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늘이 시골 동창회 운동회이다.
오늘이 10.3 시골 운동회이다. 초등학교 동기인 김천배 전 교장선생이 초청으로 충남 아산시 선장면 소재 모교인 선장초등학교 동창회 운동회에 갔다 왔다. 마음이 들뜬 탓인지, 서울에서 7시 고속버스를 타고 아산으로 향하여도 배고픈 줄은 몰랐다, 이OO 군이 선장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동창회장으로서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김천배 교장선생은 온양 버스터미널까지 나왔었다,
그리고 우리 1년 선배이고 5년간 그 옛날에 면장을 하셨던 한 면장이라고 우리들 윗동네 죽산 리 1구 출신인 한OO 선배라고를 만났다. 김 교장이 훈련소에서 3년간 한숱 밥과 한 방에서 잔바 있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로 나를 보자고 하였다고 OO 공대를 나온 선배님을 만나러, 선장 가는 길에 죽산 1구에 들려 한OO 선배를 모시고 운동회에 참가하였다. 50여 년 전으로 기억은 막 줄달음 쳐 나갔다. 한 OO 선배는 부친과 나이가 들을수록 같아 졌고 김 교장과 “너 나”하는 것을 보고 대학 임시를 위해 3수 하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선배는 선배다, 더구나 선 . 후배를 따지는 전통이 남다른 OO 고룰 나온 나로서는 더 했다. 산 넘어 신창초등학교에 보내던 죽산 1구에서의 관습은 남 달렀다, 신창초등학교를 나올 정도로 지리적으로 신창과 가까웠으나 한 면장님이 선장면장이 되시는 바람에 한OO 선배는 죽산 1구에서는 예외적으로 행정구역에 따라 선장국민학교를 나온 케이스였다. 덕분에 우리는 34회로서 33회 한분을 모시고 참석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이 OO 동창회장의 말로는 벌써 멀리 간 친구들도 많았고, 갈 준비를 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 이유로 6,25세대인 우리 동기들은 6.25로 인하여 교육기회가 늦어져 5-6년 늦게 학교를 다닌 동기들도 많았지만! 이야기 주머니를 꺼내자 과묵하던 동창회장의 정다운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모두가 허무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운동회이다. 가을하늘이라더니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이 오늘의 운동회에 참석한 동문들을 반기는 것 같았다. 고추잠자리도 마찬가지 이었다. 새 빨 같게 알을 밴 고추잠자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 사이로 정답게 우리들에게 인사했고 50여년 만에 참석하는 운동회에 유감스럽게도 과거 이 학교 학생시절에 그 넓던 운동장은 손바닥만 하게 작아 졌으며, 운동장 가로 널려있던 국 밥 집 하며, 국수집 등 운동장가로 빼곡히 놓여 있던 가계들은 없어 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 고사리 손의 참석자들은 이제 70을 바라다 보는 노인들이 되어 운동회에 참석하였으니, 인걸은 정말로 온데 간 데가 없었다. 단지 거친 손길만이 그동안의 흘러간 세월을 말해 주는 듯하였다, 그래도 운동회에 참석하였던 고사리 손 들의 함성은 들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후배들은 재미있어 하였다. 우리가 34회니 그 동안의 역사상 2000대에 졸업한 80회 이상의 아우님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모든 것에 열의가 있었고 이점은 여자나 남자나 똑 같았다. 그래서 나는 또 우리들의 나이를 생각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70가까이 되어 열심인 사람은 예외적이었다. 집에 가도 별로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집에 갈려고 들 하였다. 학교일은 등한시하고!, 하여 우리가 정렬하는데 맨 처음에 서서 솔선수범하자고 이야기하여 우리가 운동장에 서자, 아우님들이 그때서나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이들도 할 이야기가 있었으리라. 선배님들을 앞서서 줄을 서기가 뭣하지 않은가?
이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애국가 제창 등이 뒤 딸았다. 이것과 관련, 어느 행사를 보아도 국수주의적으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적인 순서였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지구의 끝에 붙은 나라들이 한 번도 인류의 역사에 중심에 서 있지 않아, 조그만 나라로서 지금과 같이 좋은 시절이 어디 있었느냐고 하던 실례와도 똑 같았다. 그래서 이 천편일률적이 순서가 나에겐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자 이제 우리도 미국마냥 이민들로 구성되어 애국 애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실절적인 필요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진국을 면하려면 후진국에서 웃는 일은 피하는 것이 낳지 않을까?
육 교장선생님(여)의 격려사와 아산시장의 축사, 그리고 금년도에도 할 인재가 없어 다시 회장으로 이를 맡았다는 최OO 회장의 경과보고와 운동회 시작선언 등이 뒤를 이었다. 하나같이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감정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도 2-30년 와보고 십 던, 첫 배움의 샘터로서 이곳에서 열린 운동회에 참석,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따스하고 포근한 안식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는 운동회는 시작되었다, 사회를 보던 사람의 유모가 넘치는 사회가, 보는 이의 흥을 돋구었다. 나와 우리 일행은 육 교장선생님이 초청으로 자리를 옮겨 교장실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점심 식사가 다 되었다는 최OO 회장의 이야기에 자리를 옮겨, 국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침 겸 점심을 먹는 나 에겐 정말 맛있는 점심이었다. 그래서 또 오랜만에 포식을 하였다. 이것은 나의 크나큰 잘못이었다. 선장에 와서 점심을 먹으면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져 항상 포식을 하였다. 그래서 음식을 만들었던 분에게 정말 맛 있었다고 한마디 하였다.
그리고 저녁때가 다 되어 서울로 귀환하였다, 한해선배인 한 사장님을 죽산 1구로 모셔다 드리고 죽산 2구에 다시 와서 임OO 군에게 오래 만에 농담도 해보고 하며 보냈다. 오래 간만에 갖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김천배 교장선생님이 넘겨 준 아산 밤 한 봉지는 집사람에게 할 말을 새로이 만들어 주었다, 정말이지 어머님의 품을 떠나는 자식 같은 정을 느낌은 너무한 사고일까?, 나는 항상 그렇게 느껴졌다, 끝.
첫댓글 저도 같이 자랐던 애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해서
한 번쯤은 그런 모임에 가고 싶었는데 아직 못했지요.
어렸을 때 일들은 평생을 동반하나 봅니다.
너무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에
그런 호화스러움을 맛볼 수도 없지만요.
동창들이 함께 여행하고
자녀들 결혼식에 찾아가 만나고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