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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 오세창
(1864. 8. 6 - 1953. 4. 16)
오세창의 일대기를 읽다보면 화가라기보다는 우리나라 근대사, 그 중에도 개화사가 그의 몸에 모아져 있다는 느낌이다. 개화운동이라고 하는 사회운동, 개화당 사건이라는 정치 운동,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서화 골동 수집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려면 서예의 전서와 전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오세창을 기리는 이유는 정치-사회 운동 때문이 아니고 한국 미술사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오세창을 말하려면 그의 아버지 역매 오경석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아버지는 오세창의 몸만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그의 정신세계를, 나아가서 그의 삶까지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세창을 개화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 말에 추사 김정희가 젊어서 중국에 다녀 온 후로는 중국이라는 외국의 문화와 예술에 흠뻑 젖어버린다. 중국 예술을 직접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남종문인화로 도색해버릴 만큼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한도를 말할 때는 중국어 역관인 이상적을 말한다. 이상적은 추사가 사랑하는 제자이었다. 그만큼 중국 문물에 빠져서 우리나라의 개화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북학파라고도 하고, 개화파라고도 한다.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고종 16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역관, 외교관이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작가이자 시인이며 서예가, 서화가이기도 하였고, 고미술품 감정에도 식견을 갖추었다.
1831년(순조 31년) 한성부에서 중국어 역관인 오응현(吳膺賢)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뿐 아니고 할아버지 오계순, 증조부 오도원도 역관이었다. 출사하여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대대로 8대나 역관을 하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경석을 말하자면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로서,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이다.[1] 또 역관·서화가·금석학자이며, 특히 전서체를 잘 썼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이며, 서울 출신이다. 역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은 그의 아들이다. 그가 걸어간 길을 보면 아버지를 뻬닮았다고 하겠다.
오경석은 1846년에 역과에 합격하여 한어(중국어)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1853년에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는 개항론을 주장했다. 환재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인사이자,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형 인물로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이상적(李尙迪)의 문인이었고, 박제가를 사숙하였다.
아버지 오응현은 자신의 친구였던 역관 이상적을 초빙하여 집안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므로 오경석은 이상적에게 글을 배웠다. 이상적은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박지원과 박제가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 오경석 또한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후 박제가와 연암 박지원의 학문도 사숙하였다. 오세창의 학문적 계보를 따진다면 김정희 - 이상적 - 오경석 - 오세창이다. 여기에 박지원과 박제가의 영향도 받았다.
청나라의 사행길을 여러번 수행하고 돌아온 오경석은 1840년대의 아편전쟁, 1851년의 태평천국 운동, 그밖에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등으로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베이징 현장에서 보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면으로 오경석을 보면 사행을 따라 중국을 오고 가는 역관은 사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이 그때의 사회상이었다. 김정희 - 이상적의 선상에 있었던 오경석은 예술에 대한 눈을 뜨고, 중국에서 서화, 골동도 사들였다. 연경을 다니면서 문물이 앞선 중국을 숭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 박제가와 박지원의 학풍도 오경석을 거쳐서 오세창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박규수의 문인이자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오세창이 나중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둘리는 이유가 된다.
계명대 김양동 교수가 전각의 역사에 관하여 쓴 글에는 오세창을 근대 전각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전각의 글자체가 전서이므로, 예술가로서의 오세창은 서예의 전서, 그리고 전각에 뻬어났다.
