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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앞뒤 자고 계신 분들과 우리 명절도 잘 보냈는데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사실 초대교회 공동체 내부에 큰 위기를 초래할 만한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만 초대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두 가지 좋은 것을 얻게 됐어요.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었고요. 또 하나는 신앙 공동체의 순결함 그리고 거룩성을 되찾는 데 아주 좋은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의 이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죠.
여러분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마치 얼른 땅에 생명을 싹 틔우기 위해 땅을 뚫고 나오는 꽃처럼 외적 내적 시련에 직면하면서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계속되는 부흥과 성장으로 인해서 외적 실현이 임하는 현장을 보여주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급격하게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자 주변에 있던 일반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게 지지난주의 말씀 내용이죠. 그러한 현장의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루살렘 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을 듣게 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격분할 수밖에 없죠.
왜 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고질적인 시기심이 다시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기심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그렇게 사로잡힌 이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사로잡아서 감옥에 여기 보시면 오늘 17절 18절 말씀 함께 읽어보실까요?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도 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씨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오게 가두었더니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의 시기가 가득하여라는 이 표현일 것입니다. 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교회를 박해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내용이죠. 박해하는 동기가 시기가 가득했기 때문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진실에 입각해서 그들을 잡아들인 게 아니죠. 바른 근거와 올바른 판단에 의해서 사도들을 박해했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시기심 하나만으로 그들은 그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남이 잘 되는 것을 셈하여서 미워하는 거, 남이 뭐 잘 되면 샘내잖아요. 그러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이것이 바로 시기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시기가 죄로 인하여 나타난 인간의 모습 중에 하나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합니다. 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되는데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실한 마음을 내버려 두신 거예요. 내버려 두시니까 이 상실한 마음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 제목으로 쭉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기라는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말씀해 줍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혼란이 있고 모든 악한 것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시기는 여러분 창세기를 이렇게 쭉 읽다 보면 태초의 아담 후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시기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성경은 먼저 그것을 1차적으로 이야기해줘요. 그리고 두 번째는 들에서 만나 그들을 그들의 별로 착수였다. 결국 이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의 후손을 쭉 보다 보면 야곱이라는 자가 있죠.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아리따운 여인이었다라고 기록해 줍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한 것을 보시고 그의 대문을 여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려 4명의 아들 르우벤, 시몬, 레위, 유다. 이 4명의 아들을 낳는 동안 라헬은 한 명의 자녀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자녀를 4명이나 이미 낳아버린 언니를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야곱에게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 나가서 죽어버리겠다
이렇게 협박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야곱은요. 라헬을 향해서 성을 내며 말합니다.
임신을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내게 뭐라 하느냐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막 자기도 답답하니까 성을 내면서 대답한 거죠. 그러자 라헬이요. 그러면 내 여종 빌하를 통해서라도 나아서 내 무릎에 앉히도록 해라. 그래서 빌하를 통해서 자녀를 낳게 돼요.
여러분 이것이 경쟁이 되어서 결국 그의 언니 레아도 그의 여종 실바를 들여보내서 자녀를 낳게 되죠. 결국 어떻게 됩니까? 4명의 아들을 4명의 여인을 통해서 12명의 아들을 낳게 된 그러한 모습이 성경에는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시기심으로 나타난 결과였던 것이지, 한편 야곱은 이제 12 아들을 얻게 되었어요.
12 아들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합니까? 질문이 되게 어렵죠. 요셉 요셉 12 아들 중에 요셉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선 요셉의 노년에 낳은 아들이기도 했지만 자기가 사랑했던 라헬의 첫 소생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에게 채색옷을 입히는 특별함이 있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 아버지가 요셉만 감싸고 돌고 그만 사랑하니까 여러분 그 나머지 아들들은 점점 무슨 마음이 들어요? 시기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있는데 어느 날 이 요셉이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형들에게 와서 이야기하죠.
우리가 밭에서 단에서 곡식단을 이렇게 거두고 있는데 나의 단이 일어서 있고 열 형님들의 단이 내게 엎드려 절하더이다.
이 말을 들으니까 막 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죠. 속이 상하네 화를 낼 수가 있고, 아버지가 감싸고 있는데 저 녀석을 어떻게 할까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와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나에게 절하더이다.
이걸 어떻게 한 대 쥐어박을까
막 이런 마음이 막 이 속 안에서 굴뚝같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이 말을 들은 형들은 시기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기 이 형들의 시기는 어떤 결과를 초래합니까?
결국 그들이 모여서 작당하잖아요.
저 동생을 죽이자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이죠.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결국 은 20에 애굽으로 팔아넘기고 아버지는 그가 죽었다고 거짓 이야기하면서 가족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일이 그 가정의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외로운 사막에서 혼자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 악마가 이 수행하는 사도를 자꾸 꼬시기 시작합니다. 유혹하는 거예요.
