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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의 건국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후한(後漢, 25년 ~ 220년)에서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 길험편(吉驗篇)이다. 다음과 같다.
◇ 論衡 卷九 吉驗篇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鷄子, 從天而下我, 故有娠. 後産子, 捐於猪溷中, 猪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藉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 令其母收, 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南至掩淲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渡, 魚鼈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논형 권9 길험편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비(侍婢 : 계집종)가 임신하였다. 왕이 죽이려고 하자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 크기가 달걀만한 기(氣)가 있었는데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오더니 임신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겨 두고 말이 밟아 죽이기를 바랬으나 말이 또다시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의아하여 하늘의 아들인가 하고 그 어미가 거두어 종처럼 키우라고 명했다. 동명(東明)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동명이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뒤쫓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이로써 부여(夫餘)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북이(北夷)에 부여국(夫餘國)이 있는 것이다.
논형(論衡)은 30권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자기편(自紀篇)은 왕충(王充)의 자서전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왕충(王充)은 광무제(光武帝, 재위 25년 ~ 57년) 건무(建武) 3년(서기 27년)에 출생하였다. 장화(章和) 2년(서기 88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머물렀다.(章和二年 罷州家居) 나이가 점차 들어 일흔(서기 96년)이 되니(年漸七十) 해가 갈 수록(曆數冉冉 역수염염) 심신이 쇠약해졌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껴 양성서(養性書) 16편을 저술하고 섭생에 힘썼으나 수명을 늘리지 못하니 탄식하며 슬퍼하노라.(命以不延 吁嘆悲哉)
후한서(後漢書) 왕충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後漢書 王充列傳
年漸七十,志力衰耗,乃造養性書十六篇,裁節嗜欲,頤神自守。永元中,病卒於家
왕충(王充)은 나이가 일흔(서기 96년)에 가까워지면서 기력이 쇠잔하자 양성서(養性書) 16편(篇)을 저술하고 절제하며 섭생에 힘썼다. 영원중(永元中) 집에서 병사했다.
영원(永元)은 후한(後漢) 화제(和帝)의 연호(年號)로 89년부터 105년 3월까지 사용하였다. 왕충(王充)은 62세(서기 88년)에 관직에서 은퇴하고 논형(論衡)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70세(서기 96년) 무렵 양성서(養性書) 16편(篇)을 저술한 후 논형(論衡)의 마지막 편인 자기편(自紀篇)을 저술하고 수년 후 사망했다. 따라서 필자는 왕충(王充)이 97년경 논형(論衡)을 완성했고 100년경 74세에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오늘날 학계에는 왕충(王充)이 서기 80년에 논형(論衡)을 완성하고, 97년에 71세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낭설이다.
서진(西晉, 265년 ~ 316년)에서 진수(陳壽, 233 ~ 297)가 290년 무렵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했고 비슷한 시기에 어환(魚豢)이 위략(魏略)을 저술했다. 어환(魚豢)은 진수(陳壽)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행적이 없다. 훗날 남조(南朝) 송나라(宋, 420년 ~ 479년)에서 배송지(裵松之, 372년 ~ 451년)가 위략(魏略) 등 150 종류의 서적을 참고하여 삼국지(三國志)에 방대한 주석을 달았다. 송(宋) 문제(文帝, 재위 424년 ~ 453년)의 명으로 429년에 착수하여 완성본을 문제(文帝)에게 올렸는데 완성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배송지는 위략(魏略)에서 동명(東明) 신화를 옮겨 적었다.
◇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夫餘傳 裵松之 注 : 魏略 曰 , 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 「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 , 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 , 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爲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부여전 배송지 주석 : 위략(魏略)에 가로되 , 옛 서지(書志)에 이런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국(高離之國)이 있었다. 그 왕의 시비(侍婢 : 계집종)가 임신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 달걀같은 기(氣)가 있다가 내려오더니 내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더니 돼지들이 입(喙 훼)으로 불어주었다. 아기를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이 기(氣)를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의아하여 하늘의 아들인가 하고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라 명하였다. 동명(東明)이라 이름 짓고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동명이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내 흩어져 뒤쫓던 병사들은 건너지 못했다. 이리하여 동명은 부여(夫餘) 땅에서 왕이 되었다.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은 줄거리가 동일한데 다만 논형(論衡)의 탁리국(橐離國)과 엄호수(掩淲水)를 위략(魏略)은 고리국(高離之國)과 시엄수(施掩水)라 했다. 위략(魏略) 원본은 당나라(唐) 때 유실되었다.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탁(橐)은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고 휴대하는 자루)를 뜻하는데 활집을 뜻하는 고(櫜)와 글자 모양이 흡사하다. 본래 고리국(櫜離國)인데 논형(論衡)에 탁리국(橐離國)으로 잘못 기재한 것을 위략(魏略)에서 바로 잡으면서 알기 쉬운 고리국(高離國)으로 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남조(南朝) 송나라(宋)에서 배송지(裵松之)와 동시대를 살았던 범엽(范曄, 398년 ~ 445년)이 후한서(後漢書)를 저술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논형(論衡)의 동명신화를 옮겨 적었는데 탁리국(橐離國)을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색(索)은 삭으로도 읽는다.