오세창도 1879년 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오세창은 관직에 나가면서 아버지를 벗어나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 1896년에 일본 문부성으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 학교 조선어 교사로 1년간 생활했다. 이때 일본을 통해서 근대문물을 만났다. 1902년 6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육사 출신의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쿠테타가 실패한 사건이다. 일본에 망명해 5년을 보냈다. 이때 위창은 천도교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위창은 6월에 천도교의 항일언론지인 ‘만세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강제 폐간되자 1909년에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에 대항하는 언론운동을 펼쳤다. 이때 위창은 우리 언론사상 최초로 창간호부터 1면에 시사만평을 실었다. 관재 이도영이 그린 만평은 대개 위창이 정하고 쓴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미련한 놈이 도끼를 잘못 써 제 등에 찍히는 그림을 그리고는 “완용 자부 상피(頑用 自斧 傷皮)”라고 썼는데, 음을 바꾸면 “이완용이 자부(子婦)하고 상피(相避·근친상간) 붙었다”라는 야유가 된다. 그러나 1910년, 결국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위창은 칩거하며 우리 서화사 자료를 집성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춘곡 고희동의 증언에 따르면 “언행은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을 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기독교계, 불교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독립선언서 제작에 들어갔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이 쓰고 위창이 감수한 것이었다.
그때 위창은 육당이 쓴 독립선언문 초고를 검토하면서 이런 일화를 남겼다. 선언문 앞머리에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쭉 나열한 유명한 구절 “아(我) 생존권이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위창은 육당에게 박탈은 ‘빼앗아 가는 것’이고 ‘빼앗겨 잃어버린’ 피동태는 박상(剝喪)이라며 교정을 보고서는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 일”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3·1독립운동 후 위창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2년8개월을 복역한 뒤 1921년 11월에 가석방되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이후 위창은 다시 칩거하며 서화사 자료 집성에 전념하게 된다.
위창은 서화 감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권위자였다. 진위 판정에서 위창이 맞다면 맞는 것이고 작가 추정에서 위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지금 시대엔 그런 권위 있는 안목이 없어 요즘 미술계가 시끄러운 이유일 것이다. 위창은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아 서화사를 집대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부친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말년 제자로 금석학의 학통을 이어받아 <삼한 금석록>을 펴냈다. 위창의 작업은 추사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퍽 옛날 얘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나라 옛 그림>을 펴낸 이동주 선생은 생전에 위창을 찾아뵙고 안목을 많이 배운 바 있는데 추사에 대해 강의를 하시면서 “추사는 성격이 아주 까다로웠대요”라며 추사의 인간상을 풀어나가셨다. 강의가 끝난 뒤 내가 동주 선생에게 그 사실이 어느 책에 나오느냐고 여쭈었더니 “위창 노인이 역매 어른에게 그렇게 들었대요”라는 것이었다. 순간 추사, 역매, 위창 모두가 꼭 옆집에 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처럼 다가왔다.(유홍준)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책으로만 알던 인물을 강의를 통해서 들으면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세세한 내용들, 또는 일화들을 생생하게 만나므로 책 속의 먼 인물이 아니고 내 옆집의 할아버지, 아저씨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강의를 통해서 들을 필요성이 있다고 믿는다.
위창의 이 작업은 1916년 12월 매일신보에 5회에 걸쳐 실린 만해 한용운의 위창 오세창 방문기인 ‘고서화의 3일’에 자세하다. 만해는 첫날 <근역화휘> 화첩과 금석문 탁본을 감상했고, 다음날에는 23첩으로 된 서첩 <근역서휘>를 보았고, 사흘째에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역서휘, 속편> 12첩을 큰 감명 속에 오래 배관했는데 특히 위창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서화가들의 색인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유홍준의 글에서)
위창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바로 이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의 편찬이다. 신라, 고려, 조선 상·중·하 5편으로 나누고, 이를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했는데 수록 인명이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이다. 각 서예가와 화가의 성명에 이어 자·호·본관·가계·출생 사망연도 등을 밝힌 다음, 각종 문헌에 나오는 해당 예술가에 대한 기록과 논평, 제시(題詩) 등을 있는 대로 찾아 싣고 그 서목을 다 밝혔다. 이를 위해 인용한 문집이 총 270종이나 된다. 이 밖에 읍지·족보·비명·서화 작품의 제발(題跋)까지 견문이 닿은 것은 모두 수록하고 전해지는 작품의 이름과 소재까지 기록했다.