하지만 어떠한 유혹에도 이 수도사가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돈을 준다 해도 외면합니다. 권력을 주고 명예를 준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내가 너에게 보내주겠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악마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대고 싸이는데,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이 수도사가 몹시 화가 나서 흥분의 얼굴 빛을 비추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것 질문입니다.
이 사탄이 뭐 하라고 속삭였을까요? 무슨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수도하다가 기도하다가 팍 차고 일어나겠습니까?
뒤에다 대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야 니 동생 얼마 전에 대주교 됐더라.
그냥 대주교 되었다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이 수도사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기심이 이러한 모습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기는요 분란을 가져오고요. 우리의 평안을 빼앗는 악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 안에는 평안을 위해서 이 시기라는 것을 벗어내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까 갑자기 성경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영에 속하는 자들이 되어야겠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아직 육신에 속한 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 시기가 있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영에 속한 자가 되죠.
또 여러분 사랑장에 보면 뭐라고 돼 있어요?
사랑은 시기하지 않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가 되어서 또한 사랑이 충만하여서 시기를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 존귀한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시기가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가득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가득하여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미 앞서 5장에서 이 단어를 이미 사용했다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아나니아가 얼마를 가지고 사도들 발 앞에 놓고 엎드렸을 때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향해서 말하잖아요.
어찌하여 사단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내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즉 베드로는 아나니아 마음에 사단이 가득한 것을 지적하면서 성령을 속인 그의 행동을 책망한 것이죠. 사단이 가득했기 때문에 성령을 속이는 제 자리로 나아가게 됐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대제사장과 사도 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의 시기가 가득해서 어떤 일을 행합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서 어떤 행동을 합니까? 사도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는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죠.
여러분 가득하다는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충만한 상태 이것이 가득이죠. 넘치도록 가득하여서 흘러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죠. 여백도 없고 여유도 없는 그러한 상태를 가득하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 마음에 가득했던 시기심은 어떤 다른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이 단 한 가지만 생각하게 한 거예요.
그게 뭡니까?
이 사도들을 박해하겠다
이 생각만으로도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마음 가운데 사단이 가져다주는 시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넓으신 사랑이 가득 채워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주의 향기가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가운데 가득 채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기름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기심으로 가득 채워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조금의 자비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 사도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게 된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그다음 구절을 보면은 어떤 모습이 그려지냐면 그렇게 잡아넣자마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19절 말씀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어 끌어내어 이르되 하나님의 천사가 옥에 갇힌 사도들을 구출해낸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냥 보통 일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서 일어나는 그런 현상이 아니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나타난 그때 당시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23절을 보면 조금 더 그때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23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여러분 옥문이 든든히 잠겨져 있었습니다. 간수들은요. 그 문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감옥에서부터 소리 소문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일을 들은 성전 마트 자들 제사장들은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제 이때의 상황들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감옥에 가두었던 갇힘받았지만 즉시 일하셔서 그 감옥에서 벗어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 이걸 보면서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이 종교 지도자들은 이전에도 시기심이 가득해서 예수를 붙잡아서 어떻게 했어요? 죽였죠? 그리고 죽임을 끝으로 어떻게 했습니까?
무덤에 가에서 마치 감옥에 가둬 놓은 것처럼 무덤에 가두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갇힌 것처럼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어 무덤에 갇혀 있던 예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주의 사자를 보내서 무덤을 여시고 무덤 안에 있던 예수를 무덤 밖으로 끌어내셨다.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앞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 무덤 가운데서 승리케 하시고 살리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부활의 생명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죽은 무덤 가운데 있던 나사로 이전의 사역 가운데 나사로를 끌어내시기 전에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생명에 대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그 누이들과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죽은 자 뜰의 땅 가운데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앞서 찬양했듯이 어둠의 빛을 허락하신 것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사랑하심 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부활과 오늘의 이 사건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말씀이신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생명되게 하시려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의 생명, 새 생명으로 진정한 참 생명으로 회복케 하신 것이죠.
오늘 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 여러분 이 옥에서 끌어낸 목적이 무엇입니까?
20절은 그 목적을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20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합니다. 말씀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말씀이에요? 따라 합시다.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십니다. 할렐루야
이걸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내게 생명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잖아요.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서 극호의 생기를 훅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이 되게 하신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생명된 인간이 어떻게 됐습니까?