◇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後漢書 東夷列傳 夫餘國)
初,北夷索離國王出行,其侍兒於後妊身,王還,欲殺之。侍兒曰 「 前見天上有氣,大如雞子,來降我,因以有身 」 王囚之,後遂生男。王令置於豕牢,豕以口氣嘘之,不死。復徙於馬蘭,馬亦如之。王以為神,乃听母收養,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奔走南 , 至掩淲水,以弓擊水,魚鳖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餘而王之焉。
처음에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녀가 후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죽이려고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 전에 하늘 위에 달걀 크기 만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 내려오더니 임신했습니다. 」하였다.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명하여 돼지 우리에 두었는데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겼더니 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어미가 거두어 기르게 하고 동명(東明)이라 이름지었다. 동명이 자라서 활쏘기를 잘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이 올라가 강을 건넜고 부여에 이르러 왕(王)이 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74년에 태어나 391년에 왕위에 오르고 412년 음력 10월에 39세로 별세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산릉(山陵) 공사를 414년 9월에 완료하고, 선왕(先王)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높이 6.39 m의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고구려의 옛 도읍 환도성(丸都城) 인근에 있는 광개토왕릉 비석에 고구려 건국신화가 새겨져 있다.
◇ 광개토왕릉 비문(碑文)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옛적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다. 북부여에서 나왔고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 : 江을 관장하는 神)의 따님이다. 알을 부수고 세상에 내려왔는데 태어나면서 성스러움이 있었다. ▨▨▨▨▨▨ 길을 떠나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부여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루터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황천(皇天 : 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河伯)의 따님인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이어붙이고 거북이가 물에 떠오르거라." 하니, 이 소리에 응하여 즉시 갈대가 이어붙고 거북이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광개토왕릉 비문(碑文)의 추모왕(鄒牟王) 신화는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의 동명(東明) 신화와 출생의 내력이 다를뿐 건국 과정이 흡사하다. 고구려에서 부여의 동명신화를 가져다가 추모왕으로 바꾸고 출생내력을 윤색하여 고구려 건국신화로 삼은 듯하다.
위서(魏書)는 북위(北魏 , 386년 ~ 534년)의 정사(正史)이다. 북제(北齊 , 550년 ~ 577년)에서 위수(魏收)가 저술했는데 본기 14권과 열전 96권은 554년에, 지(志) 20권은 559년에 완성했다. 위서(魏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魏書 高句麗列傳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爲夫餘王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旣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衆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于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是魚鼈並浮, 爲之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爲氏焉. 初, 朱蒙在夫餘時, 妻懷孕. 朱蒙逃後生一子, 字始閭諧. 及長, 知朱蒙爲國主, 卽與母亡而歸之. 名之曰閭達, 委之國事.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 如栗死, 子莫來代立, 乃征夫餘, 夫餘大敗, 遂統屬焉.
