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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벌통
이 민 혜
6.25전쟁이 발발勃發하자 몇몇 동료들이 함께 피란을 가자고 찾아왔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에겐 남녀학생들이 거머리에 물려 피 흘리며 심은 신품종 벼와 실험재배 중인 밭작물들이 우북수북 자라고, 새끼 낳은 암소와 분봉分蜂한 꿀벌이 있는 농장을 나몰라라 떠난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농업선생이셨고 농장은 졸업 후 충청북도 곳곳의 초등학교 교사가 될, 사범학교 재학생들의 농사짓기 체험실습지였다. 공산치하에서 아버지가 하신 일은 교무실 출근부에 도장을 찍자마자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에 있는 농장으로 직진하신 것뿐이다.
튼실하게 자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일 무렵 공산군이 패주敗走했다. 수복의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부역했다는 이유로 치안대에 불려 다니느라 농작물의 추수가 늦어지는 것에 애를 태웠고, '빨갱이 선생' 소리를 들으며 취조 받는 일에 분통을 터트리시곤 했다.
아군은 북진을 계속했고 들녘은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되신 어느 날, 외출했던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장담을 했다. 머잖아 전쟁이 끝난다고. 그런데, 그런데······ 아버지의 장담은 빗나갔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와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인해전술로 대대적인 반격을 취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퇴각을 거듭했다. 12월로 들어서자 평양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이어 흥남에서의 철수소식이 들리더니 곧 38선 이북이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갔다며 피란민들이 밀려왔다.
여름에는 꿈쩍도 않던 아버지가 짐을 꾸렸다. 피란을 가지않고 농장을 돌봤다가 사상까지 의심받으며 곤욕을 치른 일이 끔찍하다며 꼭두새벽부터 서둘기에 그날로 떠나시는 줄 알았는데 웬걸, 축사 앞을 서성이며 미루적거렸다. 사흘쯤 지났던가! 성능이 한물간 제니스라디오가 치르륵대며 정부가 부산으로 철수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아버지는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날로 농장의 축사에 있던 가축들을 양도하고 집에서 기르던 암퇘지를 잡았다. 아버지가 일가친척의 청년들과 피란계획을 짜는 동안, 가마솥에서는 돼지 한 마리가 장조림이 되고 있었다. 피란 가는 식구와 집에 남을 식구들의 식량이었다.
피란을 떠나기 전날 어스름 저녁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더니 벌통 앞으로 갔다.
"아침마다 벌통의 출입구를 살펴봐. 죽은 벌이 조금일 때는 늙은 벌이라 괜찮아. 그렇지만 죽은 벌이 많을 때는 어머니께 말씀드려. 막내야, 할 수 있지?"
나는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착실하게 벌통을 살피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우리 집 꿀벌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여섯 살의 봄날, 조치원에 살 때였다. 머리에 검정색 망을 쓴 아버지가 벌통 뚜껑을 열자마자 겁나게 많은 벌들이 날아올랐다.
'어쩌지, 저놈들이 마구 침을 놓으면.' 나는 멀찌감치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틀을 꺼냈다.
"이 녀석들아, 저리가. 너희들 집에 나쁜 것이 생겼나 검사하려는 거야."
"아버지, 벌들이 알아들어요?"
"그럼, 알아듣고말고. 무슨 말을 하나 들으려고 내 주위를 맴돌잖아."
유년의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제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꿀벌에게 일일이 설명하며 돌보시던 모습이다.
아버지가 조치원ㅇㅇ학교에서 청주사범학교로 전근되신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학교농장 안에 있는 관사는 누에머리를 닮은 나지막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어린이날이 가까워지자 꿀이 제일 많다는 아카시아꽃이 뒷산자락을 새하얗게 덮었다. 일벌들의 비행이 놀랍도록 빨라졌다. 꿀 모아오랴 꽃가루 모아오랴, 종일토록 들락대는 날갯짓이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농장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꿀 뜨는 날'이 되었다. 아버지는 벌틀을 꺼내더니 쑥을 넣어 연기를 뿜는 기구로 꿀벌을 온순하게 한 다음 틀에 붙어 있는 놈들을 빗질하여 벌통으로 떨어뜨렸다. 곧 끓는 물에 데운 얇은 칼로 꿀집의 뚜껑을 잘라낸 후 꿀 뜨는 기계에 우산살처럼 꽂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돌렸다.
"아버지, 왜 꿀이 나오지 않아?"
"녀석, 급하긴, 밀봉 꿀은 농도가 짙어서 좀 있어야 나와."
아버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에서야 꿀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꿀이 많이 나오네. 여보, 집에서 쓸 꿀은 다음번에 뜨는 밤꿀에서 나누어 놓고 이 아카시아꿀은 모두 학생들 먹입시다."
아버지의 제안에 어머니는 선선하게 채집한 꿀 전부로 꿀물을 만드시며 걱정을 했다.
"오뉴월 땡볕에 쓰러지는 학생들에게 한 사발씩이라도 모자라지 않게 돌아가야 할텐데······."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흩날리며 떨어지자 밤꽃이 산자락을 덮었고 뒤이어 여러 가지 꽃들이 꿀을 제공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며 벌통의 수가 두 개에서 여섯 개로 늘어났고 어머니는 더 이상 꿀물이 모자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아버지가 함박눈을 맞으며 피란민 대열에 합류하신 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꼼꼼하게 벌통을 살폈다.
