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여 받는 복의 열매. / 愛の従順で受ける祝福の実。( 2024년 1월 14일 주일예배)
본문; 마태복음 7:7-12
마 7:7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8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9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10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7.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る。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る。門を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る。8.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つけ、門をたたく者には開かれる。9. あなたがたのだれが、パンを欲しがる自分の子供に、石を与えるだろうか。10. 魚を欲しがるのに、蛇を与えるだろうか。11.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りながらも、自分の子供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まして、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求める者に良い物をくださるにちがいない。12. だから、人にしてもらいたいと思うことは何でも、あなたがたも人にしなさい。これこそ律法と預言者である。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사랑할 수 없고, 오로지 예수님께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까지 3주째 성경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저와 여러분이 사랑으로 소문나고 사랑의 능력으로 모든 어두움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의 실천과 순종을 통해 현실의 현장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한 호감이 아닌 삶의 열매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지난 주 예화 영상에서 보았듯이 엄마도 사랑하고, 피자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두가지의 사랑이 같은 사랑이라면 엄마가 무척이나 서운해 할 것이라는 표현이 있었죠. 사랑은 단순한 기분이나 감정이 아닌,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연합회의 신년대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임원으로 활동하느라 이리저리 바쁜 와중에 겨우 마지막 강의 시간이 되어서야 잠깐 들어가서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강사님께서 마침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셨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연속 3주 동안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저에게 주님께서 제게 듣는 자의 자리에 앉혀 주셨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강사님께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모습에 대한 예를 들어 주시면서 자신의 통장 잔고가 줄어들고 있다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누군가를 섬기고 배려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손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말씀이었지요. 또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고,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기분이 상할 수 없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계산과 그리스도인의 계산은 다르다고 하는데요. 보통 한국에서 마트나 수퍼에서 할인 행사를 할 때 “원 플러스 원”이라는 표현을 자주합니다. 하나사면 또 하나를 준다는 뜻이지요. 강사님은 그래서 한국에서는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1 더하기 1의 답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사랑이며, 한없는 은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복음이 하나에 하나를 더하는 사랑으로 현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메시지를 마치고 결단 기도를 요청하시는데.. 지난 주일에 우리가 함께 결단하며 기도했던... 사랑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회개의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입을 통해, 그리고 저의 귀를 통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의 순종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체로 간절한 기도나, 혹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때 자주 접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7절부터 8절까지는 기도하는 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지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본문에서 구하다는 단어인 aivte,w(아이테오)는 요청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지요. 혹은 받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한 청구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나라에서 복지수당을 준다고 하며 신청하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도 즐겁고 흐뭇한 마음으로 신청하지요. 그렇게 요구하고 청구하는 것이 곧 구하다는 말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내가 필요하다 싶은 것에 대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전제로 요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찾는다는 말인 zhte,w(쩨테오)는 명확한 목적의식으로 집중해서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에 산만하게 눈을 돌리지 않고 집중하여 찾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찾을 때 분명한 목적으로 가지고 찾는 것입니다. 흔히 아이쇼핑이라는 것을 할 때는 뭔가 좋은 것이 있을까... 하며 이것저것을 훑어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구입하기를 원하는 어떤 그 제품을 사기 위해서 상점에 들어가면 그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서 진열대와 통로를 움직이며 찾게 되지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몸으로 실천하며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로만, 혹은 생각으로만 소원을 빌듯이 손만 비비지 말고 몸으로 움직이며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을 몸으로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약속하고 계시지요.