위서 고구려열전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부여왕(夫餘王)에 의해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비치기에 몸을 이끌고 피하자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 하였다. 부여왕이 알을 버려서 개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였다. 뒤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깃털로 감싸주었다. 부여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그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부여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서 장차 다른 뜻을 품을 것이니 그를 없애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돌보게 하였다. 주몽은 매양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아내서 날쌘 말은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을 한 개만 주었다.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으나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몰래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에게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어디로든 적당한 곳으로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인(烏引) 오위(烏違)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길을 가다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의 추격이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치는데 추격하는 병사가 다가오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새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고, 한 사람은 장삼옷(納衣)을 입고,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은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임신하였다. 주몽이 도망한 뒤 아들을 낳으니, 처음에는 이름을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 되었음을 알고,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다. 그의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부르고, 나라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대를 이었고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대를 이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대를 이었다.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논형(論衡), 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에 수록된 동명(東明)의 부여 건국신화가 위서(魏書)에는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신화로 바뀌었다. 위서(魏書)를 편찬할 당시 중국에서는 동명(東明)의 부여 건국신화를 알고 있었지만 부여는 이미 고구려에 정복되었고 북위(北魏)와 북제(北齊)는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였기에 고구려에서 주장하는 주몽신화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618년에 건국한 당나라(唐)는 636년에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를 한꺼번에 편찬했는데 양서(梁書), 주서(周書), 수서(隋書)에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과정을 기록했다.
◇ 양서(梁書) 고구려열전(高句驪列傳)
高句驪者,其先出自東明。東明本北夷橐離王之子。離王出行,其侍兒於後任娠,離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如大雞子,來降我,因以有娠 」 , 王囚之,後遂生男。王置之豕牢,豕以口氣噓之,不死,王以爲神,乃聽收養。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乃奔走,南至淹滯水,以弓擊水,魚鱉皆浮爲橋,東明乘之得渡,至夫餘而王焉。其後支別爲句驪種也。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東明)에서 나왔다. 동명은 본래 북이(北夷) 탁리왕(橐離王)의 아들이다. 탁리왕이 출행한 후 그 시녀가 임신했다. 탁리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 앞서 큰 계란만한 기(氣)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 내려와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시녀를 가두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왕이 돼지 우리에 두었는데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했다.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을 꺼려하여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올라가서 강을 건넜고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 후손 지파가 고구려 종족이 되었다.
양서(梁書)는 논형(論衡)에서 동명신화를 옮겨 적었는데 엄호수(掩淲水)를 엄체수(淹滯水)라 했고, 부여의 시조는 동명이라 하고서 동명의 후손 지파가 고구려 종족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는 위서(魏書)의 주몽신화를 간략하게 옮겨 적었다.
◇ 주서(周書) 고려열전(高麗列傳)
高麗者,其先出於夫餘。自言始祖曰朱蒙,河伯女感日影所孕也。朱蒙長而有材畧,夫餘人惡而逐之。土于紇斗骨城,自號曰高句麗,仍以高為氏。
고려(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가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하여 잉태하였다. 주몽이 자라서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냈다. 주몽은 흘두골성(紇斗骨城)에 자리잡고 고구려라 이름 짓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수서(隋書)는 당(唐)에서 위징(魏徵)과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이 감독하고, 안사고(顔師古)와 공영달(孔穎達) 등이 집필하여 636년에 본기 5권, 열전 50권을 완성하였다.
◇ 수서(隋書) 고려열전(高麗列傳)
高麗之先出自夫餘。夫餘王嘗得河伯女,因閉於室內,為日光隨而照之,感而遂孕,生一大卵,有一男子破殼而出,名曰朱蒙。夫餘之臣以朱蒙非人所生,咸請殺之,王不聽。及壯,因從獵,所獲居多,又請殺之。其母以告朱蒙,朱蒙棄夫餘東南走。遇一大水,深不可越。朱蒙曰:「我是河伯外孫,日之子也。今有難,而追兵且及,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朱蒙遂渡。追騎不得濟而還. 朱蒙建國,自號高句麗,以高為氏。朱蒙死,子閭達嗣。
고려(고구려)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하백의 딸을 만나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이에 감응하여 잉태해서 큰 알을 낳았다. 사내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주몽이라 이름 지었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죽이자고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몽이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가서 무척 많이 잡으니 또 죽이자고 청했다. 그 어머니가 주몽에게 알려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큰 강을 마주쳤는데 깊어서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추격하는 병사들이 가까이 이르러 어려움에 처했는데 어찌하면 건널 수 있는가? " 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너갔고 추격병은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부르고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주몽이 죽고 아들 여달(閭達)이 뒤를 이었다.
양서(梁書), 주서(周書), 수서(隋書)는 백제(百濟)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梁書 百濟列傳
百濟者,其先東夷, 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卽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東夷)이다. 세 한국(韓國)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 12국이고 마한은 54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서 모두 십여만 호(戶)이다. 백제는 그 하나인데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병하였다.
