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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0일,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4월 10일, 사순절 제6주 주일(종려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사순절 제6주 주일 (종려주일) 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42장 (거룩한 주님께)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교독문 129. 종려주일 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인도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회 중: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인도자: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회 중: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인도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회 중: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인도자: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회 중: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인도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회 중: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다같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대표기도: 뉴질랜드 기도서
예수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외침들이 잠잠해질 때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 곁에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누가복음 19:28~40 (성경)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특별찬양:
찬송가 141장 (호산나 호산나) 을 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사순절 제6주 주일이면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손에 들고 길에 펴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라고 찬양하면서 주님을 맞이했던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내일(11일)부터 토요일(16일)까지 ‘고난주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내어주신 주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잡히신 14일(목)은 세족 목요일, 돌아가신 15일(금)은 성 금요일, 죽음 가운데 계셨던 16일(토)은 성 토요일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면서도, 고난의 길, 곧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을 묵상하며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내는 시간입니다.
2. 본문
본문을 먼저 살펴봅니다. 본문의 앞 선 배경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음을 먼저 기억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뿐 아니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이런 일련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마주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이르러서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남의 물건을 막 가져가면 안될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혹 누가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나귀 주인을 만나지만,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또 무슨 일을 하시려나’ 하는 생각에 두말없이 나귀를 내어줍니다. [*.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동네로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가 마을에 널리 퍼졌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나귀를 내어주는 배경에는 ‘주께서 과연 어떤 일에 나귀를 쓰시려 하는지’ 하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린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접하지 못했다면 도둑으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나귀 주인은 혹 예언서의 말씀을 떠 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언서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예언서의 말씀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날에 왕은 어린 나귀 새끼의 등에 올라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병거와 말에 대비되는) 겸손과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스가랴 9:9-10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제자들은 자신의 겉옷을 어린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올라 타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예수님 제자의 온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펴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기도 합니다(요한복음 12:12~13). 그들은 자신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특별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뜻합니다)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칩니다. 앞에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외친 것은 시편 118:26a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에서 따온 것입니다. 뒤의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를 통해 하늘의 전조로 전해 준 메시지입니다. 평화와 영광입니다. 메시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메시지입니다. 평화와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실 때,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는 누가복음 2:14에 쓰여진 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였습니다. 오늘 온 무리의 제자들이 부른 노래와 무슨 차이가 있나요? 두 노래 모두 영광와 평화를 노래합니다. 제자의 무리가 찬송하는 ‘가장 높은 곳’과 하늘의 천사가 노래하는 ‘지극히 높은 곳’은 모두 하나님의 권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는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조금 다르게 전해집니다. 천사의 노래에서 평화는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제자의 무리가 찬송하는 노래는 “하늘에는 평화요”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늘에서는 영광과 평화인데, 땅에서는 아직 아닌 것입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이루어집니다. ref.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사실,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제자의 온 무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며 외치는 소리는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게 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왕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서만 지금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께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인데, 평화에 관한 일은 그들 눈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41-42절 말씀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우리에게, 땅이 아닌, ’하늘에는 평화요’라고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나와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마리아의 향유를 장례를 위한 것으로 받으신 주님께서, 온 무리의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도 (비록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왕의 개념은 달랐지만) 마치 자신의 ‘상여소리’처럼 받으십니다.
3. 죽음을 사는 사람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죽음을 향한 행진이었고,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행진이 됩니다. 한 개인을 생각하면 지극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가져오게 될 선물을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이 됩니다. 안타까운 슬픔과 감사의 기쁨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며 섞여있는 엄중한 시간입니다. 죽음을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역사 속에서 죽음을 살았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그로 인한 선물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첫째는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의 친구들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는 모든 백성들에게 엎드려 절하라고 합니다.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합니다. 그때에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옵니다. 왕은 ‘이제라도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세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 3:16-18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결국 그들은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겠노라’는 그들은 죽음을 살아야 했습니다. 풀무불로 들어가는 그들의 심정은 마치 죽음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심경일 것입니다. [*.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그들은 풀무불 가운데서 살아 나옵니다. 그들(과 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위상이 올라갔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다니엘 3:29-30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둘째는 부림절의 유래가 된 에스더 이야기입니다.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수상 하만이 바사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을 살육하고자 했을 때 당시 왕비였던 에스더가 용기 있게 왕 앞에 나아가 유대인을 구한 이야기입니다. 왕의 허락없이 왕에게 나아가면 (왕이 금 규를 내밀어 용서하지 않는 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움에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왕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는 죽음을 살아 유대 민족의 살륙을 막았던 것입니다. 살륙의 날이 기쁨의 날로 바뀌었고 이 날이 바로 부림절입니다. [*. 부림절: BC 5세기에 바사(페르시아) 통치자들로부터 유대인들이 목숨을 구한 사건을 기념한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성서〉 〈에스더〉에 나온다. 아하수에로 왕의 총리대신 하만은 바사 치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려 하였으나 유대인 왕비인 에스더의 지혜로 학살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만이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한 일을 빗대어 그날을 부림절이라고 했다. 부림절 의식은 아달월 13일, 즉 축일 전날인 '타아니트 에스델'이라는 금식일로 시작한다. 부림절 회당 예배에서 독특한 점은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즐긴다-위키백과에서]
유대인의 생사존망을 앞에 두고, 에스더는 믿음의 고백,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말과 함께 왕 앞에 나서게 되는데, 인류의 구원을 앞에 두고, 십자가 죽음의 길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님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ref. 에스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셋째는 죽음을 산 스데반의 순교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끌어내 돌로 쳐 죽이게 됩니다. 그 때에 스데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숨을 거둡니다. 사도행전 7:59~60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죽음을 살았던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에 갇혀있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스데반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복음은 예루살렘에 남아, ‘유대-그리스도교(Jewish-Christianity)’라는 유대의 한 종파로 남고 말았을 것입니다.