오늘 제가 이 시간의 메시지는 분명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기도에 관하여 너무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성경적인 사랑은 매우 불가분의... 중요한 관계로 묶여 있으며, 또한 사랑의 순종이 기도응답의 에너지원이라고 믿습니다. 9절~11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므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해 주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모가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들의 요청하는 것과 꼭 필요하다고 목표한 것에 대해서 반응하듯이 주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이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구했느냐”의 방법론이나 행동법칙(노하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1+1은 산술적으로는 2가 되지요. 이것이 방법론과 행동법칙에 따라 구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3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의미가 되기도 하지요. 1+1이 어떤 관계냐에 따라서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펼쳐서 11절을 다시 한 번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요청하고 청구하면,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2절이 이어지는데요. 소위 황금률이라는 별명이 붙은 구절이지요.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데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씀인데요. 여기서 ‘대접’하다는 단어대신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어서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실은 기도응답의 에너지원이 되는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접을 받기 원한다는 것은 곧 내가 삶의 경험을 통해 필요하다고 체감하고 실감한 것을 요청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자신의 부모로부터 자녀의 입장에서 대접을 받기 원한다는 것은 자녀의 입장에서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자연스레 요구하고 요청할 수 있지요. 그 모습이 사람의 유형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남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가족은 부탁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요청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기본적인 예의와 예절은 당연히 갖춰야 하겠지요. 말은 부탁하듯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필요한 것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리낌이 없이 요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에 사랑의 원리를 붙여 놓으신 것은 결국 우리가 구하고 원하는 복과 은혜는 모두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만일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단순한 율법적인 의무이기만 하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믿고 누리는 혜택을 얻기가 너무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무거운 짐과 거리낄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앞서 신년성회 때 오신 강사님의 예화를 이야기하면서 사랑할 수록 통장의 잔고가 줄어든다고 했는데요.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손해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함으로 어떤 방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생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향에서 복과 은혜를 더욱 채우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는지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순종하고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녀인 우리의 기도와 요청에 응답하시는 것이지요.
톨스토이의 작품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구두 만드는 장인이 천사를 만나고 겪는 에피소드를 그린 내용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하일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 때까지 구두 장인의 집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이 발견해야 할 세가지 질문은 첫째,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니다.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때마다 미하일은 미소를 짓습니다.
첫째 질문의 답은, 사람 안에는 동정심이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베푸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의 답은, 사람은 자신의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답입니다. 앞서 첫번째 질문과 연결되는 답이기도 한데요. 사람은 각자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사랑으로 서로를 동정하고,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서로의 필요와 요구를 채울 때, 비록 앞날에 대해서 알 수 없고,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 알 수 없을지라도 생존하고 생명을 지키는데 두려움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러시아 정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성경적인 축복의 원리는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할 때, 그 어떤 저주스러운 운명이 우리를 노리고 있을지라도 서로를 지키는 든든한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창작한 소설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결국 우리가 당장 손해를 보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랑의 실천에 순종한다면 우리의 실천과 순종에 더 큰 믿음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또한 복된 삶의 열매를 채우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장면인데요. 먼저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이 상식에서 벗어난 손해의 행실에 아브라함은 순종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런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곧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한 제물로 바치게 되는 표징이 되었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던 명령은 단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제물로 바치기로 결단하셨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먼저 사랑하시면서 본을 보이시고, 우리가 우리의 가능한 범주 내에서 사랑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믿음의 문제, 기도응답의 문제, 복과 은혜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두 해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랑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일상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 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전 10:33)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유익이 아닌, 많은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사랑은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서 돈과 물건을 주고받고 거래하는 장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땅이 참된 평화와 안녕으로 충만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말씀으로, 권능으로, 그리고 복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제 그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구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럼 성령께서 능력을 주시고, 할 수 있는 의지를 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충만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랑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복과 기도의 응답, 그리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이 채워지는 삶으로 이 땅의 부흥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 안에 사랑을 심으시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율법이나 교리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안에 미리 심어 두신 사랑으로 순종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능력을 주셔서 천국을 먼저 살게 됩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천국을 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의 열매를 먹고 마심으로 기뻐하며 삽니다. 또한 죽어서도 부활과 영생의 삶을 누리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행실과 순종은 부담되고, 어려운 행위를 억지로 짜내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원하여 기뻐하는 마음으로 손과 발을 먼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사랑하라 하시는 그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주저하지 않고 손과 발로 순종함으로 복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