◇ 周書 百濟列傳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夫餘氏
백제는 그 선조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고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가 있어 대방군(帶方郡)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땅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에 면한다. 동서 450리, 남북 9백여리이다. 도읍은 고마성(固麻城)이고 그 밖에 다시 5방이 있다.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이다. 왕의 성(姓)은 부여씨(夫餘氏)이다.
◇ 隋書 百濟列傳
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國王有一侍婢,忽懷孕,王欲殺之。婢云:「有物狀如雞子,來感於我,故有娠也」 , 王捨之。後遂生一男,棄之廁溷,久而不死,以為神,命養之,名曰東明。及長,高麗王忌之,東明懼,逃至淹水,夫餘人共奉之。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시비(侍婢) 하나가 홀연히 잉태해서 왕이 죽이려고 했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 달걀처럼 생긴 물체가 나에게 오는 느낌이었고 그리하여 임신했습니다." 라고 하여 왕이 죽이기를 포기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이에 신기하게 여겨 아이를 키우라 명하고 동명(東明)이라 이름지었다. 장성하자 고려왕이 꺼려했다. 동명이 두려워 달아나 엄수(淹水)에 이르렀고 부여 사람들이 함께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인자함과 신의가 두터웠고 대방군(帶方郡)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漢)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 보냈다. 점차 창성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일백(一百) 가구(家口)가 바다를 건넜기에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다.
수서(隋書)는 고구려의 건국에 관하여 주몽신화와 동명신화 두 가지를 기록했다. 고구려열전에는 위서(魏書)의 주몽신화를 옮겨 적고 백제열전에는 위략(魏略)의 동명신화를 옮겨 적었다. 그러면서 백제의 선조는 동명이라 하고 동명이 태어난 고리국(高離國)을 고려국(高麗國)으로 잘못 적었다. 백제의 건국에 관해서는 주서(周書)와 마찬가지로 구태(仇台)의 설화를 기록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여 신뢰하기 어렵다. 수서(隋書)는 전체적으로 뒤죽박죽이라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
당나라(唐)에서 이연수(李延壽)가 659년에 완성한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 북사(北史)와 남사(南史)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北史 百濟列傳
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 其王出行, 其侍兒於後姙娠,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如大鷄子來降, 感, 故有娠.」, 王捨之. 後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後徙於馬闌, 亦如之. 王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爲橋, 東明乘之得度, 至夫餘而王焉.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백제는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다.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그 왕이 출행하였는데 그 시녀가 뒤에 임신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시녀를 죽이고자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 위에 큰 달걀만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고 내려오는 느낌이었는데 그리하여 임신했습니다." 하여 왕이 죽이기를 포기했다. 후에 사내아이를 낳아서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었는데 돼지들이 입으로 기운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후에 마굿간으로 옮겼으나 마찬가지였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아이를 키우라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했다. 장성해서 활을 잘 쏘니 왕이 그 용맹함을 꺼려하여 다시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도망쳐서 남쪽으로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다리가 되어 동명이 올라가 강을 건넜고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했으며 처음에 대방군(帶方郡)의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 보냈다.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에 일백(一百) 가구(家口)가 (바다를) 건넜기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하였다.
◇ 南史 百濟列傳
百濟者,其先東夷 , 有三韓國 , 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東夷)이다. 세 한국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 12국이고 마한은 54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십여만 호이다. 백제는 그 하나인데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병하였다.
주서(周書) , 수서(隋書) , 북사(北史)는 동명이 부여를 세웠다 했고, 수서(隋書)와 북사(北史)는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 帶方)의 옛땅에 백제를 세웠다고 했다. 공손도( 公孫度)는 후한말 189년에 요동군 태수가 되었고 204년에 사망했다. 동명의 출신국을 논형(論衡)과 양서(梁書)는 탁리국(橐離国), 위략(魏略)은 고리국(高離國), 후한서(後漢書) 및 북사(北史) 백제열전은 색리국(索離國)이라 했다.
북사(北史)와 남사(南史)는 백제에 관한 기록이 서로 다르다. 북사(北史)는 고구려열전에 위서(魏書)의 주몽신화를 옮겨 적고, 백제열전에 후한서(後漢書)의 동명신화를 옮겨 적어서 같은 책에 다른 내용을 수록하였다. 북사(北史) 백제열전은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의 백제건국 이야기를 수서(隋書)에서 옮겨 적었다. 남사(南史)는 고구려열전에 북사(北史)를 보라 하고 백제열전에 북사(北史) 백제열전과 전혀 다른 양서(梁書) 백제열전(百濟列傳)을 옮겨 적었다. 중국 사서의 백제 건국사는 뒤죽박죽이라 종잡을 수가 없다.
