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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 21 수요 예배 - 사도행전 강해 91
훼방자 바울
사도행전 21장 27절-40절(378장)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얼마 동안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조용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부터 정신 차릴 새 없을 정도로 빠르게 상황이 전개됩니다. 바울이 성전에 있는 모습을 눈여겨 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에 대해 열심이 있는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폭동에 대한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바울을 폭도들의 손에서 구출해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유대인들에게 붙잡힌 바울(27-31a)
먼저 27-29절을 읽습니다.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29)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정결례를 행하고 제물을 드리는 등의 일들을 행하면서 그가 율법을 준수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충고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7일간 성전을 오가며 결례를 행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을 본 율법에 열심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바울을 인정하는 쪽으로 돌아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에 대한 극단적인 열심을 가진 그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냥 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바울을 미워하고 반대하던 유대인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결례를 마치는 7일째가 되자 드디어 활동을 시작하는데, 누가는 이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좇아서 예루살렘 왔거나, 아니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바울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성전에서 바울을 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은 이들이 이레 째 되는 날 비로소 바울을 보게 된 것처럼 번역하고 있지만, ‘보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바라보다, 인지하다, 관찰하다, 주목하다’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과거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이레째 되는 날 성전에서 처음 바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목하여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행동은 뭐라고 흠 잡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29절의 기록처럼 바울을 고소할 빌미를 잡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에베소 사람,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성내를 다니는 것을 눈여겨 보아두었었는데,*** 이 날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오해였지만, 그들은 사실의 여부를 확인한 새도 없이, 기회를 놓칠세라 성전에 있던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데아오마이’(qeavomai)는 원래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방문하다, 보다, 바라보다, 관찰하다’(to behold)라는 뜻이며, ‘1)보다, 쳐다보다, 주목하다, 응시하다 2)보러 가다, 만나다 3)보고 배우다, 인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드로비모(Trovfimo", Trophimus)는 ‘자양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보다 먼저 마게도냐에서 드로아에 가서 사도의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행 20:4). 그는 두기고와 더불어 아시아 지방 여러 교회를 대표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들이 보내는 헌물을 가지고 왔다.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는 기사가 그에 대한 마지막 기사이다(딤후 4:20).
*** 29절에서 ‘보고’로 번역된 ‘프로오라오’(prooravw)는 원래 ‘미리보다, 미리 알아채다, 마음에 새겨두다, 미리 내보내다’(to see beforehand)라는 뜻이며, ‘1)먼저 보다 2)눈앞에서 지키다 3)은유. 항상 마음에 두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노미조’(nomivzw)는 원래 ‘법(용도)에 따라 행하다, 익숙하다, 생각하다, 간주하다, 상상하다’(to deem)라는 뜻이며, ‘1)습관이나 관습을 지키다, 습관이나 관습에 따르다 2)여기다, 생각하다, 가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일단 성전에 있는 무리의 마음을 어지럽혀 폭동이 일어나도록 선동했습니다.* 일단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난입하여 그를 한 곳에 몰아넣고는**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어디를 가서든***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여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바울이 이전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에 특별히 스데반을 정죄하면서 사용했던 표현과 매우 흡사합니다(행 6:11-14****). 과거에 스데반을 율법과 성전 모독죄로 정죄하여 돌로 쳐서 죽게 했던 바울이 이제는 똑같은 죄목으로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바울이 이번에는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여서*****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말합니다. 당시의 성전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이방인의 뜰)이 구분되어 있어서, 이방인들이 이 금기를 어기고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가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에 대한 열심을 인정한 로마 당국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인정해 주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갔다가 죽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양쪽 뜰을 가르는 울타리에 이방인이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을 붙여놓았던 것입니다(Bruce). 그러므로 바울을 미워해서 아시아에서부터 바울을 따라온 유대인들로서는 바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 ‘충동하여’로 번역된 ‘슁케오’(sugcevw)는 원래 ‘함께 쏟다, 혼합하다, (집회가) 혼란에 빠지다, (마음이) 당혹하다, 혼동되다, 소요에 빠지다’(to pour together)라는 뜻이며, ‘1)함께 쏟다, 뒤섞다 2)마음을 어지럽히다, 폭동을 선동하다 3)당황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붙들고’로 번역된 ‘에피발로’(ejpibavllw)에는 붙들었다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원래 ‘던져 넣다, 반영하다, 속하다, 때려 넣다, 떨어지다, 위에 놓다, 채워 넣다, 뻗치다, 생각해 내다’(to throw upon)라는 뜻이며, ‘1)걸다, 두다 2)의지하다, 난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각처에서’로 번역된 ‘판타쿠’(pantacou')는 ‘세계적으로, 열방에서, 도처에서, 어디나’(everywhere)라는 뜻이다.