넷째는 죽음을 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순교이야기입니다. 폴리캅은 주님의 제자들 바로 뒤를 잇는 사도라는 점에서 ‘속사도 교부’(Apostolic Father)로 불립니다. [*. 기록으로 남아있는 순교사화입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폴리캅을 체포하러 왔을 때, 폴리캅은 그들이 먹고 마실 음식상을 준비하게 했다. 그들이 순교의 제물을 앞에 두고 먹고 마시는 동안 폴리캅은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요청했다. 그러나 거의 두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 그의 기도는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기도를 마친 그가 압송되어 처형장에 들어섰을 때, 폴리갑의 명성과 고령을 생각한 지방 총독이 말했다. “맹세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석방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욕하라." 죽음을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폴리캅이 입을 열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황제에게 맹세하라는 추상같은 명령 앞에서 폴리캅의 무릎은 결코 굽혀지지 않았다. 총독의 협박이 이어졌다. “내겐 맹수들이 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너를 그 우리에 던져버릴 것이다." 맹수들의 포효 속에서 폴리캅이 말했다. “야수들을 부르십시오!" 피에 굶주린 잔혹한 로마인들의 고함이 처형장을 뒤덮을 때에 총독의 심문이 이어졌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불태울 것이다." 그러자 폴리캅이 다시 대답했다. “당신은 잠시 타다 소멸되는 불을 가지고 위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악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다가오는 심판과 영원한 처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지체하십니까? 오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병사들이 폴리캅을 장작더미 위의 기둥에 묶으려 할 때 폴리캅이 말했다. “내가 불을 견딜 수 있게 하실 분이 또한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장작더미 위에 남아있게 하실 것입니다." 기둥에 묶인 폴리캅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큰 소리로 기도했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의 불멸 안에서 영과 육이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얻고, 그리스도의 잔 안에서 순교자에 포함되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이지 않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고, 계시하셨으며, 성취하신 대로, 이제 부요하고 받으실 만한 제물로 순교자들 가운데 저를 받아주옵소서" 폴리캅의 기도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기적을 보았다. 기둥에 묶인 폴리캅은 머리카락 한 올도 불에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이 폴리갑의 주위를 아치형태로 감싸 노구의 순교자를 지키는 듯했고, 처형장이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찼다. 결코 불로는 폴리캅을 처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사형집행관이 칼로 그를 난자했다. 그때 흐르는 폴리갑의 피가 맹렬히 타오르던 불길을 잠재워버렸다.”]
죽음을 살았던 폴리캅의 순교는 핍박을 받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믿음을 지키는 큰 힘이요, 귀감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이야기입니다. 그는 히틀러 나치를 전복하는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사형당한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독일 고백교회 창설자 중 한 분입니다. 감옥에서 그가 남긴 편지입니다. “나와 함께 하며 인도해주신 선한 능력이 온갖 두려움을 넘어 위안과 힘을 주었습니다. 내 곁의 당신을 생각하며 이 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새해를 당신과 함께 맞으렵니다. 과거는 아직도 우리의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들 슬픔의 나날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버지, 시련을 허락하신 영혼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위로와 치유를 허락하소서. 슬픔의 잔에서 고통마저 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당신의 뜻이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사랑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한번 더 사람의 기쁨과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게 하소서. 슬픔에서 배웠으니 그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오늘은 촛불들이 기쁨을 비추게 하소서. 보라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당신의 빛이 아니신가요? 우리를 간절한 만남으로 이끄는 빛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가장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으십니다. 이제 침묵은 더 깊어져 가고 당신 자녀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둠에 싸이고 당신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니 용기를 내어 미래로 향합니다. 새 날이 시작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1945년 4월 8일 아침에 짧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본문을 읽고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간수가 들어왔습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함께 간다’는 말과 함께 그는 교수대로 갑니다. 함께 있던 죄수들에게 그는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1945년 4월 9일 새벽에 교수대 아래서 마지막 기도를 마친 뒤 그의 삶을 마치게 됩니다. 본회퍼가 죽은 지 3주 후에 히틀러는 자살했고, 한달 뒤 독일 제3제국은 무너졌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비록 39년의 짧은 삶을 살다가 떠났지만 그의 ‘죽음을 산 삶’은 교회에 ‘남은 자’가 있음을 보여주었고, 전후 독일 교회의 일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게 됩니다. 그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참다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4. 나가는 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 개인에게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여정으로 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엄중한 시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다시 사실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 믿는 사람, 곧 ‘죽음을 사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 에스더, 스데반, 폴리캅, 본회퍼 같은 이들이 ‘죽음을 살았던 사람들,’ ‘살아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각 개인에게는 안타깝고 슬픈 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믿음의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살아내어 생명의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그 길이 시작됩니다. 주님 가신 길을 묵상하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은 무엇일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살아서 믿는 자’ 되어 ‘영원히 죽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 하늘과 땅에는 평화가 되게 하십시오.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아들 예수에게 보내시는 마지막 편지’라는 심정으로 읽어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조 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십자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아들 예수의 그 길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도, 이 편지와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
찬송가 142장 (시온에 오시는 주)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봉헌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139장 (오 영원한 내 주 예수)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