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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계에 선 불안을 견딜 수 있는가
스틱스(Styx)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 고등
학교 시절, <Boat on the River>라는 미국 노래를 듣고서일 것이다. 스틱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 이름이다. 죽으면 이 강에 다다른다. 그러면 뱃사공이 나와 죽은 이를 배에 태워 지하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뱃사공의 이름은 카론(Charon)이다. 명왕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강의 이쪽은 삶의 세계고, 저쪽은 죽음의 세계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룬다.
스틱스 강물에 무생물이 닿으면 녹아 없어지지만, 생
물은 강물에 닿은 부분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된다. 아킬레스가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발목만이 강물에 담겨지지 않아 발목이
불사의 능력에서 제외된 것이다. 바로 아킬레스건이
다.
그리스 신화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내 멋대로 해석을
해본다면, 스틱스 강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강물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는 강한데, 경계에 서 있을 때 생기는 불안이 사람을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 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감지 능력을 우리는 흔히 “통찰”이라고 부른다.
경계에 서 있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강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사람의 폭과 능력은 딱 거기에서 멈춘다. 한쪽을 선택한 후 그것을 세계의 전부로 착각한다.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 버린다. 오직 세계를 참과 거짓,선과 악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세계는 변한다. 세계는 한 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변화는 흐름이다.
흐름은 사실 경계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과정이다.
변화를 긍정하면서 경계의 중첩이 세계의 진실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흐르는 것은 부드럽다. 변하는 것은 유연하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산 자의 부드러움을 정지시켜 딱딱하게 굳도록 하는
것이 이념이나 신념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경계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을 선택
하여 남겨진 것들이다.
세계가 변화라면, 즉 경계의 중첩이라면 이제 이 흐름을 어떻게 흐름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흐름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승리자다. 왜냐하면 흐름을 그 흐름 그대로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 변화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흐름에 반응하는 사람은 승자가 되고, 그 흐
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패자가 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다.
그래야 강하다!”
2. 비틀기와 꼬임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
다. 그러다가 궁극적으로는 완벽에 도달하고자 한다. 완벽함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흠결이 없으며, 유한에 갇히지 않으며, 치우침이 없는 균질의 절대 균형 상태라고 말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런 세계에 “이데아”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다. 이런 완벽함을 표현하는 데는 기하학적 원이 적격이다.
사람들에게 우주는 완벽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지구를 오래전부터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했고 행성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감춰진 진실을 드러나게 해주었는데, 행성은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운동을 한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원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타원에는 이미 있다. 바로 힘이다. 우주의 진실은 힘이 작동하는 타원에 더 잘 살아 있다.
자객이나 동물이 목표 대상을 기다릴 때는 정지된 상
태에서 고요하고 철저히 부동의 상태에 든다. 그러나 갑자기 목표 대상이 시야에 들면 몸은 바로 비틀어진다. 힘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허리를 꼬아서 탄성을 준비한다. 그 탄성(彈性)이 적중(中)이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보장할 것이다.
인간이 지구라는 별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아무리 고차원적인 의미로 치장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으로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 즉 생존 이상일 수 없다. 인간이 구축한 문명의 근본 동인은 생존으로 압축된다. 인간 활동의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문화도, 예술도, 수학도,문학도, 철학도, 상업도, 종교도, 과학도 심지어는 지루한 방탕까지도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은 ‘분류’로 시작된다.
원초적으로 피아를 구분하고,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르며, 적대적인 것과 우호적인 것을 구별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다. 이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는 것도 필요해진다. 그래야 본인도
실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도움이
된다.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우리는 ‘지적 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을 갖 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성숙이라는 것은 결국 지적인 능력의 계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지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틀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어 버린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하여 소통시켜 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은유’다.
은유는 ‘비틀기’다. 시인들은 비틀기의 명수들인데,
뒤틀린 틈새로 새로운 것들이 탄생한다.
이렇게 꼬아가면서 우리는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D
NA 이중나선의 꼬임으로 인류의 유전 정보가 확산된다.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인 세계, 이것이 진실이
다. 진실한 자는 평면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 전혀 관계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넓혀 확장하고 또 확장해나간다. 힘찬 모습이다.
