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구약성경 인용)
누가복음 23장 28-31절『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이 말씀은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는 여인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머지않아 로마 군대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될 것이고 참혹한 재앙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닥쳐올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때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의 날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비통해하신 것이다.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닥칠 그 재앙의 날이 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원래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것은 히브리 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었다.
그 반대는 그들에게는 저주받은 인생과 같게 여겨졌다. 그런데 머지않아 닥칠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피할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숨을 길도 없으며, 그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이 겪을 고통을 참을 수도 없으며, 온 식구가 함께 그 재앙을 당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사람마다 “차라리 아이들이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아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만큼 비참한 상태에 놓이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직역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율법과 복음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갈라디아서 4장 21-22절에서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율법과 복음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율법 속에서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종은 하갈(율법)을 의미하고, 자유가 있는 여자는 사라(복음)를 의미한다.
하갈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으며,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다. 육체를 따르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약속을 따르는 자들은 씨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약속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서 태어난 아들이다. 즉 영적으로 씨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씨의 약속이 없는 땅의 사람으로 부터 태어난 자라는 의미다. 이것은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가 어떻게 다른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24-26절『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두 언약중 하나는 하나님이 모세와 시내산에서 맺은 율법의 언약(옛언약)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브라함과의 씨의 언약(새언약)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시내산에서 낳았다.
예루살렘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 부활생명을 의미한다. 곧 씨의 약속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내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은 씨의 약속이 없으므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와 자녀들이 죄의 종노릇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예루살렘은 씨의 약속이 있는 성전이다. 성도의 심령 안에서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할 때, 심령 속에 성령의 역사로 새성전이 들어서게 된다.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는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 어머니라는 말은 성령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왜냐하면 거듭난다는 말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표현을 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기록된 바의 기록은 이사야 54장 1절의 말씀이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 비유적인 말씀은 바울이 율법과 성령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잉태하지 못한 자는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 때문에 즐겁지 않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즐겁게 되라는 것이다. 잉태하지 못하는 자(율법주의 자)가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씨의 약속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들어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생명으로 거듭날 때, 기쁨이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진다는 것은 약속의 씨가 많이 심겨져서 부활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홀로 사는 자는 남편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유인이다. 남편있는 자는 율법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남편에게 매여있다고 표현된다.
예수님께서 끝에 하신 말씀 즉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하신 말씀에서 『푸른 나무』는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즉시 불에 타 없어질 나무 곧 부활생명이 없는 자를 상징한다.『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부활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자는 부활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둘째 사망에 처해진다. 세상에 살면서 미리 둘째 사망(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에 처해지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