이는 실로 방대한 인명사전이고 백과사전이다. 육당 최남선은 이 저술을 일러 ‘찬연한 등탑(燈塔)’이고, ‘암흑한 운중(雲中)의 전깃불’이라고 했다. 이런 방대한 작업이라면 몇 십 명의 연구자가 몇 년에 걸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홀로 해내신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 회화사와 서예사는 이 <근역서화징>이 있음으로 해서 후학들이 그다음 단계의 연구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1917년에 탈고되었고, 1928년에 계명구락부에서 출간되었으며 2009년에야 한글 번역본이 나왔다. 책 원본을 보면 <근역서화사>라 되어 있는데, 자료 모음이라는 뜻으로 ‘징(徵)’이라 바꾼 것은 위창의 학문적 겸손이었다.
왕조사회가 붕괴되고 근대적 시련이 시작되는 시점에 위창 오세창이라는 분이 있어 미술사 분야는 전통의 단절 없이 구학(舊學)에서 신학(新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근대적인 학문체계로서 한국미술사의 아버지를 우현 고유섭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앞선 세대인 위창 오세창은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다.
위창은 고서화의 연구뿐만 아니라 수집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1915년 매일신보의 한 기자는 위창 선생 방문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근래에 조선에는 진귀한 서적과 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씨 같은 이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10 수년 이래로 조선의 서화가 (일본으로)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재력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구입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글씨 1125점이오, 그림 150점이다. … 씨는 앞으로 100여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유명 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며 부지런히 수집 중이다.”
이때 위창은 아마도 우리나라 서예사와 회화사를 실제의 작품으로 보여주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위창은 이렇게 모은 서화를 체계화해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묵> 세 묶음으로 펴냈다. 편저에 모두 무궁화 근(槿) 자를 쓴 것에는 나라를 잃은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는 조선도 아니었고 대한민국도 아닌 무궁화 산천이었던 것이다.
<근역화휘>는 천(天)·지(地)·인(人) 3첩으로 여기에는 신사임당의 ‘백로’, 겸재 정선의 ‘만폭동’ 등 명화 67점이 들어 있다. <근역서휘>는 총 37책으로 정몽주, 안평대군에서 동시대 이도영에 이르는 1306인의 시와 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으로 엄청난 컬렉션이 아닐 수 없다.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훗날 다산 박영철의 소유로 되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1940년 서울대에 기증되어 서울대박물관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위업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위창 탐방기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古物]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一石)을 차지할 만하도다.” 간송 전형필이 사설 박물관 보화각을 세우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오세창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창이 간송에게 보낸 당부 편지가 있다.
“3·1만세운동 때 감옥에도 다녀오니 남은 재산이 별로 없더군. 생활이 힘들 때마다 선친이 남겨주신 서화를 몇 점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네.…<중략>…그러니 자네도 힘들게 수장한 물건을 절대 다시 내놓지 않아도 될 만큼만 모으게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오랫동안 애써서 모은 수장품이 자네 스스로 또는 자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게." 위창의 이 당부가 간송에게 ‘수집 이후 보존’ 방법을 고민하게 하였고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로 사설 박물관을 세울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간송의 눈을 뜨게 하고 박물관 설립 결심까지 하게 해서 문화재를 잃어버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위창이 한국미술사에서 한 일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광복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하지 않았고, 독립운동도 하였던 원로였으므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치 단체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했다. 초청받고 얼굴만 비쳤을 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은퇴 후, 조용히 살았으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대전을 거쳐 대구로 내려갔다. 1951년 4월 16일 나인협의 장례식 장례위원장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구 대봉동 31번지의 집에서 병석에 누운 지 1년 만에, 1953년 12월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졌다.
(오래 전부터 대구 대봉동 31번지를 확인해보려는 계획이었지만 아직껏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자료를 제공해주실 분이 계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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