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2:1-10 어떻게 스올의 뱃속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가드헤벨[나사렛 북동쪽 5km]에 살고 있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1:2)라고 말씀하셨다. 니느웨는 어디에 있는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티크리스강 쪽에 있는 거대 도시이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이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기 싫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줄곧 핍박해 왔고, 그런 원수들이 싫었고, 회복되면 이스라엘을 더욱 심하게 간섭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원수를 도와 동족 이스라엘을 배신하는 꼴이다.
요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쳤다[대립]. 불평불만이 생겼다. 그러자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싶었다. 피하고 싶은 생각은 더 커져서 이스라엘과 니느웨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너무 싫으면 가장 멀리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다시스였다. 다시스는 어디에 있는가? 지중해의 가장 왼쪽에 있는 스페인의 항구도시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나라이다. 둘의 거리는 약 4,000km. 그래서 그는 욥바항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날 수 있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싶은 목적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곧바로 뱃삯[승선료]을 주고 승선했다(3). 그리고 배의 가장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을 잤다(5).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보기 싫은] 마음[불순종, 불만족, 불평]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일종의 “잠수”이다. 요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청중] 우리도 누군가가 싫으면 잠수를 탄다[숨는다]. “소셜 블랙아웃(Social Black-out)” 모든 연락을 끊고 숨는다. 상대에 대한 불만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때론 나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 하나님이 싫어서 이런 식으로 도망칠 때도 있다. 교회로 나와 예배와 기도를 하지 않는다. 연락 두절이다. 잠수[숨기/관계끊기/블랙아웃]는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 처음 행한 행동이다. 아담과 하와 부부는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죄를 지은] 후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자마자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8).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잠수 타기[숨기/관계끊기/블랙아웃]를 (자주)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내 뜻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이 자주[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뜻 사이에 대립각이 세워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어 잠수를 탄다. 이런 일이 발생 되지 않길 축복한다. 발생했다면 빨리 잠수를 그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길 축복한다.
요나는 잠수를 탐으로써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장이 깊이 잠든 요나를 깨우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1:6) - 어쩌면 요나는 선장의 깨움이 하나님의 깨움으로, 선장의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깨어나 보니 배는 태풍 속에 있었고, 선원들은 두려워하여 자기의 신들을 부르면서 살기 위해 귀중한 물건들을 다 바다에 던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요나는 하나님이 잠수를 탄 자기에게 내리신 재앙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1:12). 선원들은 의문점이 생겼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1년 중 태풍이 전혀 없는 시기를 선택하여 항해해 왔다. 그런데 왜 태풍이 발생한 거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는 필경 배 안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발생한 재앙이야!’ 그래서 제비를 뽑았다. 요나는 자신이 걸리지 않기를 내심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걸린다면 하나님께서 걸리게 한 것이니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누구의 제비가 뽑혔을까? 요나였다. 요나는 이 태풍[고난]이 자기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 일으키셨음을 더 확신할 수 있었고(1:12),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하겠냐?”는 선원들의 질문에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리라”(1:12)고 말했다. 요나는 현재의 고난이 왜 생겼는지 그 원인을 알고 있었고,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원들은 요나를 살리고 싶었던지 바다에 던지지 않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바다는 더욱 사납게 그들을 향해 몰아붙여서 노를 저을 수 없게 했다. 이때 요나는 더욱더 이 태풍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내리신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다. 파도와 큰 물결이 요나 위에 넘쳤다(2:3). 바닷물이 요나의 영혼까지 둘렀고, 깊은 바다가 요나를 에워쌌고, 바다풀[해조류]이 요나의 머리를 휘감았다(2:5). 그리고 산의 뿌리[해구]까지 내려갔고, 땅[갯벌]이 빗장이 되어 요나를 오래도록 막았다(2:6). 사실상 요나는 죽었다. 이로써 요나의 불순종은 죽음으로 끝났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싶어서 욥바로 내려갔고, 배의 밑층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은 잠수를 탄 요나를 다시 태풍으로 끄집어내어서 바다로 내려가게 하셨고, 결국은 바다의 가장 깊은 해구[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갯벌에 묻히게 되었다.