**** “(11)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 ‘데리고’로 번역된 ‘에이사고’(eijsavgw)는 ‘도입하다, 데려오다, 들여오다, 데리고 들어가다, 끌어들이다’(to bring in)라는 뜻이다.
* ‘코이노오’(koinovw)는 원래 ‘불경하게 하다, 일반적이게 하다, 더럽히다, 오염시키다, 불결하게 하다’(to make impure)라는 뜻이며, ‘품위 없게 만들다, 부정하게 하다, 더럽히다, 세속화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을 더 정확하게 풀어서 설명한다면 거룩한 곳인 성전을 평범한 곳으로 세속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30-31절 상반절까지를 읽습니다.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성전에 있던 유대인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바울을 향해 달려와서는** 바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는**** 성전 문들을 모두 닫았습니다.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낸 성난 유대인 무리는 곧바로 바울에게 성전 모독죄를 물어 즉결 처분하여, 공개적으로 사형에 처하고자***** 했습니다. 본문 31절은 “죽이려 할 때에”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2절을 보면 천부장이 폭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바울이 있는 곳에 왔을 때에, 유대인들은 이미 바울을 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치기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치다, 몽둥이나 주먹으로 치다’**라는 뜻으로서 성이 난 군중들이 이미 바울에 대한 집단 구타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소동하여’라고 번역된 ‘키네오’(kinevw)는 원래 ‘움직이다, 이동하다, 흔들다’(to stir up)라는 뜻이며, ‘1)가게 하다, 움직이다, 움직이게 하다 2)은유. 흥분시키다, 뒤흔들어 어지럽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달려와 모여’라고 번역된 ‘쉰드로메’(sundromhv)는 ‘같이 달림, (군중들이 사납게) 같이 달려가는 것, 함께 달리다, (적대적이거나 폭동에 가담한) 군집’(a running together of people)이라는 뜻이다.
*** ‘잡아’라고 번역된 ‘에피람바노마이’(ejpilambavnomai)는 원래 ‘잡다, 굳게 하다, 붙잡다’(take hold of, seize upon)라는 뜻이며, ‘추가로 취하다, 붙잡다, 소유하다, 얻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끌고 나가니’로 번역된 ‘헬퀴오’(eJlkuvw)는 원래 ‘잡아끌다’(to drag)라는 뜻인데, ‘1)잡아당기다, 끌어내다 2)은유. 내면의 힘으로 잡아당기다, 인도하다, 억지로 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죽이려’라고 번역된 ‘아포크테이노’(ajpokteivnw)는 원래 ‘공공연히 살해하다, 파괴하다, 사형에 처하다, 죽이다, 도살하다’(to kill)라는 뜻이며, ‘1)어떤 방법으로든 죽이다 2)은유. 잃게 하다, 폐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할 때에’로 번여된 ‘제테오’(zhtevw)는 원래 ‘구하다, (하나님을) 경배하다, (생명을 빼앗기 위해) 계획하다, 하려하다, 열망하다, 인내하다, 물어보다, 질문하다, 추구하다’(to seek)라는 뜻이며, ‘1)발견하기 위하여 찾다 2)요구하다,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튑토’(tuvptw)는 원래 ‘치다, 몽둥이로 치다, 주먹으로 치다, 충돌, 벌하다’라는 뜻이며, ‘1)치다, 두드리다, 때리다, 가슴을 치다 2)처벌로 때리다 3)상처를 입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천부장에 의해서 구출된 바울(31b-40v)
1) 천부장이 바울을 구출함(31b-36v)
이러한 상태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바울은 성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스데반 집사가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순교했던 것이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던 교회를 흩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해서 바울이 순교하는 것이 그의 선교 사역의 완성과 관련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가보가 성령님에 의해서 예언하면서, 바울이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결박되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기어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11v).