* 경계 시모음
경계 / 김주대
안팎의 경계가 피부라면
피부의 안으로 들어온 바깥의 찬 기운은 안인가 밖인가
눈으로 만져 기억으로 내려간
꿈속에서도 그려지는 고향의 산들은 나인가 풍경인가
당신의 흔들리는 어깨에서 손 안으로 번지던 열
손 안에 만져지던 눈물은 당신인가 당신인가
나와 타인의 경계가 마음이라면
눈 감아도 그려지는 사람만이 나인가
마음에 두려고 해도 자꾸 달아나는 기억은 타인일 테지
밥을 먹다가
내가 낳은 새끼들도 밥은 먹고 있을까
목이 메일 때 목 안으로 떨어지는 눈물들은
나일 거야 온통 나일 거야
마음이니까
나와 당신의 경계가 입이라면
식인의 풍습을 이해할 수 있어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옮겨 하나가 되고자 하는 무서운 사랑
입이 경계라면 입 밖으로 내뱉은 저주와
간사한 희망의 말들은 내가 아닐 거야
당신의 몸을 핥던 혀로 당신을 차지하겠다던 생각이
믿음직스러웠던 거
입 안으로 오는 당신
우리는 넘나들다 서로를 가두며 풀고
서로에게 진입하여 무차별 공존하지
부드럽게 서로를 넘어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려고
자주 힘들었던 걸 거야
현재를 파괴시키고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을지 늘 흥분했잖아
앞발이 손이 되었듯이
지느러미가 날개가 되었듯이
안팎의 경계가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나이겠는데
사랑하는 상처까지 나여야 ‘나’이겠는데
경계를 지나다 / 김진돈
1
팔목 잘린 한낮이 현관 앞에 떨어졌다
태풍이 지나가고 나무들이 쓰러지고
검은 피를 뚝뚝 흘리며 바람이 어둠을 몰고 왔다
새장의 새들을 날려주었다 한 송이 꽃을 건네며, 나는
정답 없는 천 개의 질문이 박힌 벽의 경계
벽 아래에 수없이 나뒹굴며 닫힌 입술들
검은 숲 너머에 답이 있는지 이쪽에 있는지 알 수 없는
2
빠져나가지 못한 오후는 창문 틈에 갇혀있고
질문을 자작나무에 걸어두자 사방이 흔들린다
생각이 나를 헛도는 것인가 내가 생각을 헛도는 것인가
느끼는 것과 못 느끼는 것의 틈에서 기호가 흔들린다 아니 고요해진다
3
입 안에서 빠져나오는 푸른 잎들
그대를 오독하고 있는 나는
끝없이 생각을 확장시키며 입속의 혀를 다독거린다
마음의 파동은 창문 밖으로 숲속으로 뻗어나간다
한바탕 태풍이 쓸고 간 쓰러진 나무들 사이, 산벚나무 가지에 별들이 다녀갔다
별들이 다녀간 경계와 경계의 영역 아니,
나와 또 다른 나
경계의 다른 지점을 보다
—생명의 환(幻)
김추인
붉은 눈이 나를 보고 있다
어떤 칼이 지나갔을까
어떤 두께 없는 날이 스며들었을까
저며져 결대로 늘어선 참돔의 맨살
비늘 형상이다
피했다 싶은데 눈이 마주쳤는지
꼬리를 털석 들었다 놓는다
서슬에 참빗 살 같은 붉은 아가미
곁눈으로 보아도 숨을 쉬고 있다
문득 내 어깨 삼각근 결 사이로 회칼이 날아
찰나를 저민 듯
난데없이 어깻죽지가 서늘한데 내 모든 통점이 일어서듯
어찔-한데 저럴 수가*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나를 보고 있다
살점들이 시끄러운 입속으로 사라지고
가시 뼈 드러나는데
뭬 대수냔 듯 호흡 고요하다
포정의 소**도 이랬을까
그 순한 눈망울로
날렵한 칼에 해체되는 제 몸을 지켜보았을까
———
* 물고기는 압점(壓點)만 있고 통점(痛點)이 없다. 해서 포를 뜬 후에도 한동안 숨을 쉬고 움직인다.