[청중]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인생에 내리막길이 생긴다.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죄의 내리막[편한]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내리막길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도록 재앙을 내리실 때가 있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본인이나 가족에게 병이 걸리거나, 큰돈이나 가족을 잃어버렸거나, 도전했던 것에 실패하게 하신다. 이때 순간 떠오르는 잘못[죄]들이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죄를 들춰내신다. 이때 우리는 이 죄들을 두둔하거나 포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일으킨 태풍을 멈춰보기 위해 선원들이 귀중한 물건을 바다에 던져 보아도(1:5), 힘써 노를 저어 육지로 돌아가고자 해도(1:13) 모두가 허사였다. 죄를 숨기고 변명하면서 재앙을 해결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더욱 거칠게 다루신다. 실패와 좌절에 빠져 인생을 비관하고 싶겠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요나처럼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실직고[인정]해야 한다.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자. 빨리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시면 달게 받길 바란다. 하나님은 태풍을 일으켜 배의 가장 밑층에 숨은 요나, 불만으로 가득 찬 요나, 불순종한 요나를 끌어내어 바다로 던져버리셨다. 그리고 죽게 하셨다.
요나의 인생은 여기서 끝인가? 요나는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봐도 요나는 깊은 바다에서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요나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 하나님이 자신을 살리셨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살아난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있으면 살 수 있을까? 없다. 그것도 물 밖이 아니라 바다 깊은 속에 있는 물고기 뱃속이다. 그 뱃속에 사람이 있다면 살 수 있을까? 그것도 3일 밤낮을? 생물학적[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왜 하나님은 요나를 살리셨을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요나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2).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2) - 그는 언제 고난을 받았는가? 바다에 던져져 바다가 그를 삼킬 때[큰물이 그를 두르고 그 위에 넘칠 때](3)이다. 그는 그때 기도를 했다. 요나의 변화된 모습이다. 뭐라고 기도를 했는가?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2:4) - 그는 편안한 배 밑층에서도 기도하지 않고 깊이 잠만 잤던 자이다. 육은 편안해도 영은 죽어 있었다. 재앙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요나는 죽음 직전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육은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은 살아났다. 스올의 뱃속은 어디일까? 바다풀[해조류]에 머리가 휘감긴 해저이다. 바다 중 가장 깊은 산의 뿌리[해구]이다. 이 갯벌에 파묻혀 생명이 죽어 갈 때[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요나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다시 한번 여호와를 생각하며 기도를 올렸다(2:7). 그런데 그 기도가 주께 이르렀고 주의 성전에 미쳤다(2:7)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셨다(2:6)고 고백했다. 구덩이가 어디인가? 바다풀[해조류]가 자라는 해저, 산의 뿌리[해구]의 밑바닥, 스올의 뱃속, 죽은 자의 영역, 하나님의 손길이 없이는 도저히 건져낼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자의 목숨을 하나님이 물고기를 통해 건져내 버리셨으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바닷속 물고기 뱃속인데도 죽지 않는 자신과 자신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장소가 물고기 뱃속이라도 상관없었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 물고기 뱃속 정도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사선을 넘는 큰 경험을 하면 웬만한 것은 다 쉽게 넘어간다. 이처럼 하나님을 크게 경험하면 지옥 같은 환경도 감사해진다. 그래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도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하나님의 명령]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2:9)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는 요나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받으시고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다. ‘기도한다고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날까?’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이성과 상식과 과학을 뛰어넘어 존재하시고, 그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 천지를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기적이 일어난다.
몰아친 태풍[고난]은 우연일까?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걸린 것이 우연일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바다가 그친 것이 우연일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것이 우연일까? 물고기의 밥이 되어 버렸는데 요나가 살아 있다는 것이 우연일까? 깊은 바닷속에 있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요나가 3일 밤낮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우연일까? 그리고 3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낸 것이 우연일까?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여호와께서 큰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셨다(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반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1:17). 아무 데도 손상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서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했다(2:10).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이 우연일까?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다. 이를 인정하자. 잘 되고 있다면 감사 영광 돌리고, 잘 풀리지 않고 있다면 재앙의 원인을 여러분에게서 찾아보자. 그리고 그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죄의 대가를 달게 받자[죗값을 치르자].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기도하자. 이후엔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건져낼 물고기를 보내신다. 죽음과 같은 삶에서 건져내신다. 살리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경험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 감사가 저절로 생긴다. 사명에 불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