남쪽으로 피란 갔던 식구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함께 오지 않으셨니? 어디 편찮으시니?"
어머니의 질문에 작은오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아버지가 안 오셨어요? 한 달 전쯤 상주에서 집으로 가셨는데······."
아버지는 어느 날 새벽 어머니가 사경을 넘나들며 살려달라는 꿈을 꾸었다고 안절부절못하더니 집안의 젊은이들은 계속 남하하라시며 본인은 북상하는 차편을 찾아다녔다. 다행스럽게도 학부형 한 분이 자리를 양보해 주어 콩나물시루 같은 트럭에 오르는 것을 보고 일행은 대구를 향해 떠났단다.
즉각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다녔고, 달리기 잘하는 나를 매일같이 외갓집에 보냈다. 혹시 차가 고장 나 걸어오다가 몹쓸 병에 걸려 지체했을지도 모른다며 상주에서 올라오는 국도변에 있는 외갓집에 가서 마중하란다. 외갓집은 청주의 동쪽에 있고 우리집은 서쪽에 있었다. 열 살의 나는 아침마다 눈 쌓인 들판을 가로질러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초췌해진 아버지가 절룩거리며 오시면 잽싸게 달려가 부축해드리는 상상을 하면서.
한창 전쟁 중이라 차편이 여의치 않았고 통행이 금지된 지역도 많아 달포 전에 사라진 사람의 행방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어머니는 사람들을 빼곡하게 태운 트럭이 상주 인근의 화령고개를 넘다가 골짜기로 굴렀다는 것과 지나가던 미군트럭이 부상자들을 싣고 갔다는 것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디로.' 기진하여 길가의 전신주에 기대앉은 어머니를 누군가 알아봤다.
"아니, 이 선생님 사모님 아니세요. 상주에서 선생님이 하도 다급해 하시기에 도와드린다는 것이 그만······."
자리를 양보하고 트럭에서 내린 그는, 그날로 아버지가 탄 트럭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사고 장소를 지나던 차량이 부상자들을 싣고 어디로 갔는지를 끈질기게 탐문했다고 한다. 부상당한 아버지는 청주를 지나 조치원야전병원으로 가셨던 것이다.
소식을 접한 다음 날, 어머니는 먼동이 트기도 전에 조치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신작로로 가면 오십리 길인 것을 검문소를 피해 논길밭길로 돌아가자니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더뎠다. 야전병원은 제사공장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했다. 민간인은 접근이 금지된 곳을 막무가내로 다가가자니 수없이 제지당하고 총부리 앞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굴하지 않았다. 부상당해 이곳에 실려 온 남편을 만나게 해달라고 탄원하다가 아예 초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초들이 밀어내면 저만큼 궁둥이걸음으로 물러갔다 다시 초소 옆으로 기어가고, 물러갔다 기어가기를 거듭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살아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락을 할텐데, 혹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를 세게 흔들며 생각을 지우는데 저쪽에서 일등병 한 명이 달려왔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넙죽 큰절을 했다.
"사모님, 저 기억하세요? 조회시간이면 쓰러지던 한필입니다. 아버지처럼 챙겨주시던···농업 선생님을···여기서···. 동료들이 보초 설 때 혹시 선생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 달랬어요. 여기··· 선생님 도민증···."
말을 더듬거리는 일등병에게 도민증을 건네받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머니는 결국 비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제자 한필이가 들려준 아버지의 최후를 담담하게 전했다. 교사 출신인 그는 민간인 부상자들의 서류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날도 창고 바닥에 담요 한 장씩 덮고 누워있는 신입환자들의 주머니에서 도민증을 찾아내어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어느 중환자의 도민증을 보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이건필李建弼 선생님!' 환자의 호흡이 심상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임종이 가까운 듯 했다. 선생님 저 한필입니다. 보은 내속리의 한필이······. 꿀물······ 꿀물······.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앉았다.
"아버지는 실눈을 뜨고 한동안 바라보시더니 빙그레 웃으며 숨을 거두셨단다. 살아생전에 '제자는 자식이나 매한가지'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지. 한필이가 임종을 지켰고 집단 매장되는 곳까지 따라가 누워 계신 곳을 상세하게 적어두었더구나."
우리는 학교관사를 되도록 빨리 비워주어야 했다. 이삿짐을 싸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벌통을 어찌해야할지 고심하던 차였다. 네댓 명의 앳된 신사들이 마당에 들어섰다.
"사모님, 저희들 왔습니다. 선생님 소식 듣고 달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조문객들의 손을 잡고,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준 것과 그들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와준 것에 거듭거듭 고마워했다. 벌통문제는 쉽게 풀렸다. 농업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제자들이 너도 나도 한 통씩 메고 갈 줄이야!
나는 믿는다. 아버지 벌통의 꿀벌 후손들이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첫댓글 이 민혜 선생님 !
그간도 건강히 잘 계시지요?
그러셨군요. 그렇게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슬픔을....
선생님 꿈결 같은 날이었습니다.
아버님의 꿀물의 힘으로 건강하시고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민혜선생님~~~
그리운 내 친구야! 오랫만에 에세이스트에 들어 왔단다너의 수필 에 눈길이 가서 차근차근 읽어 보았지
몰랐던어릴 적 이야기를 수필을 통해 알게 되었단다 아버지에 대한 그런 절절한 시연이 있을 줄이야~~
건강히 질 있지? 보고 싶구나 연락해서 함 보자