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물류창고 / 이수명
물류 창고
이수명
우리는 물류 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 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세계의 문학》 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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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일곱 번째 시집 『물류창고』를 냈다. 시집 안에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10편 들어 있고 이 시는 맨 앞에 수록된 것이다. 물류창고 시들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다. 이 시를 쓸 무렵, 같은 제목을 달고 여러 편의 시가 연이어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완성하고 나서는 이전에 썼던 시들과 달리 한동안 시에서 떠나지 못했고, 결국 물류창고 시를 계속해서 쓰게 되었다. 당시 심경이 그랬다. 새로운 물류창고가 쓰여도 웬일인지 마음에 충분하지 못해 또 다른 물류창고를 써야 했고, 그렇게 해서 열 편의 물류창고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멈춘 것도 아니다. 시집을 출간한 후에도 물류창고 시를 세 편 더 발표했으니 말이다. 이 세 편은 다음 시집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물류창고의 여진이 여덟 번째 시집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이렇게 같은 제목의 시를 계속 쓰게 된 계기를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연작시에 끌리지 않는다. 같은 제목에 일련번호를 붙인 통상의 연작시에 피로를 느낄 정도이다. 물류창고에 번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다. 번호가 없기 때문인지 연작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지 물류창고의 반복은 잘 설명되지 않는 중첩일 뿐이고, 분명한 것은 이 제목의 시를 쓰게 된 것이 순전히 첫 번째 물류창고의 파워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시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한 시집에 묶여도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시는 고심과 퇴고의 결과이고, 또 어떤 시는 거의 습격하다시피 온다. 나는 그것을 홀린 듯이 받아 적을 뿐이다. 시 쪽에서 다가오고 나를 지나가버리는 시, 내가 별로 한 게 없다고 느끼는 이런 시를 나는 사랑한다. 이것이 소위 영감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다르다. 영감은 이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이다. 시의 습격은 시가 나보다 빠르고 내가 들어서기 전에 나를 관통하고 지나가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선 자리에서 시가 나를 밀어내는 것이다.
첫 물류창고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물류창고라는 단어를 거리에서 보았을 때, 바로 시의 습격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물류창고라는 제목을 쓰고 나자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라는 문장이 바로 나타나고, 이후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식간에 진행된 것이다. 나는 나의 음성과 톤이 아닌 무언가가,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나 대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 시가 태어난 것을 기억한다. 내가 아니라 시가 움직이는 것 같은 이 순간은 특별한 기쁨을 준다. 물류창고를 계속 서성인 것은 아마도 이 감회 때문일 것이다.
⸺계간 《시와 함께》 202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