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四念處)는 ‘사념주(四念住)’ 라고도 하는데, 몸과 감각과 마음과 법에 있어 마음을 모아 관하는 방법이다.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관신부정(觀身不淨)입니다. 몸에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더럽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많잖아요.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화장하고 귀걸이하고 목욕시키면서 늘 몸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민은 부정하다’ ‘귀족은 성스럽다’ 이렇게 사람을 구분 지어 차별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다고 할 것도 없고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 말은 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잖아요. 그래서 기분 좋음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말을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반복이라는 뜻입니다. 고락(苦樂)의 윤회가 곧 고(苦)라는 것이 관수시고(觀受是苦)입니다.
셋째,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어떻고 네 마음이 어떻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죽 끓듯이 계속 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무상한 것이라 믿을 게 못 돼요. 이것이 관심무상(觀心無常)입니다.
넷째,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이것은 진리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일 뿐 모든 존재에는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진리’라는 것에도 실체가 없고, ‘천하만물’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을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