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에서 뭇매를 맞아 죽는 것은 ‘순교’일 수는 있지만, 그의 선교 사역의 완성이거나 예언의 성취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절대절명의 순간에 성난 유대인의 손에서 바울을 구출해낸 손길이 등장합니다. 31절 중반절부터 봅니다. “(31)...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 가니(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바울이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즈음에,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그곳의 치안을 맡고 있는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오순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기에, 로마 당국은 폭동이나 소요를 대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은 즉각적으로 보고되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보고를 받은 즉시로**** 자기 휘하의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동원하여 현장으로 출동합니다. 그들이 현장으로 급하게 달려 내려오는 것을 본 군중은 그제야 바울을 치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천부장은 그 무리 가까이 가자 부하들에게 바울을 체포하여***** 두 개의 쇠사슬로 결박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바울을 치던 무리를 향하여 이 사람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기에 소동을 일으키고 죽이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은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소란과 소음**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영문, 즉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로 호송해 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바울을 호송해 가는 중에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에서 안토니아 요새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를 때 즈음에 성난 유대인 군중은 이대로 가다가는 바울을 자기들 뜻대로 성전 모독죄로 처형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바울을 향해 폭력을 쓰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할 수 없이 바울의 안전을 위해서 그를 들어 올려서*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없애야 한다고, 제거하자며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왔습니다.
* 천부장은 보통 1000여명의 병력을 통솔하는 로마군의 장교를 가리킨다. 천부장 휘하의 부대는 보통 보병 760명과 마병 2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군대’라고 번역된 ‘스페이라’(spei'ra)는 원래 ‘똘똘 감음, 사람의 한 무리, (로마) 보병대, (레위지파 문지기의 한) 그룹, 폭도’(military)라는 뜻이며, ‘1)원이나 공 모양으로 말린 것, 감긴 것 2)보병대, 로마 군단(레기온)의 1/10, 약 600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천부장은 23:26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라는 사람이었다.
** ‘소문’이라고 번역된 ‘파시스’(favsi")는 원래 ‘진술, 보고, 소식’(information, a report)라는 뜻이며, ‘1)폭로 2)은밀한 범죄에 대한 적발, 폭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들리니’라고 번역된 ‘아나바이노’(ajnabaivnw)는 ‘듣는’ 것과는 무관하게 ‘올라가다, 일어나다, 기어오르다, 오르다, 자라다, 솟아나다, 나타나다’(to go up ascen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고’(파시스)가 ‘올라갔다’(아나바이노)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급히’라고 번역된 ‘엑사우테스’(ejxauvth")는 ‘그때로부터, 즉시로, 즉각, 이윽고, 곧’(immediately)이라는 뜻이다.
***** 이것은 성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잡았다고 했을 때 사용된 ‘에피람바노마이’(ejpilambavnomai)이다.
* 여기에 사용된 ‘데오’(devw)는 ‘묶다, 동이다, 매듭하다, 조이다, 감다’(to bind, tie)라는 뜻이며, ‘끈을 묶다, 채우다, 책임을 지우다, 의무를 지우다, 금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가보가 바울의 체포를 예언하면서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11v).