고려에서 김부식(金富軾)이 주관하여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는 광개토왕릉 비문과 위서(魏書)의 주몽신화에 다른 내용을 추가하여 가장 상세하게 기술했다. 다음과 같디.
◇ 三國史記 第十三卷
高句麗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蛙 一作蝸 ,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綠邊室中 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 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烏伊 摩離 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普術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 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며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어서도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蛙)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터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면서 나를 웅신산(熊神山)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고 꾸짖고, 우발수(優渤水)로 유배 보내 살게 했다."라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그녀를 따라 가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닷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서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다시 길 가운데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일곱 살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여 만약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다. 주몽은 날쌘 말을 알아내어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 했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 이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淹淲水)에 이르렀는데 일명 개사수(盖斯水)로 지금의 압록강 동북에 있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가끼이 왔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 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術水)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魏書)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일설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때(고구려를 건국한 때)는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22세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에도 세는 나이로 계산했으니 주몽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58년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을 졸본천(卒本川)으로, 지금의 환인(桓仁)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졸본성으로 추정한다.
◇ 삼국사기 제13권
東明聖王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동명성왕 14년(기원전 2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에서 돌아가셨다. 그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로 장사를 치르고 사당을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바쳐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東明聖王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동명성왕 19년(기원전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그 어머니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해 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朱蒙在扶餘, 娶禮氏. 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고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 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 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 구추, 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시조로 온조왕(溫祚王) 설과 비류왕(沸流王) 설을 기록했다.
◇ 삼국사기 제23권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졸본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이다. 또 이르기를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越郡)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 싶어 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컨데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은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험과 지리가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서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올 때 기뻐하며 따랐기에 뒤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년에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일설에는 시조가 비류왕(沸流王)이라고 한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고,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한(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 소서노와 결혼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잡는 데에 소서노의 내조가 많았기에 주몽이 그녀를 특별히 총애하였고 비류와 온조를 친아들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류(孺留)가 오자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왔을 때, 어머니는 집안의 전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힘을 쏟았다. 대왕이 돌아가시고 나라는 유류에게 돌아갔으니 우리가 여기 남아 우울하게 지내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느니만 못하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주몽은 기원전 58년에 출생해서 22세이던 기원전 37년 2월에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갔다. 그 때 부인 예씨(禮氏)가 유리를 임신하고 있었으니 유리(瑠璃)는 기원전 37년에 출생했다. 소서노는 기원전 66년생이고 30세이던 기원전 37년에 22세인 주몽과 결혼했다. 주몽은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인데 소서노는 큰 부자여서 주몽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주몽이 40세, 소서노가 48세인 기원전 19년 4월에 주몽의 첫부인 예씨(禮氏)가 19세 아들 유류(孺留)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해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유류를 태자로 삼았으니 예씨(禮氏)를 왕비로 인정한 셈이다. 소서노의 나이로 미루어 비류가 유류보다 10세 정도 많아서 이 때 30세에 가까웠으니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을 터인데 태자를 비류에서 유류로 바꾼 것이다. 그 해 9월에 주몽이 죽고 유류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상적으로 내전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소서노와 두 아들은 그 해 겨울을 보내고 다음해(기원전 18년) 이른 봄에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자리 잡았다.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시조설만 옮겨 적고 비류왕 시조설은 누락시켰다. 이리하여 온조왕 시조설이 지금까지 정설로 통해 왔다. 다음과 같다.
◇ 三國遺事 紀異 第二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史本記云 百濟始祖溫祚. 其父雛牟王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州之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州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恐後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歸彌雛忽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佳三年也. 沸流以彌雛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城, 後以來時百姓樂悅,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後至聖王, 移都於泗泚, 今扶餘郡. 彌雛忽仁州 慰禮今稷山.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이(第二)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記)에 이르기를,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그는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沸流)이고 다음이 온조(溫祚)이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드디어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하자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생각컨데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은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험과 지리가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이 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 3년(기원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 것을 보고서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올 때 기뻐했기에 뒤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후에 성왕(聖王)에 이르러 사비(泗泚)로 도읍을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扶餘郡)이다. 미추홀(彌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禮)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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