** 《장자》 〈양생주〉 편에 나오는 소 도축 기술이 도(道)에 이르렀다는 백정.
경계/ 이영광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경계·2
—추분을 지나며
류병구
섭씨 36도
명줄이 쇠귀신 보다도 더 질겼던 삼복
어제 그제의
소나기 몇 줄금에 경계가 곤두섰다
때를 놓쳐버린 매미가
울음을 삭이고
불꽃 도리다 만 의젓한 들녘은
떫은 풋가을을 주워 담는다
안골댁 할머니가
잘 여문 햇볕만 뚝뚝 끊어
멍석에 널고 있다
예정일이 다가오는 햇나락
만삭의 과체중으로 푹 꼬부라졌다
경계를 허무는 것에 대하여 / 이기홍
새싹들이 겨울 땅을 허문다
잔디의 새순은 묘지 위에 올라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물고
하늘을 山 이마까지 끌어내려서
땅과의 경계를 허문다
山 과 山 사이의 골을 강 안개가 메우고
강물의 널따란 폭을
허무는 작은 나뭇배 하나
밤의 경계를 별빛이 허물어야 여명이 온다
세상 모든 경계를 지우려고 밤새워
순백의 몸으로 언 땅에 수만 번 와 닿는 눈
넘을 수 없는 것으로 믿었던 나와 세상의 경계를
아이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허물고 있다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신 햇빛 아래 소리 없이 핀
작디작은 풀꽃들,
녹두알만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고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떼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경계/노향림
파로호 팻말이 넘어진 뒤에서
새벽이 힐끔 뒤돌아본다.
참붕어잡이를 위해 외진 곳에
터 잡은 층층 낚시꾼들
좌선하듯 등 돌려 껌짝하지 않는다.
유속이 다른 상류엔 무럿이 숨어 있을까
월척을 꿈꾸며 마음 바삐 달려온
초보꾼들이 랜턴을 끈다.
숨죽인 그들 앞에 잔챙이 시간들만
거품으로 올라온다.
눈 시린 푸른 핵심은 끝내
낚이질 않는다.
입질 붙는 짜릿한 덫의 새월에
걸려들지 않는 핵심은 스스로를 결박해
수심 깊은 곳에 눈뜨고 숨어 있으리
제 시름 낮게 끄고 잠 없는
보트 낚시꾼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부표도 없는 경계 넘어 재빨리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오른다.
쉼 없이 물이 차갑게 반짝인다.
경계를 걷다보면 선이 지워진 곳에 이를 때가 있다 /김명철
바람 없이 수직으로 내리는 비를 맞고 있다
그 비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저수지를 보고 있다
하얀 비늘로 솟아오르다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물고기를 보고 있다
물의 저항 없이 허공으로 치솟을 때의 몸과
허공의 저항을 받으며 낙하하는 그 까마득함의 격차
물 밖으로 나오기 전에
지느러미로 저항을 다스리던 사람은
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눈으로 저항과 맞닥뜨리던 사람은
물 안팎의 경계에서
젖은 몸과 마른 몸을 번갈아가며 슬퍼할 줄 아는 자의 그림자
제방에 벗어둔 신발 한 켤레가 물기를 머금고 가지런히 가라앉는다
발을 빼고 뒤돌아보았을 때 남아 있는 빗금친 덩어리 같은
젖은 몸에 스며드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느끼고 있다
그 빛을 온전히 반사하는 저수지를 보고 있다
마음의 경계 / 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꽃밭의 경계/안도현
꽃밭을 일구려고 괭이로 땅의 이마를 때리다가
날 끝에 불꽃이 울던 저녁도 있었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로 삼으려고 돌을 주우러 다닐 때
계곡이 나타나면 차를 세우고 공사장을 지나갈때면
목 빼고 기웃거리고 쓰러지는 남의 집 됫박만 한 주춧돌에도 눈독을 들였어라
물 댄 논에 로터리 치는 트랙터 지나갈 때
그 뒤를 겅중겅중 좇는 백로의 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렸어라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하였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꽃이라면 돌덩이로 가득한 이 세상은 꽃밭인 것인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아무 욕심이 없어졌어라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를 짓고 여기와 여기 아닌 것들의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
꽃밭과 꽃밭 아닌 것의 경계는 다 소용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경계를 그은 다음에 꽃밭 치장에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어라.
