怨敵)이 소멸된 이후 우연히 사바세계에 태어나서, 이미 화장미생(花藏迷生)을 알았으니, 곧 정각(正覺)을 깨우칩니다. 삼가 공손히 9층 석탑 1좌를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합니다. 태평(太平) 2년(1022년, 현종 13년) 4월 일에 삼가 기록합니다.
명문(銘文)에 의해 고려(高麗) 현종(顯宗) 13년(태평(太平) 2년, 1022)에 왕의 장수,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을 기원하며 아울러 불법의 힘으로 적(거란)을 물리쳐 줄 것을 염원하기 위해 조성(造成)되었음을 알 수 있는 건실한 탑으로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덕주사(德周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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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하고 풍성한 파노라마를 통해서 공부 많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