** ‘소동’이라고 번역된 ‘도뤼보스’(qovrubo")는 원래 ‘방해, 소란, 소요’(disturbance)라는 뜻이며, ‘1)소음, 소란, 소동 2)공중질서의 위반으로서 폭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실상’이라고 번역된 ‘아스팔레스’(ajsfalhv")는 원래 ‘안전한, 확실한, 분명한’(secure)이라는 뜻이며, ‘1)확고한 2)확실한, 진리의 3)입증하기에 적합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안토니아 요새는 보통 ‘안토니아 탑’(Tower of Antonia)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구역의 북서 부분에 솟아 있는 성채(城砦)의 명칭이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전(殿)에 속한 영문’(느 2:8) 또는 ‘하나넬 망대’(느 3:1)로도 불렸다. 원래는 바사 총독의 관저였는데 후에 마카비 가(家)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탑을 세워 보강하면서 바리스(bavri")라고 불렀다. 나중에 헤롯 대왕이 거액을 들여 증축하여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안토니아 탑’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높이 21m의 단애(斷崖) 위에 세워졌으며 네 귀퉁이에 탑(塔)이 건립된 형태인데, 3기(三基)의 탑의 높이는 21m이고 남동 귀퉁이 탑의 높이는 30m인데, 그곳에서 성전의 성역 전체를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이것은 주랑(株廊)에 의해 성전에 연결되어 있어서 성전에서 소란이 생겼을 경우에는 탑에서 감시하고 있던 군대가 곧 출동하여 진압할 수가 있었다. 이곳은 로마 총독의 관저이기도 하고, 로마 주둔군의 병영이기도 했다. 성전 뜰에서는 돌단에 올라가 병영에 달하게 되어 있어서, 바울은 이 돌층계 위에 서서 연설을 한 것이다(행 21:27-40). 이것은 오늘날에는 가와니메의 첨탑(尖塔 Ghawanimeh Minaret)으로 불린다.
***** ‘포행’이라고 번역된 ‘비아’(biva)는 ‘강제, 폭력, 힘, 폭력행위에 사용되는 힘, 완력’(force violence)이라는 뜻이다.
* ‘바스타조’(bastavzw)는 원래 ‘들어올리다, 참다, 공포하다, 지탱하다, 영접하다, 운반하다’(to lift, pick up)라는 뜻이며, ‘1)손으로 집어 올리다 2)운반하거나 얹기 위해 집어 들다 2)얹다, 운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받음(37-40v)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37-40절을 보겠습니다. “(37)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38)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39)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가는 계단을 다 올라가 이제 문을 통해서 들어가려는 시점에서* 바울은 그 천부장에게 말을 겁니다. 그것은 성난 유대인 무리를 향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연설한 내용은 22장으로 넘어가면 나오기 때문에 다음 주에 살펴볼 것이지만, 그 내용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변명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를 때려죽이려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이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할 그 때에’로 번역된 ‘멜로’(mevllw)는 원래 ‘의도하다, 바야흐로 ~하려고 하다, 어떤 일을 감당하다, 대하여, ~를 따라, 오다, 의미하다, 생각하다, 마음먹다, 준비하다, 돌아가다’라는 뜻이다.
** 40절에서 ‘말하여’라고 번역된 ‘프로스포네오’(prosfwnevw)는 원래 ‘~대하여 말하다, 연설하다, 외치다, 호출하다, 부르다’(to call to, summon)라는 뜻이며, ‘1)부르다, 불러서 말하다 2)소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먼저 천부장과 대화할 수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바울은 아마도 이 말을 당시 로마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헬라어로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 말을 아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인이 아니냐는 추측을 합니다. 성경에는 이 부분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이 애굽인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A.D. 54년경에 한 애굽인 거짓 선지자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반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대한 선지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추종자 3만 여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와 광야와 감람산 등에 거하면서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와 로마군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천부장이 말하는 ‘4천의 자객****’은 거짓 선지자를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자객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편 이 애굽인의 반란은 벨릭스(Felix, A.D. 52-58) 총독에 의해서 진압되었습니다. 추종자들의 일부는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생포되었으며, 이 애굽인 거짓 선지자는 감쪽같이 도주했던 것입니다.