경계선장애/김해자
순전히 통증 때문에 시작되었을 게다 경계를 건너 뛰어 버리는 내 몽상은, 열한 살 무렵 배가 아파 조퇴하고 집에 가는 길, 길 속에 길을 말아놓은 듯 걸어도 걸어도 땡볕은 걸어온 만큼 앞으로 밀려나왔다 집들이 미웠다 들어갈 수 없으므로 눈앞에 보이는 쌍둥이 같은 일본식 목조건물들 하나하나 지나가며 우리 집도 미웠다 너무나 멀리 있으므로
오리 남짓한 그 길은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창자를 뒤트는 배 속에서 꿈꾸듯 생각들이 미어져 나왔다 저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엄마가 있다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면 내 새끼 소리가 뛰어나온다면, 진땀 흘리며 길에 주저앉으며 왜 똑같은 집인데 들어가면 안 되나, 왜 우리 집만 집인가, 왜 우리 엄마만 엄마인가,
그로부터 40년 더 살았어도 지상의 법에 좀체 익숙해 지지못한 나는 열한 살, 그림과 숫자 몇 그려진 돈으로 모든 걸사고파는 이 세계가 날마다 낯설다 저 혼자 우뚝 서 있기만잘하는 산에 왜 임자가 따로 있나, 저렇게 많은 집들이 있는데 왜 누군가는 들어갈 곳이 없나, 넌 배고파 허덕이는데 왜 난 배불러 헉헉대나,
문턱을 넘고 싶은 게 병이라면 아직도 아픈 탓, 이것이 혹 근절해야 할 분순한 사성이라면 아픈 배와 머리와 부러진 팔다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리라, 경계도 금도 없는 갯벌이여, 물과 물 사이 철퍼덕 누운 넌 어디까지가 너인가 도대체 어디까지가 네 것인가
경계선/ 정호승
경계선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선은 아무도 지킬 수 없다
새들도 경계선을 지키지 않는다
새들은 경계선을 무심히 넘나들 뿐
경계선을 입에 물고 하늘을 날 뿐
경계선에서 경계를 허물지 못하는
인간 같은 새들은 아무도 없다
경계/ 안도현
내 자취방 창호지는
안과 밖을 따로 구분짓지 않는
바람의 비무장지대
경계/장철문
냉이꽃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는다
한 발 한 발
뚤레 뚤레
사방 곁눈질을 한다
한 발이 저도 모르게 경계를 넘자마자,
막무가내다
떼로 몰려가서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급기야 탱자나무 울타리도 하얗게 자지러지고 만다
경계/백무산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데도 걷는 법이 있는 것
지난 길 다 버린 뒤의 경계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
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
첫댓글 경계/ 이영광
모내기철 기다리는 남양주 들판
해질녘, 논은 찬데
황새는 물 위에 떠 있다
보이지도 않는 긴 다리를
철심처럼 진흙에 박아놓고
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
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
드넓은 수면의
평형을 잡고 있다
물 아래 꿈틀대는 진흙 세상의
혈을 짚고 서 있다
황새는 꿈꾸듯 생각하는 새,
다시 어두워오는 누리에 불현듯 남은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한 발마저 디딜 곳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일까
진흙 세상에 두 발을 다 담글 수는
없다는 것일까
저 새는 날개에 스며 있을 아득한 처음을,
날개를 움찔거리게 하는 마지막의 부름을
외발로 궁리하는 새,
사라지려는 듯 태어나려는 듯
일생을 한 점에 모아
뿌옇게 딛고 서 있었는데
사람 그림자 지나가고,
시린 물이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밀리는 동안
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
사라지고 없다
백만 평의 어둠이 그의 텅 빈 자리에
밤새도록 새까맣게 들어앉아야 한다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신 햇빛 아래 소리 없이 핀
작디작은 풀꽃들,
녹두알만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고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떼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경계선/ 정호승
경계선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선은 아무도 지킬 수 없다
새들도 경계선을 지키지 않는다
새들은 경계선을 무심히 넘나들 뿐
경계선을 입에 물고 하늘을 날 뿐
경계선에서 경계를 허물지 못하는
인간 같은 새들은 아무도 없다
경계/백무산
누가 이런 길 내었나
가던 길 끊겼네
무슨 사태 일었나 가파른
벼랑에 목이 잘린 길 하나 걸렸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길 끊겼네
날은 지고
울던 새도 울음 끊겼네
바람은 수직으로 솟아 불고
별들도 발 아래 지네
길을 가는 데도 걷는 법이 있는 것
지난 길 다 버린 뒤의 경계
아, 나 이제 경계에 서려네
칼날 같은 경계에 서려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히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