죄를 범해서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처럼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죽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은 인생 그것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 즉 죽음의 골짜기 뼈만 무성한 무덤과 같은 세상에 사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요. 무덤 죄덩어리가 돌아다니는 이 세상.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깨닫게 하게 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한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죠. 어느 날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이끌고 가십니다.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는 사람의 뼈 무더기를 보게 되는 것이죠. 오랫동안 방치되어 바짝 말라버린 뼈들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질문이 굉장히 난해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하나님께서 뼈가 막 가득 차 있는 무덤에 데려가더니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난해한 질문이 올 때는 공을 넘겨야 돼요. 내가 대답하는 게 아니라 질문한 사람이 대답할 수 있도록 공을 넘겨야 돼요.
그래서 에스겔이 참 굉장히 그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십니다.
이렇게 대답하세요.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십니다
라는 그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뼈들을 향해서 대언하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뼈를 향해서 대언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사랑하리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사랑하라. 내가 너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워서 숨을 불어넣으면 너희가 살게 될 텐데 그제서야 너희가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바짝 말라버린 뼈 무더기 이제는 죽음의 냄새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이 시작되는 은혜를 보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공부하신 대로 생명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생명의 말씀을 대언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면서 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 눈으로 직시하고 있는데 말씀하신 대로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집니다.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더라는 거예요.
근데 하지만 에스겔이 이렇게 보니까 사람의 형태를 갖고 모든 것이 연결되었는데 생계가 없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생명이 없다는 얘기죠.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합니다.
사람아 너는 이제 생기에게 대하라.
뼈에게 대언했다면 두 번째는 생기에게 대언하라는 거예요.
너 생기야. 사방으로부터 불어와서 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라.
그에게 명령한 대로 에스겔은요. 생기를 향해서 대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생기가 사방으로부터 불러와 그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이 서동이며 큰 군대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곳에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이 무엇이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다시 말하면 생명의 말씀을 부탁하신 것이죠.
야 너희들 이제 너에게 생명의 말씀을 맡겨놓을 테니 이 땅에서 그 생명의 말씀을 좀 전해다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대언하기 전에 너희가 해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
그래서 여러분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끝자락에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가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들은 그 성에 머물러 있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지금 사역하고 있는 것이죠. 성령의 새 바람이 이 땅 가운데 불어온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미 앞에 옥에 한 번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또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그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생명의 말씀 위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렇게 생명을 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지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생명 얻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자들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탄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죽이고 멸망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때로는 박해한다. 마치 초대교회 내적 어려움과 외적 어려움이 찾아왔던 것처럼 그러한 박해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대사명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가 그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고 때로는 핑계거리가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죠.
여러분 나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 믿고 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 믿고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고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것 좋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셨던 그 대사명을 위해서 나는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많이 놓치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실까요? 21절 앞부분에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천
사의 말을 들은 이들은요.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말씀하신 대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이 별로 원치 않는 것 사단이 원치 않는 거 생명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그들은 성전에서 가르쳤다는 거예요. 사도들은요.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옥에서 건져내주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그 말씀 앞에 순종하여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친 것이죠.
그러면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실까요? 여러분 이들 지금 가르치고 있던 이 사도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탈옥수 지금 감옥에 가둬놨는데 감옥에서 나와서 도망다니는 타록스와 같은 존재들이지 탈옥수들의 일반적인 행동이 무엇입니까?
숨는 거죠. 도망가고 도망가고 숨는 것이 탈옥수들의 모습이에요. 이들이 만약에 잡히면 당연히 당연히 잡혀가고 죽임이 그들의 눈앞에 놓여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잖아요. 그러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분부하신 말씀대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더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얻던지 우리에게 복음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생명을 걸고 생명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이제는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의 생명을 다해서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명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을이죠. 이제 열매를 거둬야 될 그 당시 추석도 지냈어요. 사람들이 이번에 추석이 너무 더워서 추석이 아니라 하석이다 이렇게 이야기도 하는데, 여긴 추석 때 보내고 이제 결실의 때 교회도 결실을 맺어야 될 그런 때이기도 하죠.
여러분이 이 후반기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좀 떠올리셔서 나의 평안과 나의 안녕과 나의 신앙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전진하시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먼저 믿게 하시고 주신 사명 영혼 구원이 한 번 더 묵상하시고 한 번 더 생각하시고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는 그런 말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체육대회도 추수 감사 중 우리가 준비하게 될 텐데 이 후반기에도 한 영감을 품고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탄은요. 우리의 인생을 사망의 그늘에 앉혀놓고요. 올무를 묶어두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독생자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사망의 그늘에 빛을 비추시게 하셨고요. 옥에서 해방시켜주셨어요. 생명의 말씀 저와 여러분들이 이 해방시키신 목적에 따라서 오늘 나의 신앙을 잘 바꾸시고 더불어서 주변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전진해 나가는 아름다운 후반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