* ‘있느뇨’라고 번역된 ‘엑세스티’(e[xesti)는 ‘가능하다, ~은 옳다, 합법적이다’(it is possible)라는 뜻이다.
** ‘그러면’으로 번역된 ‘아라’(a[ra)는 다소 결정적인 추론을 지시하는 불변사로서 ‘우연히 (인간의) 방법으로, 의문의 여지없이, 아마도, 그러므로, 그리하여, 진실로,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then)라는 뜻이다.
*** ‘난을 일으켜’라고 번역된 ‘아나스타토오’(ajnastatovw)는 ‘집에서 쫓겨난, 방해하다, 괴롭히다, 전복하다, 혼란시키다, 선동하다, 자극하다, 동요시키다’(to stir up)라는 뜻이다.
**** ‘자객’은 원문으로 ‘안드라스 톤 시카리온’(a[ndra" tw'n sikarivwn)이다. ‘안드라스’의 원형은 ‘아네르’(ajnhvr)인데 원래는 ‘사람, 동료, 남편, 씨’(man)라는 뜻이며, ‘1)(성과 관련해서)남자, 남편, 약혼자 또는 정혼자 2)(나이와 관련해서)소년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의 구분 3)남자 4)일반적으로 사용하여 남자와 여자를 모두 지칭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카리온’의 원형은 ‘시카리오스’(sikavrio")로서 ‘단도 쓰는 사람, 암살자, 자객, 목을 베는 사람, 약탈자, 로마인에 의해 불법화된 유대 광신자’(sworn assassins)라는 뜻이다. ‘톤’은 정관사이다.
바울은 자신이 애굽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지가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이라고 밝힙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에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었고, 훌륭한 대학까지 있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을 ‘소읍’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 성경의 ‘소읍’이라는 번역은 ‘작은 동네’라는 뜻이지만, 원문에는 ‘하찮은 도시’가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당신도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이 사실을 밝혔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정중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천부장은 바울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 연설할 기회를 허락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가는 계단의 맨 꼭대기에 서서 유대인들을 향해 연설을 하기 시작합니다.
* ‘소읍이 아닌’은 원문에서 ‘우크 아세무 폴레오스’(oujk ajshvmou povlew")라고 되어 있다. ‘우크’는 ‘아니’(not)라는 뜻이고, ‘폴레오스’의 원형은 ‘폴리스’(povli")로서 ‘(성벽으로 싸인) 읍, 도시, 성’(city, town)라는 뜻이다. ‘아세무’의 원형은 ‘아세모스’(a[shmo")로서 ‘흔적 없는,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표를 안 한, 소인이 찍히지 않은, 알 수 없는, 표식이 없는, 하찮은, 조악한’(not marked)이라는 뜻이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훼방자 바울’이라고 붙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바울이 훼방자 노릇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을 모함하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바울은 ‘훼방자’가 맞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디모데전서 1:13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유대인들에게서 동일한 정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울이 스데반을 처형하는 일을 주동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스데반의 자리에서 처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바울이 이렇게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만 이러한 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변화! 변화!’하고 외쳐댄다 하여도 변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지 않은 상황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손길을 통해서 바울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믿지 않는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 바울의 선교 사역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체포와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재판과 압송의 과정들을 통해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 그의 선교 사역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자꾸만 제공해 주시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바울 자신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끊임없이, 자꾸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들어 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점점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떠냐?’고 묻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열정,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추구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때 일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일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에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훼방자 바울보다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서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미지근한 사람들인지요! 우리는 바울처럼 훼방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우리는 바울처럼 헌신하고 희생하지도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움직여야 합니다. 눈에 아무것 보이지 않아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